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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산고개에서 발굴된 유해. 출처-진실화해위원회
 문산고개에서 발굴된 유해. 출처-진실화해위원회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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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십니까?" "누구십니꺼?" "서에서 나왔습니다" 진주경찰서에서 나온 경찰들은 집주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안방 문을 거칠게 열었다. 정대용·강정이 부부는 영문도 모른 채 방 한켠에서 벌벌 떨었다. 경찰들은 장롱과 반닫이, 다락 등을 샅샅이 뒤졌다. 누군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들은 뭔가 중요한 물건을 찾는 듯했다.

"왜 이러십니꺼?" "..." 경찰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은 사랑방을 뒤졌다. "찾았다!" 경찰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들고나온 물건은 다름아닌 바리깡(바리캉의 비표준어, 이발하는 도구)이었다. "연행해." 간부인 듯한 이의 지시가 떨어지자 정대용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아이고." 정대용의 아내 강정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경찰에게 매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집에 바리깡 있다고 경찰서에 끌려가

경남 진양군 이반성면 발산리에 사는 정대용은 '바리깡' 때문에 진주경찰서에 연행됐다. "당신, 바리깡으로 뭐 했어?" "예?" "뭐 했냐구?" "가족들 머리 깎았죠."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구만." 경찰들의 몽둥이찜질이 시작됐다.

경찰들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정답(?)을 제시했다. "너, 빨치산들 머리 깎아줬지!" "예?" 기가 막힌 정대용은 '말 한마디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의 매가 이어졌지만 정대용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진주경찰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정대용을 석방시켰다.

진주경찰서가 '빨치산 머리를 깎아줬다'고 뒤집어 씌우려던 증거물인 바리깡은 어떻게 정대용의 집에 있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생계를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던 정대용의 형 정대근은 해방 후 잠시 고향에 들렀다. 그는 고향에 오면서 선물로 '바리깡'을 사갖고 왔다. 당시만 해도 바리깡은 귀한 물건으로 가족과 이웃의 머리를 깎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런 바리깡이 '빨갱이 활동의 증거물'로 둔갑할 뻔한 데는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정대용이 살던 진양군 이반성면의 만수산 맞은편 골짜기에 빨치산이 은거하고 있었기에 그런 밀고도 가능했다.

'형평운동', '소작쟁의운동'의 본거지, 진주

다행히 정대용은 석방되었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이 웃지 못할 일로 정대용은 1950년 초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진주는 1862년 임술농민항쟁이 일어난 곳으로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백정해방운동인 '형평운동'의 메카였다. 해방 후에는 10월 항쟁의 여파가 진주에도 강하게 불었다. 1949년 10월 말에는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했고 해병대 및 경찰과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빨치산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했기에 진주에서의 좌·우익 간 충돌은 격렬했다. 이러한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진주연맹의 결성선포대회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열렸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보도연맹 진주연맹은 진주시와 진양군의 각 읍·면에 하부조직을 결성했다. 1949년 11월 검찰과 경찰이 설정한 자수기간에 자수를 하고 전향서를 제출한 이들이 1차 가입대상이었다.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된 김진기(1916년생. 진양군 진성면 상촌리)도 그랬다.

보도연맹원 중에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들만은 또 아니었다. 마을에서 똑똑하고 '입바른 소리' 잘하던 사람들이 주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진양군 지수면 청담리의 이을석(1926년생)이 그런 경우다. 그래서 당시 시골 노인들은 소위 '쭉정이만 살아남고 알맹이는 다 죽었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달구지 끌고 오던 이가 목격한 것은?

"연조야, 여 앉아 보거래이." "와 그러십니꺼?" 정연조(1950년생.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는 이웃집에 사는 당숙 조용만 옆에 앉았다. 당숙은 정연조의 아버지(정대용)의 고종사촌형(고모 아들)으로 진주보도연맹원들이 용산고개에서 학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다. 깜짝 놀란 정연조는 당숙에게 무릎을 가까이 했다. "그기 뭔 말입니꺼?" "내가 6.25 여름 난리 때 진주에서 장을 보고 오던 길이었대이"라며 시작된 당숙의 말은 정연조를 충격에 빠뜨렸다.

1950년 여름. 진주장에 갔던 조용만 일행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달구지에는 진주시에서 돈 주고 산 오물이 실려 있었다. 당시는 화장실 인분을 농사짓는 거름으로 썼다. 달구지에 똥장군을 여러 개 싣고 용산고개를 지나갈 때였다. "멈추시오." 총을 어깨에 멘 군인이 소리쳤다. "무슨 일입니꺼?" "..." 질문에도 군인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후 산골짜기에서 콩 볶는 소리가 났다. 30분이나 지났을까. 총소리가 멈추자 그때서야 군인들은 조용만 일행을 통과시켰다. 그들이 고개를 지나갈 때 길 한편에는 '제무씨(GMC)' 트럭이 있었다.

조용만이 한참을 가다가 뒤를 쳐다보니 제무씨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시내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산골짜기에서 총에 맞아 죽은 이들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알게 됐다. 조용만의 고종사촌 동생 정대용·정태수 형제도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되었다.

문산 고개는 '피바다'

벽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된 김진기는 6.25가 터지자 진성지서로 예비검속 당했다. 이후 진주경찰서를 경유해 진주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김진기의 아내 강경순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아버지 김경술에게 "아버님, 현국이 아버지 안 빼내세요?"라고 했다. 김경술이 자식을 빼낼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김진기의 동생 진규가 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웬 트럭이 마을 입구에서 속도를 늦췄다. 진규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트럭을 향해 뛰었다. 저 속에 형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트럭 적재함에는 형이 있었다.

진규가 '형!'하고 부르려는 찰나, 김진기도 동생을 향해 무언가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진규가 들은 것은 형의 목소리가 아니라 '딱'하는 마찰음이었다. 트럭 적재함에 경호를 서던 경찰이 총개머리판으로 김진기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맞는 형이나 지켜보는 동생이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트럭은 마산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당시에 진규는 형이 정확히 어느 곳에서 학살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비슷한 시각 김진기의 여동생 김숙자·김도연 자매는 산에 가는 중이었다. 집에서 기르는 소를 끌고 산에 가는데 산에서 '탕탕탕'하는 총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태어나서 처음 듣는 총소리는 어린 남매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은 화들짝 놀라 집에 돌아와 부모에게 알렸다.

김경술 내외와 며느리 강경순은 총소리가 난 곳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마을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진주시 문산고개 현장은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골짜기에 나뒹구는 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에 있는 풀과 길도 피로 물들었다. 피로 물든 진흙길에 고무신이 벗겨질 정도였다. 강경순은 남편 김진기의 시신을 찾기도 전에 기절했다. 김경술 내외가 아수라장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일 년 새경이 쌀 두 가마

아버지 정종화가 학살된 후 아들 정효갑(1942년생.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공부를 작파했다. 14세 때부터 마산시(현재의 창원시) 진전면 창포리에서 머슴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그저 먹고 재워주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세월이 조금 지나서야 1년에 쌀 두 가마를 새경(급여)으로 받았다.

이후 비닐과 천막을 만드는 '신흥비니루'에 입사했다. 29세가 되자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가려고 했는데, 여권을 신청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신원조회가 문제였다. 이후 예비군 소대장을 맡고서야 신원조회가 없어졌다.
 
진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용산고개. 유족 김현국
 진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용산고개. 유족 김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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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김현국(1947년생. 진주시 천전동)은 신원조회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김진기의 죽음으로 힘겨운 삶을 살았다. 아버지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이후 할아버지 김경술은 홧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김현국의 어머니 강경순에게는 시누이 세 명과 자녀 2명이 딸려 있었다. 논을 팔아 시누이를 결혼시키는 것도 오롯이 강경순의 몫이었다. 죽기 살기로 일만 하고 살아 온 강경순은 평생 감기를 달고 살았다.

김현국은 19세에 진성면사무소에 취직했다. 울산에 공업도시가 만들어질 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당시 울산에 조성된 기업체에 현직 교사들이 대거 입사해 교사들이 부족했다. 이에 진주교육대학에 18주 동안 단기간 운영된 교원양성소가 만들어졌다. 김현국은 이 교원양성소를 이수해 의령 신반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그는 별 탈 없이 정년퇴직을 했다.

태풍 '루사'
 
태풍 루사에 의해 진전면 여양리에서 드러난 유해
 태풍 루사에 의해 진전면 여양리에서 드러난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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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태풍 '루사'가 창원시(옛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를 휩쓸고 지나갔고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당한 이들의 유해가 드러났다.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가 유해수습을 자원하고 나섰다. 김현국 등 진주지역 피학살자 유족들도 모여들었다.

여양리에서 유족들은 눈물로 인사를 했다. 유족들은 여양리 주변의 노인들에게 6.25 당시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이증식(1950년생. 진주시 지수면 청담리)은 노인들한테서 "총질이 끝나고 경찰들이 마을 청·장년들을 동원해 시체 매장을 시켰지"라는 증언을 들었다.

이곳에서 나온 유해는 한동안 경남대학교에 안치되었다가, 2014년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로 옮겨졌다. 진주시에서 지원한 추모공간에 안치된 것이다. 그 추모공간이라는 것은 컨테이너박스에 불과해 유족들의 눈물을 씻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다.

태그:#바리깡, #형평사, #빨치산, #만산고개, #태풍 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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