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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야봉에서 바라본 풍경
 월야봉에서 바라본 풍경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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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난드리와 박수기정

대평포구와 화순금모래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제주올레 9코스는 도상 거리 6.7km이다. 거리가 짧지만 난도는 '상'이다. 대평포구에서 좁은 돌밭 숲길을 따라 박수기정까지 올라가서 또다시 월야봉(200.7m)을 산행해야 한다.

평소에 등산을 했던 사람이라면 괜찮지만 초행길이면서 늦은 오후에 이 코스를 시작한 사람이라면 위험할 수 있다. 오름을 오르는 내내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는 추락할 수도 있기 때문. 이런 주의만 기울인다면 독특하고 험한 지형인 이곳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알찬 걷기가 될 것이다.

먼저 대평포구에 이르면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광경과 마주한다. 높이 130m, 길이 약 1500m에 이르는 병풍 모양 주상절리이다. 그곳을 '박수기정'이라고 부른다. '바가지로 떠서 마실 샘물'을 뜻하는 '박수'와 '벼랑'이라는 제주도 방언인 '기정'이 합해진 이름이다. 실제로 벼랑 아래 지상 1m 암벽에서는 사시사철 솟는 샘물이 있어 지금도 바가지로 떠먹는다고 한다. 특히 이 샘물은 피부에 좋아서 백중날 물맞이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박수기정이 보이는 대평포구
 박수기정이 보이는 대평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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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기정과 '대평 마을'과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대평리의 원래 이름은 '난드르'이다. '평평하고 긴 들판'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이것을 한자로 옮긴 것이 지금의 '대평(大坪)'이다. 난드르 앞에 '용왕'을 붙여 '용왕 난드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용왕 아들이 이곳 지형을 결정짓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아주 먼 옛날 용왕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스승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난드르'에 살고 있는 학식 높은 한 선비를 알게 됐다. 용왕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 선비 밑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서당 근처에 '창고내'라는 냇물이 밤낮없이 흘러내렸다. 시끄러운 물소리는 늘 공부를 방해했다. 3년 동안 꾹 참고 글공부를 마친 용왕 아들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소원 하나를 말하라고 했다. 스승은 냇물의 물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니 물소리를 없애달라고 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해 그곳에 방음벽(주상절리)을 설치하고 동쪽으로는 군산을 만들어 주고 떠났다. 그 방음벽이 바로 박수기정인 것이다.

물질과 조슨다리
 
박수기정으로 오르는 물질(말길)
 박수기정으로 오르는 물질(말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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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기정으로 올라가는 길은 좁고 가파르다. 돌멩이도 제법 많다. 예전에 중국으로 말 반출을 위해서 말들을 포구까지 몰아 이동했던 물질(말길)이다. 몽골(元) 제국은 제주를 직할령으로 삼아 100년을 통치했다.

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에 하나를 제주에 설치했다. 한라산 기슭에서 키운 말을 중국으로 수송했던 포구 중 하나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당케 포구'다. 당은 중국(唐)을 의미하고 '케'는 '작은 지역'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당케'는 중국과 교류하던 곳을 일컫는다. 원나라가 퇴각하면서 말 반출을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물질은 해방 이후까지 사람들이 이용했다. 도로가 난 뒤로 가시덤불에 덮여 거의 50여 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이 길을 올레길 탐사 팀이 복원시켰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말길)이라고 불렀다.

나 또한 700여 년 전의 말들이 올랐던 길을 따라 박수기정으로 향했다. 아래에서 봐도 멋진 풍경이지만 주상절리 위에서 보는 풍경은 더 할 나위 없는 곳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단순히 여행객에게는 그렇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박수기정 절벽이 이웃마을 화순으로 가는 장애 벽과 다름없었다.

예전에 대평리의 교통은 매우 불편하였다. 화순리를 가려면 지금의 도로를 이용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이심전심 사람들은 좀 더 빠른 샛길을 찾기 위해서 100m가 넘는 주상절리로 눈을 돌렸다.

높지 않은 절벽 부분에 발을 간신히 디딜 수 있는 길을 냈다. 사람들이 다니는 소로였지만 늘 위태위태했다. 어느 날 기름장수 할머니가 그곳을 지나다가 추락해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좀 더 안전한 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 끝에 송 씨라는 마을 석공에게 한 집 당 보리 다섯 되를 주기로 하고는 징으로 절벽을 쪼아서 턱을 만들게 했다. 요즘 말로 암벽 등반로를 개척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주도 해변에서 가장 험악한 트레킹 코스인 조슨다리가 탄생한다.
 
사유지 출입금지 팻말
 사유지 출입금지 팻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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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슨다리'는 돌을 쪼아 만든, 절벽 밑과 절벽 위를 연결하는 다리를 뜻한다. 이 길을 '조슨다리' 또는 절벽을 뜻한 기정을 붙여서 '조슨다리기정'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위험해서인지 아니면 사유지여서 그런지 4년 전과 달리 지금은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한 눈으로는 태평양을 바라보고 반대쪽으로는 송림과 오름을 힐끔거리면서 걷는 긴장감을 떠올렸지만 아쉽게도 우회길로 발을 돌려야 했다.

아름다운 곳은 더 아픈 곳

갈 길이 멀었다. 보리수가 우거진 볼레낭길을 따라 봉수대를 지났다. 다시 돌밭 경사로를 올라 월라봉으로 들어섰다. 인적 없던 그곳에 학생 몇 명이 모여서 시끄럽게 쉬고 있었다. 알고 보니 다섯 명의 학생들은 모두 한 형제였다. 엄마를 따라 트레킹을 나선 길이었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는 월라봉 오름 가운데에서 높고 수풀이 울창한 곳으로 들어갔다.
 
월야봉 진지 동굴
 월야봉 진지 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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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생매트로 잘 가꿔진 길 위로 띄엄띄엄 시커먼 굴이 눈에 띄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군사 목적으로 파놓은 '안덕월라봉 일제 동굴진지'였다. 무려 7개나 됐다. 검고 깊지만 서늘한 기운이 도사리는 진지를 재빠르게 지나 안덕 계곡 쪽으로 하산했다. 황개천을 지나 창고천다리에 있는 중간 스탬프 박스에서 스탬프를 찍고는 도로변을 걸었다.

평탄한 마을길로 들어서서 이름처럼 금빛으로 빛나는 화순금모래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캠핑을 하는 몇몇 사람들의 부산함을 뒤통수에 달고는 백사장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다음날 걷게 될 코스를 눈으로 살폈다. 송악산 등 올레 코스에서 제법 인기 있는 곳이 10코스였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송악산보다는 섯알오름과 알뜨르 비행장에 관심이 더 갔다. 역사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비참할 때가 종종 있다는 말이 금빛으로 눈부신 화순금모래해수욕장에서 나는 더욱 실감하고 있었다.
 
화순금모래해수욕장 가는 길
 화순금모래해수욕장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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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태그:#제주올레, #박수기정, #조슨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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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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