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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스트'는 제목부터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다. 아이러니(Irony)는 모순이라는 뜻으로 일상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을 "아이러니하게도"라는 표현으로 자주 쓴다. 원더걸스의 노래 <Irony> "남잔 다 믿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너만 다르다고 말하는 건 뭐야/Irony 말도 안 돼"와 같은 방식으로.

그렇다면 '아이러니스트'는 앞뒤가 안 맞는 사람 혹은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기존의 문법을 파기하고 전승되어 내려오는 언어 사용 방식에서 탈피하여 기존 사고를 전복할 참신한 메타포를 사용하는 시인과 같은 사람을 아이러니스트라고 칭한다.

즉 의도적으로 아이러니를 창조하는 사람, 기존과 다른 반대의 상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자는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색다른 나로 변신을 반복하며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부단하게 재서술하고 재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이러니스트라고 한다.

그렇게 저자는 당대를 지배하는 주류적 사유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모색했던 12명의 철학자를 아이러니스트로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이런 의도적 아이러니 창조 과정을 보며 내 삶과 연결해서 익숙한 것과 과감히 이별하는 결단,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데 둔다. 철학 공부는 학문적 탐구만이 아니라 각자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바를 깨닫는 내적 체험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색다른 나로 변신을 반복하며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부단하게 재서술하고 재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이러니스트이다
 여기서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색다른 나로 변신을 반복하며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부단하게 재서술하고 재창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아이러니스트이다
ⓒ EBS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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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와 삶의 일화를 통해 쉽게 풀어내는 12명의 철학자

그렇다해도 철학을 대학교 교양으로 배우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느꼈었던 이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듀이, 니체, 비트겐슈타인,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과 같은 12명의 철학자들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걱정마시라. 저자는 93권의 책을 낸 내공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을 쉬운 비유와 자신의 삶의 일화를 바탕으로 보다 친숙하고 쉽게 풀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핵심 개념인 '질성적 사고(Qualitative Thought)'는 듀이 전공자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책에서는 우선 "기존의 이성적 사고로 포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첫 대면 접촉에서 온 몸으로 다가온 느낌을 언어화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작용"이며 "오랜 기간 쌓아온 이전의 모든 경험과 훈련의 결과로 느껴지는 상황의 질적 특성을 한순간에 파악하는 '총체적 사고'라고 설명한다. 알 듯 말 듯한 말이다.

그러나 그 뒤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다음 문구를 연결해내어 비유적으로 설명하니 질성적 사고의 비언어성, 총체성의 느낌이 확 와 닿는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뉘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소금 한 알갱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소금 관련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입에 넣는 순간 소금 생산 지역과 시기까지 한순간에 파악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로서는 여전히 의문일 수 있다. 몰랐던 철학적 개념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나의 일상과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여기서 이 책의 미덕이 발휘된다. 저자는 자신이 90여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비결을 듀이의 '질성적 사고'와 연결한다.

먼저 '아. 이런 책을 쓰면 좋겠다'라고 어렴풋하게나마 이미지를 그리며 분명한 생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책의 전반적인 방향이나 성격을 지속적으로 그려나간다. 이렇게 나가다보면 조금씩 얼개가 짜여지며 한 문장을 쓰면 그것이 다음 문장을 몰고 오며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글짓기가 이어지는 연상작용도 발생한다. 저자는 이를 수면 아래 잠자던 아이디어가 다시 부상하면서 판도가 변화하는 오월동주의 상태라고 한다.

자기다움을 향해 나아갈 때 얻게 되는 것들

이제 듀이의 '질성적 사고'가 내 일상으로 스며들어온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계획을 짜서 하는 경우도 있으나 저자의 경험처럼 어렴풋한 이미지와 아이디어에서 시작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나의 커리어 자체가 그러했다.

대학교 교직원에서 정부 사업 신청보고서 작업을 하던 중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며 협동과 상생의 삶에 대한 막연한 꿈으로 민간 협동조합 연구소로 이직했다. 교직원으로 일하며 쌓았던 행정 경험과 사업신청서 작성 요령은 협동조합 상담센터장, 정책연구자로 일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쌓은 수많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언론사에서 협동조합 기사를 쓰며 틈틈이 책을 내게 되었다. 행정가, 정책연구가, 기자, 작가 경험들을 바탕으로 작년부터 얼마 전까지 지자체 비서관으로 일을 했다.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다면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총체적 느낌이 나를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끌어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생이란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렇게 반추하고 보니 '아이러니스트'라는 말도 와 닿는다. 그렇다. 저자는 남들의 시선에 얽매여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며 자기다움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의 평안함에 안주하지 않고 과감히 자기다움을 향해 나아갈 때 진정한 마음의 평안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스트 -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며 사는 법

유영만 (지은이), EBS BOOKS(2021)


태그:#아이러니스트, #유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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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및 사회적경제 연구자, 청소년 교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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