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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리본과 산방산
 올레길 리본과 산방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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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황상제의 엉덩이에 꽂힌 화살 그리고 산방산

"에끼, 요놈! 내가 누구라고?"

잔뜩 화가 난 옥황상제가 바로 앞에 있는 산봉우리를 덥석 뽑아 사냥꾼을 향해 던졌다. 옥황상제가 화가 난 것은 한 사냥꾼 때문이었다. 그 사냥꾼은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사슴을 향해 화살을 쏜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곳으로 마실 나왔던, 그것도 너무 급한 나머지 숨어서 볼 일을 보고 있던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혀버렸다.

옥황상제가 화가 난 것은 당연했다. 화풀이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졌지만 날렵한 사냥꾼은 잘 피했다. 뽑힌 봉우리가 날아가고 날아가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가서 꽂혔다. 그때부터 한라산은 봉우리 대신 움푹 들어간 백록담이, 서쪽 바닷가에는 밥그릇 모양 봉우리가 생겼다. 백록담 아래 둘레와 엇비슷한 서쪽 바닷가에 가서 꽂힌 그것을 우리는 산방산이라고 불렀다.
 
화순곶자왈을 걸을 때 마주할 수 있는 비경
 화순곶자왈을 걸을 때 마주할 수 있는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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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만 년 전에 형성된 종모양 용암 덩어리인 산방산은 제10코스가 시작되는 화순금모래해수욕장에서부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화순곶자왈 탐방로에서는 왼쪽 눈으로는 숨은 해안가 비경을, 오른쪽 눈으로는 수풀에 절반은 가려진 산방산 뒤통수를 볼 수 있다.

그러다 마침내 넓적한 돌이 깔린 해안가를 지나 산방 연대('煙臺'는 조선시대 외곽에 설치한 대(臺)로,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위에는 가건물을 지어 각종 병기와 생활필수품을 간수했던 곳이다)에 이르면 온전히 앞모습을 다 담을 수가 있다. 내가 갔던 때는 2월이라 아직 겨울 기운이 감도는 산방산이지만, 산방연대를 내려와 마주하는 유채밭에서도 용머리 해안에서도 내내 그 위용이 아우라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용머리 해안
  
송악산 둘레길에서 바라본 산방산
 송악산 둘레길에서 바라본 산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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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이 옥황상제의 분노로 탄생한 것이라면 용머리 해안은 기원전 221년 시황제(始皇帝)로 군림하던 진시황의 호령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듯한 황제였다. 그럼에도 더욱 욕심을 부린 그는 자신의 권력을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해서,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의 탄생을 '싹'부터 자르기로 했다. 당시에 무술에 능했던 호종단에게 명령했다.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영웅이 날만 한 곳의 지맥을 모두 끊어버려라." 호종단은 천하를 돌며 지형을 살피고 돌아다녔다. 마침내 용머리 해안에 도착했고 용의 형상을 닮은 이곳에서 용과 흡사한 영웅이 탄생할 거라고 예감했다. 호종단은 용의 허리 부분을 끊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인간의 운명에 따라 진시황도 때가 되어 유명을 달리했지만 '허리가 잘린 용머리 해안'은 거대한 퇴적암이 기기묘묘한 형태로 펼쳐져서 사람들의 발길을 더욱 끌어 모았다. 아이러니하게도 1653년 타이완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폭풍을 만나 제주에 표류하게 된 하멜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하멜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그 당시 재현한 배 모양 그대로 용머리 해안에 정박해 있다.
 
섯알오름 유채밭 풍경
 섯알오름 유채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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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과 그에 적절한 전설. 제주올레 10코스는 안팎으로 즐거움을 주는 길이다. 햇살이 좋은 사계포구, 사계포구와 송악산으로 연결되는 나른한 해안 도로, 걷다 보면 신석기시대사람 발자국으로 유명한 사계화석을 마주할 수가 있다. 마침내 송악산 둘레길에 다다르면 코발트블루 바다 너머 산방산의 존재감을 다시금 발견하다.

하지만 섯알오름으로 들어서면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전설이 아닌 비극적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산방산이 목격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죄책감이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게 만들었는지도.

한국전쟁의 비극 섯알오름
  
섯알오름 학살터 기념 형상물
 섯알오름 학살터 기념 형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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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의 비극은 한국전쟁에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후방에서 북한군과 결탁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제주도에 예비검속령을 내렸다. 대부분 무고한 민간인 1000여 명이 단속되었다. 반항하면 빨갱이로 간주해서 경찰서 유치장이나 농협 등에 가두었다.

7월 16일과 8월 20일 한국군이 낙동강 지역까지 밀리게 되자 예비검속 된 사람들을 급기야 사살하기에 이르렀다. 섯알오름에서는 200여 명이 처형되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집에 가지 못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유족들에게 사체를 인계하지 않고 한꺼번에 매장해버렸기 때문이다.

1956년 5월 18일 당국의 허락을 받아 시신을 수습하지만 유골이어서 대부분 신분 확인이 불가능했다. 1961년에서야 유족에게 반환되었다. 같은 해 6월 15일에, 제주도민들이 희생자들을 위해 합동으로 묘지를 만들고 세웠던 위령비를 군사 정부는 무참히 파괴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에서야 정부 지원을 받아 학살터를 정비할 수 있었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기각처리 원고승소판결'로 드디어 67년 만에 불명예를 벗을 수가 있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불긴 했지만 예비검속 섯알오름 학살터에서는 그 강도가 절정에 이르렀다. 서 있지 못할 정도로 강한 바람에 화장실로 대피해야 했다. 잠잠해졌을 즈음 다시 나와 일제 군사시설의 하나인 알뜨르비행장을 둘러보고는 들판길로 향했다. 맞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돌아서서 걷는 등 꼼수도 부리긴 했지만 들판에서 감자를 심는 사람들을 봤을 때는 이깟, 바람이야 뭐, 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다.
 
알뜨르 비행장
 알뜨르 비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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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모슬포 항구를 지나서 10점 종점인 모슬포 올레에서 걸음을 멈춘 나는 걸어온 길을 가늠하듯 되돌아봤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걸었던 시간 동안 두서없는 바람이 불었지만 시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알려주듯 이정표 역할을 했다. 바람도 규칙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몹쓸 바람이 불어서 모슬포가 되었다는 이곳에서 나는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태그:#제주올레, #여행 , #섯알오름, #산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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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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