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20 19:03최종 업데이트 21.05.2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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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원은 활동가가 되기 전까지 자칭 ‘착한 장애인’으로 살았다. 지난해 9월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 졸업식때 아내 이가연씨와 함께. ⓒ 변재원


인터뷰로 처음 만난 사람한테 다짜고짜 내밀한 개인사부터 묻는 건 실례다. 무례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해선 진솔하고 깊이 있는 답변을 끌어내기 힘들다. 처음에는 가벼운 농담이나 신변잡기로 시작해서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삶의 이력으로 넘어가는 게 내가 아는 인터뷰의 정석이다.

그런데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의 경우는 달랐다. 어쩌다 보니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장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내가 질문을 던지고 그가 응답을 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그의 스토리텔링에 내가 취하듯 빨려 들어간 셈이다.
 
발단은 내가 "집이 여기서 가까운가요?"라고 물은 것이었는데, 운이 좋아 전셋값이 폭등하기 직전 대출 잔뜩 끼고 안성맞춤의 전셋집을 구한 얘기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그는 쾌활한 재담꾼이었다.

"홍제동에 방 두 개 딸린 셋집에서 짝꿍이랑 살아요." 

'짝꿍'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나 보다. "일찍 결혼한 편이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변재원은 1993년생, 28살의 젊은 활동가다. 생후 10개월 만에 의료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됐다. 신장 140cm에 척추는 45도 휘어졌고 왼쪽 다리는 앙상하게 굽어서 땅을 딛지 못한다. 설상가상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끊임없는 통증이 그를 엄습한다. 그래도 그는 늘 유쾌하고 기발하다. 장애인 친구들과 강남의 유명 클럽을 찾아 목발을 흔들고 전동휠체어의 전조등을 반짝이며 클러버들과 어울려 논 '장애인의 옥타곤 클럽 체험기'를 써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부터다. 그 이전까지 그는 '착한 장애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예술경영학을 전공했다. 구글코리아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했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학력 연구자인 그가 최저시급을 받는 장애인 활동가가 된 동기는 무엇인지, 지금 전장연에서 벌이는 탈시설운동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청년활동가 변재원이 꿈꾸는 미래는 무엇인지... 나는 제법 긴 질문지를 준비해 갔지만 이미 시작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말 나온 김에 20대 장애인 변재원의 결혼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장인의 가르침 "가짜로 살지 말아라"
 
- 결혼은 언제 하신 거예요?
"2016년 7월이요. 5년 전이죠. (웃음)"
 
아내와 처음 만난 건 2014년 인턴을 하던 직장에서였다. 네덜란드에서 유럽법을 전공한 아내는 서울대 교환학생으로 와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 인턴으로 들어왔고 변재원도 같은 시기 장애인권 관련 인턴으로 들어갔다.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

2년 뒤인 2016년 여름 두 사람은 양가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귀국한 뒤 고려대 대학원에서 헌법학을 전공한 아내 이가연씨는 지금, 진보적인 장애인 인터넷신문 <비마이너> 기자로 일하고 있다. 박봉이지만 둘이 함께 장애인운동을 하는 것도,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어 매일 아침 함께 출근하는 것도 이들 부부에겐 큰 기쁨이다.
 
- 실례되는 질문인데 결혼할 때 처가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중요한 질문이죠. 한국사회에서 비장애 여성이 장애인 남성과 결혼한다고 하면 대개는 당황스러워하시니까요. 근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만 그 걱정을 한 셈이었고요, 장인 장모님은 전혀 거리낌이 없으셨어요."
  

2016년 7월 변재원과 이가연은 양가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 변재원


- 아내분도 부모님 영향을 많이 받으셨나 봐요.

"가연이가 자기 부모님은 정말 특이한 분들이라고 누차 얘기했었는데, 정말 그런 분들일 줄은 몰랐어요. 그 친구가 네덜란드로 돌아가고 난 뒤 매일 둘이서 스카이프 영상통화를 12시간씩 틀어놓고 지냈어요. 그러다가 문득 그 친구 부모님을 찾아 뵈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장애인인 건 아실까? 그런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 나름 각오를 단단히 하고 가셨겠군요.

"그럼요. 그런데 댁으로 찾아가니까 '네가 재원이니?'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절 맞아주시는 거예요."
 
- 놀라지도 않으시고요?

"전혀요. 그냥 맥주 마시면서 음악 얘기, 야구 얘기만 한참 나눴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이야길 꺼냈죠. '제가 가연이 남자친구를 해도 될까요? 장애인인데 괜찮으세요?' 그랬더니 대뜸 '그걸 왜 나한테 허락을 받으려 하니? 내가 너랑 연애하냐? 가연이는 내 소유물이 아니야' 하시더라고요."
 
-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요.

"제가 어느 집에 가든 책장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 집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지식인의 표상' '푸코 전집' 같은 책들이 쭉 꽂혀 있는 거예요. 우리 집 서가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우리아이 옥스퍼드 보내는 방법' 같은 책들만 있는데 (웃음)"
 
- 장인어른이 학자신가요?

"아니에요. 장인어른은 고졸이고, 장모님은 50살 다 돼서 대학에 입학하셨어요. 아드님이랑 성공회대 사회과학부를 같이 다니셨죠. 그 뒤엔 동국대 대학원에 가서 북한학을 공부하셨고요.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임대아파트를 전전하고 넷플릭스 많이 보시는 (웃음) 이름 없고 평범한 분들이에요. 자식이 원하는 것만 묵묵히 밀어줄 뿐, 자식한테 생전 뭘 강요하거나 강제한 적이 없으시죠."
 
-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586들도 자식 교육이나 결혼에 있어서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장인어른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가짜로 살지 말라'는 거예요. 남을 짓밟고 올라가고 경쟁을 통해서 뭘 얻으려고 사는 인생, 그건 다 가짜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저랑 대화가 안 됐어요. (웃음) '경쟁을 왜 해?' 하셔서 '더 좋은 걸 얻어야 하니까요' 하면 '그냥 안 가지면 되잖아' 그러세요. '그게 있어야 저랑 가연이가 좋으니까요' 하면, '아니, 그런 것 없어도 좋다니까' 그러세요."
 
변재원이 전장연 활동가로 오기로 결정하는데도, '우리, 가짜로 살지 말자'는 아내의 말이 큰 힘이 됐다. 덧없는 껍데기와 거품 따위 말끔히 걷어내고 오롯이 진심으로 삶의 알짜배기만 바라보는 것. 장인의 지론은 이제 변재원의 것이 됐다. 
 

지난 11일 서울 동숭동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들야학 교실에서 인터뷰 중인 변재원 정책국장(우)과 이진순 와글 이사장(좌) ⓒ 와글

  
진에어 조현민과의 한판 승부
 
현명한 아내와 처가 식구들을 만나 삶의 좌표를 바로 세우기까지, 변재원의 삶은 장애인으로 무시 받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과정이었다. 남과 다른 체형으로 '켄타우로스'(상체는 인간이고 가슴 아래는 말인 그리스신화의 괴물)라는 놀림을 받으며 사춘기 무렵엔 심각한 게임중독에 빠진 적도 있다. 친구들과 축구도, 농구도 할 수 없는 장애인 소년이 맘껏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건 가상공간의 캐릭터로 분했을 때뿐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게임중독으로 2년을 보낸 뒤 뒤늦게 검정고시학원을 다니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2012년 한예종에 입학했지만 장애인으로서 부딪쳐야 하는 세상의 계단은 가파르고 잔인했다.
 
- 명문대 학생이 되고 나서도 장애인으로서 크게 좌절했던 순간이 있나요?

"2014년에 진에어를 타고 친구들이랑 라오스로 여행을 떠났어요. 갈 때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인천행 비행기를 타려다가 탑승거부를 당한 거예요."
 
- 왜요?

"제게 서약서를 내밀면서 사인해야 태워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서약서 내용은 '네가 아파서 비행기가 회항하거나 운행이 지연되면 승객들의 피해까지 몽땅 물어줘야 한다'는 거였어요."
 
- 그게 말이 돼요? 누구나 예기치 않게 비행기에서 아플 수도 있는 건데.

"마지못해 사인을 하긴 했는데 사유란에 '모르겠음(설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라고 적었죠. 그 사진을 찍어서 진에어 조현민 트위터에 올렸더니 다음날부터 부리나케 전화가 왔어요. 고객센터가 아니라 조현민 앞으로 보내길 잘했죠. (웃음) 진에어 CEO가 바로 찾아오더라고요. (웃음)" 
 

2014년 진에어가 작성하도록 강요한 탑승서약서. 변재원은 이 사진을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려서 진에어의 사과를 받아냈다. ⓒ 변재원 페이스북

  
- 그래서 사과와 보상을 받았나요?

"어떻게 보상해 주면 좋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진에어 사이트에 시각장애인용 예약사이트를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거 말고 달리 보상을 요구하진 않았어요. 아, 3단 우산! 진에어 초록색깔 3단우산을 기념품으로 갖고 왔어요. 그건 받았어요. (웃음)"
 
- 그 전에도 장애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해서 싸운 적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전 일단 싸움을 싫어하고, 저희 아버지는 제주 4.3 유족으로 레드컴플렉스가 엄청 심해서, 싸우지 말고 둥글둥글 사는 걸 평생 신조로 삼는 은행원이셨거든요. 근데 이렇게 노골적인 차별을 겪으니까 둥글게고 뭐고 그게 안되더라고요. 내가 약 오른 만큼 너도 약 올려주겠다, 그런 심정이었어요."
 
착한 장애인, 나쁜 장애인
 
그러나 변재원은 여전히 '착한 장애인'이었다. 서른 전에 박사학위를 따고 개인적으로 성공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넓히면 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첫 직장은 한예종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원 자리였다. 행정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연구소에서 정부입찰 보고서를 내는데 예술전공자들만으론 벅차니 막내 연구원인 그가 행정학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권유를 받고 나서였다. 2017년 9월 고려대 행정대학원에 지원해서 합격했는데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건강문제로 직장도, 대학원도 포기해야 했다. 한 학기가 지난 뒤 서울대 행정대학원으로 다시 입학할 생각을 한 건 부부 함께 저렴하게 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경제적 동기가 컸다. 장애인용으로 부부가 함께 거주할만한 가족기숙사를 제공하는 학교는 서울대뿐이었다.
 
- 행정학은 재미있었나요?

"행정학은 다 좋은데 공무원들이 주체이다 보니, 저 같은 장애인을 '수혜자'라고 부르더라고요. 정책에는 제공자와 수혜자가 있으니까. 장애인의 '권리'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이익갈등'이라고 부르고요.

진짜 답답했어요. 그래서 정책수혜자와 제공자 사이에 로직이 다르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하나의 공간에 모이는 서로 다른 행위자들에 대해 연구했어요. 공학자로서의 건축가, 집행자로서의 행정공무원, 그리고 시민 중에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 모두가 서로 감각하는 바가 다르고 해석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동상이몽의 현실을 분석하는 논문을 썼어요."
 
그의 석사논문 제목은 <공공시설 접근성에 관한 현상학적 연구>이다. 엄청 공을 들이고 분량도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길게 썼는데 논문심사에서 혹평을 받았다. '행위자 간에 인식이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그걸로는 정책적 의사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절치부심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차에 논문 때문에 인터뷰를 했던 박경석 전장연 대표한테 연락이 왔다. 함께 일해 보자는 제의였다.
 
- 마음이 동하던가요? 전장연이라고 하면 쇠사슬로 버스에 몸을 묶고 시위를 하거나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거나 매우 치열하고 과격하게 싸우는 곳으로 알려져 있잖아요.

"처음엔 거부감이 엄청 컸죠. 지금 박경석 대표님이 전과 27범, 곧 28범이 될 예정이고요. 제가 아는 가장 '나쁜 장애인'이에요. (웃음) 전장연은 대표가 수시로 체포되고 끌려가고 벌금 때려 맞는 '범죄사관학교' 같은 곳이니까요. (웃음) 지금도 세속적인 저로서는 심장이 두근두근할 때가 많아요." 
 

지난 4월20일 진행된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투쟁’에서 변재원 국장이 세종시 광역저상버스의 도입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 착한 장애인과 나쁜 장애인은 뭐가 다른 거죠?

"착한 장애인은 개인의 삶을 바꾸기 위해 분투하죠. 나쁜 장애인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제도를 바꾸는 장애인이에요. 활동가라면 나쁜 장애인이 돼야죠. (웃음)"
 
때마침 코로나19로 시설에 격리된 장애인들이 무더기로 감염되고 죽어 나갔다. 학자로서 공부하고 싶은 열망을 앞세워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스스로 구차하고 부끄러웠다. 연구자의 꿈을 접은 건 아니지만, 행정학이 생활세계의 생생한 고통과 불편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장애인들이 있는 현장에 서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현장에서 마주하는 장애인 문제는 공부할 때와 다르던가요?

"제가 얼마나 '먹물'이었냐 하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만나는 자리에서 '제가 서울대에 있을 때도 이렇게 일을 해결한 적은 없습니다'라든가, '이런 건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한다든가, 이러니까 동료들이 '아, 뭐야 쪽팔리게! 쟤 입 좀 다물게 해 봐' 하더라고요. (웃음)

학문으로서의 행정학에선 '합리적 대안'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거든요. 근데 현실에서는 '충분한 긴장감'이 없으면 절대로 대안이 도출되지 않는 거예요. 도지사와 면담을 하기로 하고 그 전날 도청 농성에 들어가는 게 처음엔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젠 알겠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례적인 만남으로 끝나고 만다는 걸, 오래 활동한 분들은 몸으로 아시는 거죠."
 
그는 의식적으로라도 나쁜 장애인이 되려고, 더 치열한 현장활동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회적 약자들의 끈질긴 유대와 세 과시가 아니면 차별적인 관행과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게,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는 정책결정의 메카니즘이라는 걸 그는 새롭게 배우는 중이다.
 
가짜정당 '탈시설장애인당' 만든 진짜 이유
 
전장연은 지난 1월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탈시설장애인당을 창당하고 11명의 서울시장 후보를 공개했다. 창당형식을 빌었지만 선거운동 기간 전에 해산하는 '가짜정당'이다. 50일간 57회의 현장유세를 하고 언론에도 70여 차례 소개됐다. 
  

전장연은 올해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가짜정당 ‘탈시설장애인당’ 프로젝트를 진행해 탈시설지원법 입법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 와글

  
-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3월 25일 전날 정당과 후보 모두 해산했는데 왜 진짜로 창당하고 입후보할 생각은 안 한 거죠?

"현행법상 창당을 하려면 전국 5000명을 모아야 하고, 서울시장 후보로 나가려면 기탁금 5000만 원을 모아야 해요. 우리로선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죠."
 
21대 국회 들어서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장혜영 정의당 의원 등이 장애인 탈시설지원법을 발의했지만 아직 본격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국회에 계류 중이다. 보건복지부 집계 2020년 현재 전국의 장애인 수는 263만 명, 그 가운데 장애인주거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은 3만여 명이다.
 
- 탈시설을 하면 중증장애인들이 바로 지역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건가요? 일각에선 그룹홈이 대안이라고도 하는데요.

"유엔 장애인권리위원회에서도 그룹홈은 장애인 시설의 또 다른 형태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한 방에 수용되는 인원 규모는 좀 줄어들 수 있지만 그게 대안은 아니라고 봅니다."
 
- 왜 그렇죠?

"시설엔 세 가지 규칙이 있어요. 첫째 위계화. 원장이 있고 수용자가 있죠. 둘째 일관화.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자는지 일정이 다 짜여 있고 그걸 벗어나는 개인 행위는 일체 할 수 없어요. 셋째 격리화. 지역사회와 소통이 절대 이뤄질 수가 없어요. 그룹홈도 이 세 가지 원칙에서는 차이가 없고요."
 
-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그룹홈이라고 하면 쉐어하우스처럼 거주자들이 자유롭게 출입하고 동네에 나가 알바도 하면서 지역사회에 적응훈련을 할 수 있는 데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제가 생각하는 탈시설은 '인간의 조건'을 다시 만드는 운동이에요. 제대로 탈시설이 되려면 장애인 주치의제도 같은 '건강권' 보장도 필요하고요, 장애인들이 모두 람보르기니를 몰고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대중교통에 접근할 수 있는 '이동권'도 필요해요. 여전히 저상버스 도입률은 저조하고 지하철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곳도 있어요. 청담역, 역촌역에도 없어요."
 
- 그래요?

"네. 노동을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로 규정하는 '노동권'도 중요해요. 중증장애인 일자리로 노들테크노음악단 사업 같은 게 있는데 서기 5000~6000년에 유행할 것 같은 노래를 부르는 그룹이죠. (웃음) 마로니에공원에서 그 공연을 보시는 분들에겐 3000년 정도 시대를 앞서가는 음악이지만 이런 식으로 자꾸 장애인들이 우리와 같이 사는 이웃이라는 걸 알리고 보이는 것도 공익적 노동이에요. 시설에 들어가면 기본적인 의무교육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니 야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육권'도 필요하죠."
 
- 시설 장애인 3만 명을 위해서 이런 대책들을 세우는 게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죠?

"가장 취약한 약자를 대상으로, 다가오는 AI시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정책의 미래를 만드는 일이기도 해요. 현재의 장애인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죠."
 
변재원 국장에게 인간의 기본조건을 새로 짠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 '외롭지 않게 서로 의지할 사람을 구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이다. 그건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변재원 국장 개인의 삶에서 장애란 어떤 의미입니까?

"(한참 생각) 흠... 제 장애는 끊임없는 통증을 유발하고요. 낮은 키로 인해서 세상을 우러러보게 되고요. 비뚤어진 허리로 인해서 자꾸 세상이 기울어져 보여요. 근데 그것 때문에 지금의 제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제가 바라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저만이 할 수 있는 세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감각이 다른 것만큼 세상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남이 보지 못하는데 나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게 있는 거죠."
 
우리는 각자 보이는 것만 본다. 내 눈에 담기지 않는 걸 새롭게 발견해 주는 사람은 서로에게 소중하다. 장애인이 바라보는 세상에는 비장애인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의 또 다른 진실이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이진순씨는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으로, 와글 간행 <듣도 보도 못한 정치>, 인터뷰집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의 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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