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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한국 번역사에서... 일본 유학 조선인들이 벌인 획기적인 일에서 이어집니다.

1931년 7월 8일, 김진섭은 유치진, 이하윤, 장기제, 정인섭, 최정우, 서항석, 조희순, 이헌구, 함대훈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만들었다. 극예술연구회를 통해 그는 해외 근대극을 번역해 상연하면서 신극 운동을 펼쳤다. 1934년에는 <극예술>이라는 연극 전문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영문학, 독문학, 불문학, 노문학 전공자가 모인 극예술연구회는 1939년 5월 13일까지 활동했다.

1933년 장남 재명을 낳은 김진섭은, 1934년 성북동으로 이사했다. 1935년에는 차남 재현이 태어났다. 김진섭은 성북동 이전에 관수동, 수교동으로 이사 다니며 '셋방살이'를 했다. 이 시절 그는 가진 것을 전당포에 맡기며 돈을 구해 쓰는 궁핍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인생은 아름다운가?>, <매화찬>, <백설부>, <생활의 향락> 같은 김진섭의 대표작은 이 시기에 쓴 작품이다. 13년 가까이 사서로 살았기 때문일까? "정리에 따르는 청결의 벽은 가히 찬탄할 만하였다"라는 이하윤의 증언이 있다.

조선군사령부를 들쑤신 사서의 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40년 1월, 특집으로 <전시하 예술조선 행진 - 예술 보국의 대이상>를 게재했다. 이 특집의 하나로, 김진섭이 쓴 <아즉은 염려 업다>가 실렸다. 이 글이 큰 ‘파장’을 몰고 올 거라는 것을, 김진섭도 <매일신보> 관계자도 알지 못했다.
▲ <매일신보>에 실린 <아즉은 염려 업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40년 1월, 특집으로 <전시하 예술조선 행진 - 예술 보국의 대이상>를 게재했다. 이 특집의 하나로, 김진섭이 쓴 <아즉은 염려 업다>가 실렸다. 이 글이 큰 ‘파장’을 몰고 올 거라는 것을, 김진섭도 <매일신보> 관계자도 알지 못했다.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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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김진섭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월 6일 자에 '아즉은(아직은) 염려 업다(없다)'를 기고했다.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이 글이 중일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사상'을 담았다고 하여, 그는 '필화 사건'에 휘말렸다. 기고 당시 김진섭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일했다. 도서관 사서로는 드물게 필화 사건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설사 그것이 정의를 위한 불가피의(불가피한) 전쟁일 경우에 잇어서도(있어서도) 문화의 두려운 파괴자인 것은 두말할 것이 업스니(없으니), 그것은 압날의(앞날의) 세계대전이 우리에게 여실히 증명해주엇다(주었다). (중략) 전쟁은 말하자면 개인의 광범한 권리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박게(밖에) 업스니(없으니) 그러므로 전쟁은 근대문화의 중요한 특징인 개성적 발전의 경향과는 결정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김진섭의 글은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의 검열을 통과해서 <매일신보>에 실렸다. 김진섭의 글이 문제가 된 건, 글이 실린 지 며칠 지난 1월 9일이었다. 조선군사령부 참모장 가토 슈헤이(加藤錀平)는 헌병대를 통해 김진섭의 사상 경향과 집필 동기를 취조하도록 지시했다. 군부는 김진섭의 글이 '반전사상'을 담았다고 판단했다. 헌병대 사령부 취조를 통해 밝혀진 김진섭의 글 쓴 경위는 다음과 같다.

"김진섭은 1939년 12월 10일경 조용만의 청탁을 받고 근무처였던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서 1차 대전 후 독일인 예루살렘(Jerusalem, Wihelm)의 <전쟁과 문화>(戰爭と文化, 1915)라는 책의 일본어 번역판과 <개조>(改造) 잡지 12월호에 시모조우(下條雄三)가 쓴 <구주대전의 현지를 보다>를 참고로 하여 글을 집필했다. 원고는 12월 23일에 탈고하여 <매일신보>에 보냈고, 1월 5일에 발행된 6일 자 제4면에 실렸다."

당시 김진섭은 자신의 직장인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장서를 참고해서 글을 썼다. 도서관 사서가 도서관 장서를 참조해 쓴 글이 일본 군부를 들쑤신 것이다.

유명 지식인과 문인이 일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징병을 종용하는 상황에서 김진섭의 글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조선군사령부가 문제를 제기한 이 사건으로, <매일신보> 편집국장 김형원이 책임지고 사퇴했고, 학예부장 조용만은 신문사에서 해임당했다. 사회부장인 팔봉 김기진도 의원 해임되었다. <매일신보> 부사장 이상협이 물러날 거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파장은 컸다.

도서관인에서 방송인으로
 
경성중앙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일본인에 의해 서울 정동에 세워졌다. 해방 후 경성중앙방송은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되었으며,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의 모체가 되었다. 1947년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근무할 무렵의 김진섭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진섭이다.
▲ 경성중앙방송국 근무 시절의 김진섭 경성중앙방송국은 1927년 2월 16일, 일본인에 의해 서울 정동에 세워졌다. 해방 후 경성중앙방송은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되었으며, 공영방송인 한국방송공사(KBS)의 모체가 되었다. 1947년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근무할 무렵의 김진섭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진섭이다.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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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조용만은 이 사건을 <'파면기자' 시절, 나의 30대>라는 글로 <월간중앙>(1974년 8월호)에 기고했고, <최악의 무리>라는 실명 소설을 따로 썼다. 조용만 실화 소설 <최악의 무리> 주인공 이름 역시 '김진섭'이다. 이 소설에는 임화도 실명으로 등장한다. 

조선군사령부는 참모장 가토가 일본 육군차관 아난 코레치카(阿南惟幾)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종결지었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의 언론 통제에 총독부 경무국(경찰)뿐 아니라 조선주둔군 사령부(군부)가 직접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필화 사건 과정에서 김진섭은 헌병대에 취조를 당했다. 전과가 없고 사상적으로 별문제가 없다고 결론이 나자, 김진섭은 1월 13일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 그가 작성한 서약서는 이런 요지였다. 

"사변 하의 중대 시국에 처하여 일반 민중을 지도해야 할 대학도서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국민으로서의 자각을 잊어버리고 외국인이 저술한 문서를 발췌하여 일견 중일전쟁(中日戰爭)을 비방하는 것으로 보이는 글을 발표한 것은 잘못되었다. 뉘우치고 당분간 근신할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앞으로 집필할 경우에는 충분한 주의와 함께 더욱 국책적 견지에 입각하여 문필보국에 매진할 것이다."

필화 사건 직전에 김진섭은 어머니 병환과 경제적 이유로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그만뒀다. 풀려난 후 그는 경성중앙방송국 제2방송부에 입사했다. 제2방송부는 조선어 방송을 담당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 이은, 김진섭의 두 번째 직장이었다. 

방송국으로 직장을 옮긴 김진섭은 종로구 청운동 57-10번지에 집을 마련했다. 셋방을 전전하던 그가 마련한 첫 '자가'(自家)였다. 해방 때까지 경성중앙방송국에서 계속 근무한 그는, 1945년 10월 2일 편성과장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초대 도서관장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세운 유일한 대학이다. 조선인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막기 위해, 일제가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개교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로 이어졌다. 동숭동 대학로에 있던 옛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 대학로에 있던 옛 서울대 도서관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세운 유일한 대학이다. 조선인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막기 위해, 일제가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개교했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로 이어졌다. 동숭동 대학로에 있던 옛 서울대학교 도서관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으로 지은 건물이었다.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다.
ⓒ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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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국립 서울대학교 출범과 함께, 김진섭은 독문학 교수직에 임용되었다. 동시에 그는 도서관장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 '초대 관장'이 된 것이다. 서울대학교 출범 전 '경성대학' 시절 도서관장은 학산(鶴山) 이인영(李仁榮)이다.

국립 서울대학교가 초대 도서관장으로 김진섭을 발탁한 이유는 뭘까? 그가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도서관에서 '가장 오래 일한 조선인'이기 때문이다. 김진섭은 햇수로 13년 동안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일했다.

김진섭이 도서관장으로 일한 기간이 길진 않았다. 1946년 10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재직했으니, 그의 관장 재임 기간은 7개월에 불과하다. 기간은 짧지만 새롭게 출범한 국립 서울대학교 초대 도서관장을 맡은 의미가 적진 않다.

해방 직후부터 1년 동안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학교 이름의 변화만큼 도서관도 혼란의 시기가 이어졌다. 국립 서울대학교 반대 투쟁이 벌어진 이 시기, 도서관 내부에서도 김구경 부관장과 대립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도서관 장서가 도난 또는 분실되기도 했다.

김진섭이 도서관장에서 물러난 후, 서울대 도서관은 김구경 부관장이 관장 대리를 맡았고, 2대 이병도(1947년 10월 - 1952년 9월)와 3대 정광현(1952년 9월 - 1962년 5월) 관장 체제가 이어졌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을 거쳐, 국립 서울대학교 초대 관장이 된 김진섭은 책과 독서에 대해 일가견을 가졌을 법하다. '책'에 대한 그의 생각을 살펴보자.

"책의 가치는 간단히 말하면 책 속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 있으며, 그리하여 그때그때에 그 책을 펴기만 하면 우리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응되어 나온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중략) 이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책이라 하는 이 귀중한 상속품은 세대로부터 세대로 물려오고 상속되어온 까닭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 같은 인간 지식의 총화(總和), 총결산에 대한 귀중한 기록물로서 도서는 우리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납북된 '한국 도서관의 3대 인재'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김진섭의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표지다. 김진섭은 이양하. 피천득과 함께, ‘한국 수필 문학의 세 봉우리’로 꼽힌다. 1930년대부터 1950년 납북될 때까지 그는 1백여 편의 수필을 썼다. 김진섭의 수필은 소소한 일상의 기록이 아니라 서양에서 말하는 ‘에세이’ 개념에 가까웠다.
▲ <생활인의 철학> 수필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김진섭의 수필집 <생활인의 철학> 표지다. 김진섭은 이양하. 피천득과 함께, ‘한국 수필 문학의 세 봉우리’로 꼽힌다. 1930년대부터 1950년 납북될 때까지 그는 1백여 편의 수필을 썼다. 김진섭의 수필은 소소한 일상의 기록이 아니라 서양에서 말하는 ‘에세이’ 개념에 가까웠다.
ⓒ 소명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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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와 도서관장이었던 김진섭은 어떤 '책 읽기'를 추천했을까? 그의 수필 <독서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고전 한 권을 정독하느니보다는 그 시간에 두 권 세 권 다독주의를 취하여 고전의 대강을 짐작하도록 하고, 그것을 대강 추려서 읽은 다음에 자기의 취향을 좇아서 매력 있는 책을 다시 선택하여 정독하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다독'(多讀)을 추천하는 듯싶다가 '정독'(精讀)을 거론하며, 결국 다독과 정독 모두 필요한 '독서술'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독문학을 강의하면서 그는 <독일어교본>을 펴내기도 했다. 1947년 김진섭은 첫 수필집인 <인생예찬>(동방문화사)을 출간했다. 1948년에는 두 번째 수필집인 <생활인의 철학>(선문사)을 발간했다. 1950년에는 <교양의 문학>(조선공업문화사)을 펴냈다.

1949년 6월부터 김진섭은 서울신문사 사장 박종화와 편집국장 오종식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다. 출판국장이 된 그는 월간지 <신천지>의 편집을 담당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진섭은 집이 아닌 곳에서 숨어 지냈다. 은신하던 김진섭은 8월 4일 자택에 잠시 들렀다. 그의 귀가를 눈치챈 탓일까, 다음날(8월 5일) 새벽 2시에 내무서원 2명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 갔다. 종로구 청운동 57-10번지 자택에서 납북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북으로 끌려간 걸로 알려져 있다. 

김진섭의 이웃 청운동 57-11번지에서는 시인이자 언론인 파인 김동환이 납북되었다. 김동환은 소설가 최정희와 함께 정치보위부로 쓰인 국립도서관에 갇혀 있다가 북으로 끌려갔다. 납북된 후 김진섭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58년 월탄 박종화는 김진섭의 유고 40여 편의 모아 <청천 수필 평론집>(신아사)를 펴냈다. <백설부>(白雪賦) 같은 김진섭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대학교재에도 꾸준히 실렸다. 오양호는 한국 문학사에서 김진섭이 차지하는 위상을 이렇게 평했다.

"김진섭은 춘원과 육당의 기행수필, 그 뒤를 이은 이은상, 또 그 뒤의 모윤숙, 이양하, 김동석, 정지용, 김기림, 김광섭 등과 함께 비허구산문, 범칭 수필을 네 번째 장르로 발전시킨 문인들 가운데 앞자리에 서 있다."

김진섭은 '수필'이라는 명칭뿐 아니라 개념조차 분명치 않던 시대에 수필 문학을 '개척'했다. 납북된 그는 북녘땅에서 자신이 개척한 수필을 계속 쓸 수 있었을까.

'소설' 같은 삶을 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제 한국통감부가 경성부(지금의 서울)에 지은 형무소다.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쓰였다.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했다. 형무소 이전 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김진섭은 이곳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북으로 끌려갔다.
▲ 납북되기 전, 김진섭이 갇혀 있던 곳 서대문형무소는 1907년 일제 한국통감부가 경성부(지금의 서울)에 지은 형무소다. 해방 뒤에도 교도소, 구치소로 쓰였다.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했다. 형무소 이전 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뒤 김진섭은 이곳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북으로 끌려갔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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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섭은 식민지 조선에서 대학도서관 '사서'로 활동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그가 근무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유일하게 존재했던 '대학도서관'이다. 김진섭은 국립도서관 관장 이재욱, 부관장 박봉석과 함께, 해방 후 '한국 도서관의 3대 인재'로 꼽힌 인물이다. 공교롭게 이 세 명은 모두 납북되고 말았다. 

김진섭은 대학도서관 사서에 이어 방송국 간부, 대학교수, 도서관장, 수필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뽐냈다. 도서관인과 언론인, 교육인, 문인으로 산 그는 한국전쟁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북한 당국은 납북한 대학 교원을 북조선 대학에 배치하기도 했다. 납북된 사람 상당수가 그러하듯, 김진섭 역시 납북 이후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한때 김진섭의 가족이 살았던 전남 나주시 대호동 금성산에 그의 가묘(假墓)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과 북을 넘나든 그는 '수필'이 아닌 '소설' 같은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김진섭은 김윤식이 쓴 것처럼, '비(非)생활인'의 삶을 살았다. 어쩌면 그 시절 이 땅의 수많은 사람이 겪어야 할 '일상'이었는지 모른다. 

김진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화여전 출신 이봉순이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 입사했다.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나 '시인'을 꿈꿨던 이봉순은 남녘에서 '도서관인'의 삶을 살았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김진섭은 '도서관인'으로 살면서 '수필가'로 명성을 날렸다. 

다재다능했던 김진섭은 북녘에서 어떤 삶을 이어갔을까? 못다 한 그의 삶과 이야기가 궁금하다. 김진섭을 비롯하여 이재욱, 박봉석, 손진태, 이인영 같은 '납북 도서관인'의 행적 추적은 우리 도서관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김진섭, #서울대학교도서관장, #수필가, #외국문학연구회, #극예술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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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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