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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어쩌다 이 길(작가 지망생)로 빠지게 되었나를 생각하면 어이없을 때가 있다. 2년 4개월 전 친구 윤희가 '배지영 작가와 함께 하는 에세이 쓰기'를 신청하자고 한 게 결정적 계기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뒤에 나는 학원을 폐업했다. 이렇게 가슴 뛰게 하는 일도 있는데 소중한 인생을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허비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 들어버렸다. 불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고기를 구워먹어 본 조상들의 심정이 이랬지 않았을까.
 
글을 쓰는 노트북
 글을 쓰는 노트북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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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의 기여는 그 이전부터다. 윤희는 전북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책모임 마중물 학부모교육'을 당시 우리가 있던 독서모임에 알리고 같이 가자며 회원들을 부추겼다. 군산에서 하는 강의도 오전에 갔다가 학원 출근하기에 시간이 빠듯했던 나는 전주까지 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가게 되었다.

오고 가는 차에서 나누었던 대화,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강의, 언급된 많은 책들 덕분에 신이 났다. 그때 운명의 키는 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숨을 참다가 그제서야 숨을 쉬는 기분이었고 다르게 사는 방법을 꿈꾸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친구들이랑 떡볶이 집을 향하던 그때처럼 강의가 끝나면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뭘 먹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배꼽이 빠질 만큼 웃고 떠들었던 것만은 기억에 선명하다. 뭔가가 시작되려고 할 때 사람을 얼마나 들뜨고 행복하게 하는지 알았다. 십대나 마흔을 바라보는 그때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한 번은 배지영 작가가 "아까 수업에서 글이 일기 같다고 해서 기분 나빴냐?"고 전화로 물어온 일이 있다. 나는 "내 글이 진짜 일기 같았기 때문에 조금도 기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몹쓸 글을 읽고 작가님 눈을 버릴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조금 화를 내기도 했는데 그건 작가님이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지금도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그때는 마침표를 찍고 몇 칸을 띄워야 할지 몰라서 세 칸쯤 띄우면 되겠지 하고 문장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했고, 맞춤법이 하도 많이 틀리니까 "맞춤법에도 개성이 있지 않을까요"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했다.

지금은 '맞춤법 검사기'로 몇 번 수정을 하고 같은 뜻의 다른 단어를 수시로 검색하지만 그때는 일일이 확인하는 게 귀찮았다. 글 쓰는 일은 "부지런해지는 일"이라는 이슬아 작가의 말이 딱 맞았다.

한 달에 31일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아침에 조금이라도 일찍 일어나려고 하는 것도 모두 글을 쓰기 시작한 후에 일어난 변화다. 마감도 청탁도 없는 글이지만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조금이라도 더 쓰고 싶어서다.

내 마음에 훅 들어와 버리는 영화를 보고 나면 답답할 때가 있었다. 예전에 <친구>를 봤을 때도 그랬고, 최근에 <라라랜드>를 봤을 때 그랬다. 이 굉장하고 특별한 감정을 날아가지 않게 붙잡고 싶었다. '삶에서 중요한 건 바로 이런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감독이 "대단하다", 영화는 "재미있다"라고 말할 수밖에는. 나는 그저 누군가의 창작물을 소비하는 관객, 대중일 뿐이었다.

글을 쓰면서 그런 벅찬 감정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휴대폰 메모장에 느낌을 기록하고 이전에 메모한 것들도 읽어본다. 무엇 때문에 자극을 받았는지 알기 위해서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뭔가가 떠오르면 얼른 글로 옮기고 싶어서 마음이 바빠진다.

그때부터 나는 관객이 아니다. 감정의 주체가 되어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이것이 나를 자유롭게 만든다. 내 감정을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온전히 느끼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삶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중년 이후의 삶은 어떨까, 노년에는 어떤 기분이 들까, 상실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과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낯선 감정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

글을 쓰면 쓸수록 땅 속 깊은 곳을 파고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저 아래에 묻혀 있는 내밀한 정서에 가닿기 위해 애를 쓰다보면 피로하고 외롭지만 계속 하다보면 삶의 속살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글이 비록 형편없더라도 내가 얻고 싶은 이 것(삶에서 중요한 건 바로 이런 거)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에세이쓰기 모임을 하는 한낱 작가가 알려준 BTS의 <바다>는 이렇게 끝이 난다.

"희망이 있는 곳이 있는 곳엔 반드시 절망이 있네. 우린 절망해야 해. 그 모든 시련을 위해."

이런 글을 뭐하고 쓰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을 팽개쳐둔 날 이 노래를 들었다. 책마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다. 시시때때로 마음이 바뀌는 게 인간일까. 하루에 몇 번씩 용기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결심이 오래 가지 않는다고 실망하기보다 의욕이 생겼을 때만이라도 글을 쓰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일년 전에 갔던 네팔 트레킹에서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를 이미 외쳤더랬다(합성아님).
 일년 전에 갔던 네팔 트레킹에서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를 이미 외쳤더랬다(합성아님).
ⓒ 김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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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에세이, #일기,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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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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