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세계보건기구는 매년 신규발생 암 환자의 4% 정도를 직업성 암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직업성 암 환자 규모는 1만 명 수준에 육박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국내 직업성 암 산재 승인 건수는 2016년 113건, 2017년 178건, 2018년 205건 등에 불과하다. <오마이뉴스>는 '직업성·환경성암 환자 찾기 119 운동'의 도움을 받아 '암도 산재다'라는 4편의 기사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말]
 
3D 프린터를 사용한 후 육종암이 발병해 사망한 고 서울씨의 생전 사진이 담긴 책을 아버지 서정균씨가 펼쳤다. 또래 청년을 보면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고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 품 안의 아들이 이제는 손안에 책으로만 남았다.  3D 프린터를 사용한 후 육종암이 발병해 사망한 고 서울씨의 생전 사진이 담긴 책을 아버지 서정균씨가 펼쳤다. 또래 청년을 보면 아직도 기분이 이상하고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얘들아, 나중에라도 혹시 건강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병원은 일찍 가야 한다. 선생님처럼 괜찮겠지 하고 버티다 늦게 가면 큰 병 나는 거야. (중략) 괜한 걱정일 수 있겠지만, 3D 프린터가 출력하는 과정에서 좋지 않은 물질들이 많이 나와. 그 옆에 너희들을 함께 재운 게 마음에 너무 걸린다. 내가 과학 선생님인데 무식하고 무지했다. CT 촬영비는 청구하면 내가 부담해줄게!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면서 당부했다. 병원에 꼭 가보라고. 선생님처럼 아프면 안 된다고. 경기도의 한 과학고등학교에서 물리교사로 일한 선생님이 사망 한 달 전인 2020년 6월, 3D프린터 활용법을 가르친 학생들에게 남긴 메시지다.

고(故) 서울(사망 당시 37세)씨는 2013년부터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쳤다. 그는 수업 시간과 동아리 활동 등에 3D프린터를 활용했다. 개인적으로 3D프린터를 구입해 방법을 익힐 정도로 열심이었다.

기존의 2D 인쇄 프린터가 종이 위에 잉크를 분사해 인쇄한다면, 3D프린터는 디자인 설계 도면을 바탕으로 얇은 물체들을 쌓아올려 3차원의 입체 형상을 만들어냈다. 서씨는 자신의 블로그에 3D프린터를 '도깨비방망이'로 표현하기도 했다.

정부에서 개별 학교에 3D프린터를 보급하기 시작한 건 2014년부터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미래창조과학부의 정보통신진흥기금에서 관련 예산을 처음 편성해 3D프린터를 전국 초·중·고교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교육부와 함께 학교와 교육시설에 3D프린터 보급 내용 등이 포함된 '무한상상실'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강민정 열린민주당 의원실이 17개 시도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3D프린터 보유 및 유해 프린팅 사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전국 5222개교(보급률 43.45%)에 1만 8324개의 기기가 보급되어 있다. 초중고의 전국 보급률은 각각 29.63%, 54.37%, 67.28%였다.

3D프린터 사용 5년 후... 육종암  
 
3D 프린터를 사용한 후 육종암이 발병해 사망한 고 서울씨의 아버지 서정균씨.
 3D 프린터를 사용한 후 육종암이 발병해 사망한 고 서울씨의 아버지 서정균씨.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아(아이)가 나만 만나면 3D프린터라는 게 있는데, 이게 차세대 산업이다 뭐다 하는기라. 난 그게 뭘 말하는지도 몰랐지. 뭐 그냥 컬러 프린터 말고 다른 긴가 하고 말았지. 그게 우리 아를 죽일 줄은 몰랐지."

지난 11일 서울 광화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서울씨의 아버지 서정균(66)씨는 "아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3D프린터에 대해 설명했다. 3D프린터를 사용할 때 유해한 물질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들도 나도 전혀 몰랐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주말까지 반납하고 고등학교 과학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서울씨는 '이름을 3D프린터로 출력하기' 등 아이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주제를 정해 고등학교 축제에 3D프린터를 소개하기도 했다. 3D프린터실에서 숙식하며 축제를 준비할 정도였다.

서울씨가 3D프린터를 사용한 공간은 주로 학교 교실이었다. 창문과 출입문, 일반 환풍구가 환기시설의 전부였다. 3D프린터로 작업할 때 예열 과정 등 초기 작업에 소재가 안정적으로 3D프린터에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했다.

"아가 자꾸 응디(엉덩이)가 아프다는 기라. 내가 협착증이 있어서 아도 그런 줄 알았지. 그래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아입니까. 아니 그런데도 계속 아프더라고. 그래서 큰 병원에 갔지. 그때 내가 처음 아 응디를 만져봤는데, 뭔가가 계란만 한 사이즈로 잡히는기라.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생각했지."
 
서울씨는 2018년 2월 육종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3D프린터를 활용한 지 5년 만이었다
 서울씨는 2018년 2월 육종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3D프린터를 활용한 지 5년 만이었다
ⓒ 서정균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서울씨는 2018년 2월 육종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3D프린터를 활용한 지 5년 만이었다. 육종은 뼈, 근육, 신경, 지방 조직 등 우리 몸의 골격을 구성하는 중간엽 조직에서 발생하는 암이다. 인구 10만 명당 1명 정도가 발생하고, 전체 암 가운데 그 비중이 0.16%에 불과할 정도의 희귀성 암이다. 

서울씨는 17번의 항암을 견뎠지만, 3개월 만에 재발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화해 목놓아 울었다. 서정균씨는 "아이가 우는 걸 듣고 '아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면서 "다시 병원에 가서 항암을 했지만, 폐로 암이 전이되고 몸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의사는 폐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아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2020년 7월 29일 오후 5시경, 서울씨가 세상을 떠났다.

연이은 암 발생
 
생전의 서울씨의 모습. 그가 3D프린터를 주로 사용한 공간은 주로 학교 교실이었다. 교실에는 3D프린터를 위한 별도의 환기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생전의 서울씨의 모습. 그가 3D프린터를 주로 사용한 공간은 주로 학교 교실이었다. 교실에는 3D프린터를 위한 별도의 환기장치가 마련되지 않았다.
ⓒ 서정균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이후 서울씨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며 3D프린터를 자주 사용한 교사 1명이 또 육종암 진단을 받았다. 다른 과학고에서도 육종암 진단을 받은 교사가 나왔다. 이 내용은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지면서 심각성이 확인됐다(관련기사 : A과학고 교사들 잇단 희귀암 육종... '3D 프린터 공포' 확산  http://omn.kr/1ohz0). 아버지 서정균씨는 "주위 소식을 듣고 3D프린터가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 발암물질이었구나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이후 아버지는 교육부, 교육청을 비롯해 부산·울산 등의 과학고를 찾아다녔다. 3D프린터의 위험성을 설명하고 아들의 죽음이 '직업성 암'이라는 걸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서정균씨는 "아들은 열심히 3D프린터를 활용해 수업한 게 전부"라며 "정부는 3D프린터 활용 정책만 폈지 그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도 관리하지도 않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내에 3D프린터에 사용하는 소재가 유해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한 건 2018년이지만 이 내용이 학교 현장에 전달되지 않았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서 2018년과 2019년에 걸쳐 발표한 '3D 프린터 사용자에 대한 초미세입자 노출평가', '3D프린터에 사용되는 소재의 종류 및 유해물질 특성 연구' 등에 따르면, 3D프린터를 사용하는 사업장 4곳에서 작업 중 나오는 노출 입자에 유기화합물이 미량으로 검출됐다.

이후 연구원은 3D프린터에 흔히 쓰는 소재 2종류 20여 가지를 3D프린터에서 사용하는 것처럼 고열로 녹여서 연기를 분석했다. 여기서 소재의 유해물질 구성비를 추정해 본 결과 종류에 따라 구성비는 다르지만, 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스티렌(ABS)과 필라멘트(PLA) 소재 모두 유해물질이 검출됐다. ABS는 발암성 영향 의심 물질인 스티렌과 생식독성 의심 물질 톨루엔 등이 나왔고, PLA는 구성물질 중 1% 미만이지만 역시 동일한 유해물질이 검출됐다.

3D 프린터 안전성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교육부는 지난해(2020년) 9월, 전국 초중고에 3D프린터와 관련한 안전 안내책자를 처음 배포했다. 부산시교육청을 비롯해 일부 교육청은 '3D프린터 실습실에 출입할 때 보호장구(KF급 마스크)를 착용'하고, '3D프린터 실습실과 교육실을 분리'해 실습실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 하도록 했다.
 
아들과 추억이 남아 있는 광화문에서 아버지 서정균씨는 잠시 옛 기억에 잠겼다.
 아들과 추억이 남아 있는 광화문에서 아버지 서정균씨는 잠시 옛 기억에 잠겼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서정균씨는 지난 1월 3D프린터 작업을 할 때 나오는 유해물질이 병을 발생시켰다며 인사혁신처에 산업재해 보상을 신청했다. 직업성·환경성 암환자 찾기119와 함께 서씨의 산재를 대리한 권동희 노무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과학교사인 서울씨는 3D프린터가 얼마나 어떻게 위험한지 안내받지 못한 채 학교에서 3D프린터를 활용해 수업했다"면서 "공무상재해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태그:#산업재해, #3D프린터, #산재, #직업성암
댓글17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