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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김한동.(사진제공: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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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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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시모시(여보세요)" "..." "하잇(네)!" 선 채로 전화를 받는 일본인 광주경찰서장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얼음장같았다. 통화를 끝내고도 그는 멍하게 서있기만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는 고등계장과 사찰계장(현재의 정보과장)을 호출했다. "소련이 오늘부로 참전했소." "옛!" 그들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침착하시오. 지금부터 경시청(현재의 경찰청)의 명령을 전달하겠소. 소련이 성스러운 대동아전쟁에 참전함에 따라 선내(鮮內) 요시찰인들을 전부 잡아들이라는 지시오. 즉시 시행하시오" "하이!"

해방 직전 예비검속 당한 독립운동가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 방관자적 자세를 취했었는데 미국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긴급히 참전을 결정헀다. 소련의 참전은 전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전술이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 패망이 머지 않았음을 직감한 소련은 뒤늦게 참전해 '손 안대고 코 풀기'식 이득을 보려 했다.

이후 광주경찰서 고등계와 사찰계는 발바닥에 땀나듯이 뛰어다니며, 요시찰인들을 잡아들였다. 난리통에 광주경찰서 유치장은 만원이 되었고, 김한동(1915년생)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유치장에 구금됐다. "왜 붙잡아 왔스까?" "글씨, 저놈들이 구석에 몰리능가." "일본에서 대형폭탄이 떨어졌다는데, 그것과 관련이 있슬랑가." 여럿이 중국난방식 의견을 냈지만 무엇 하나 딱 떨어지는 사실이 없었다. 김한동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입을 닫았다. 

그렇게 유치장에 갇힌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일이 일어났다. 그날은 유치장을 지키는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식사도 나오지 않았다. 유치장에 갇힌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경찰서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유치장 안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경찰 놈들이 함정수사를 하는 건 아닌가'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꼬박 하루 동안 무정부상태가 이어졌다. 식사가 나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밥타령을 하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 갑갑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유치장 문이 열렸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일본인 경찰서장이 입을 열었다. "어제 부로 일본은 전쟁을 끝냈소. 당신들 나라는 독립이 되었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믿지 못할 말이었지만 유치장에 계속 갇혀있을 필요도 없었기에 모두가 부리나케 경찰서를 나왔다. 1945년 8월 16일의 일이었다.

헤겔 철학과 에스페란토어에 능통했던 청년

 
김한동(사진제공: 김승일)
 김한동(사진제공: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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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에서 출생한 김한동은 함평나산공립보통학교를 나와 1929년 4월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서중학교·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그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이 터졌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인 학생들의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맞서 저항한 사건으로 그 저항은 전 조선의 학생·청년에게로 확대되었다.

당시 만 14세 나이였던 김한동은 그만 학교에서 퇴학 조치를 당하고 만다. 1930년 4월 고창사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다시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큰 뜻을 품은 그는 상경해 고학당(苦學堂)에 입학했다. 고학당에서 신사상을 접한 그는 1931년 학교를 작파하고 독서회 활동을 하다가 '전남노농협의회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는 비단 식민지 조선의 독립만이 아니라 전 세계 피압박 민족들의 해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 공통어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이를 위해 에스페란토어를 배웠다. 그는 헤겔철학에도 전문가적 식견이 있었다. 1934년에는 러시아의 신사회를 알기 위해 러시아에 입국하려다 체포돼 수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는 1936년 광주부 본정(현재 광주광역시 충장로)에 '히카리사진관'을 열었다. 사진관은 생업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거점 확보와 활동자금 마련을 위한 도구였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항일적색노조 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했고, 그 일로 2년 형을 선고 받아 만기 석방됐다. 그러다가 다시 해방 직전 요시찰인 예비검속 조치로 광주경찰서에 구금됐다. 

아들 보는 앞에서 검거된 아버지

"김 서방, 승일이 엄마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응께 우리 마을로 오소." 김한동은 아내 박계레의 둘째 출산을 앞두고 처가 마을로 이삿짐을 싸라는 장모의 말에 시큰둥했다. 하지만 산후조리를 해줄 사람이 없었기에 1948년 전남 광산군 석곡면 망월리 월산마을로 이사했다.

둘째를 낳은 지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김한동·박계레 부부는 말다툼을 했다. 그날 밤 박계레는 뒷집인 친정집으로 갔다. 다음날 둘째(승철)를 처가에 맡긴 김한동은 장남 김승일(1943년생)을 앞세우고 광주 시내로 발걸음을 향했다. 월산마을에서 시내까지는 20리(8km)였다.

광주 도심을 지나 노점에서 사진기 렌즈를 구경할 때였다. "김한동 꼼짝마!" 하며 사복경찰이 김한동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1948년 11월 22일의 일이었다. 그때는 여순사건이 발발한 지 한 달 되던 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하던 김한동은 해방 후에도 요시찰인이 되었다. 그런 그가 광주에 나타났다는 첩보는 광주경찰서 사찰과에 즉시 전달되었다. 아니 망월리 월산마을부터 미행을 했을 수도 있다.

김한동은 형사에게 사정했다. "나는 잡아가도 좋소만 우리 아그는 친척집에 데려다 주소." 형사가 인정있는 사람이었는지 김한동의 아들 승일을 광주시 북동마을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 김한동은 광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김승일은 그후 아버지를 영원히 볼 수 없었다.

김한동은 '미군정청법령 제19호 위반'으로 구속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김천형무소를 경유해 진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말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불법학살되었다.

"박계레 나왓!" "없어라우." "어디 갔어?" "글씨요. 집 나간 지 일주일 됐구만이라우." 허탕을 친 석곡지서 경찰들은 씩씩거리며 집뒤짐을 했다. 경찰들이 왔다간 지 며칠 후에는 청년단이 들이닥쳤다. 박계레가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빨갱이 집' 가산을 탈취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다. 그들은 솥단지며 숟가락, 이불, 가재도구를 달구지에 실었다.

김한동의 부인 박계레는 인공 시절(북한군 점령기) 마을 여맹위원장을 한 전력 때문에 청년단의 타깃이 됐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박계레의 오빠 박대현은 여동생이 사용하던 '싱거 미싱'을 빼돌렸다. 당시 미싱은 여성들에게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었다. 전쟁 후 남편을 잃은 여성들 대부분이 바느질을 해 자녀를 키웠는데, 미싱은 참으로 요긴한 물건이었다. 덕분에 박계레는 미싱으로 살림을 꾸릴 수 있었다. 

음대 교수가 된 아들

김한동의 아들 김승일은 1967년 9월 어느 날 아침 일찍 서울사대로 갔다. 이날은 '중등교원 검정고시' 실기시험을 보는 날이었다. 우선 시창청음(視唱聽音)을 했다. 시창청음은 악기의 도움 없이 악보를 보고 정확히 노래할 수 있는 능력과 음을 듣고 악보에 적는 것이었다. 시창청음을 정확히 하면 음악교사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

다음은 피아노 실기를 봤다. 그가 연주한 곡은 쇼팽의 '군대 폴로네이즈'였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김승일은 아버지 김한동이 학살되자 학교 선생이 되기로 했다. 친척들이 "신원조회가 제일 약한 것이 선생"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광주사범학교를 나온 김승일은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1961년 전남 화순군 사평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이후 1967년 군에서 제대한 그는 보다 큰 뜻을 품고 조선대 음악교육과에 입학했다. 오전에는 초등학교에 출근하고, 오후에는 대학교 수업에 참여했다. 초등학교 교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해 9월 중등교원시험에 합격한 그는 초등학교에 사표내고 대학교 수업에 열중했다. 밤에는 광주 시내의 '목장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쳐 학비를 보탰다. 피아노 하루 일당이 200원이었는데 당시 교사 한 달 월급이 8000원이었다. 이후 중학교 교사와 대학 생활을 병행하던 그는 졸업 후 학교에 남았다. 조교와 시간강사를 맡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대학교 음악교수를 맡았고, 음대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건국활동 안해 독립유공자 아니다?

김승일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아버지 사건의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그 결과 김한동 사건은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사건'으로 분류되어 진실규명 되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명예회복된 이후에도 김승일은 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해 애쓰고 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김한동이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바지한 바가 없으므로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항일운동을 한 자를 말한다. 단 전향해 반민족행위를 한 자는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다. 이런 자를 제외하고는 독립운동을 한 이는 모두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야 한다. 해방 이후 어떤 사상과 신념을 가졌다 해도 독립운동가는 독립운동가라는 상식을 왜 국가보훈처는 인정하지 않을까?

태그:#김한동, #김승일, #독립유공자, #진주형무소, #예비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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