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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제국대학을 세 군데나.... 역대급 '스펙' 자랑한 도서관장에서 이어집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세운 도서관은 일제의 강압과 재정 문제로 속속 문을 닫았다. 관공립 도서관조차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인정도서관은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계속 문을 열었다. 평양의 소중한 문화시설로 인정도서관은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

해방 후 김인정 여사가 자식처럼 아낀 인정도서관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직후 평안남도에서는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건준을 중심으로 해방 조선의 정부가 수립되고 조만식이 역할을 했다면, 고당이 산파 역할을 한 인정도서관도 계속 운영되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38선 이북에 진주하면서 인정도서관 건물은 '소련군 문화사령부'로 쓰였다. 그 이후 인정도서관 건물과 장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인정도서관에 있던 책은 1946년 북한에서 출범한 평양 국립중앙도서관 장서로 합쳐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삼숭폐교와 세 번째 유학

 
숭실중학 교장이었던 윤산온(尹山溫)은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파면되었다. 윤산온이 물러나고 정두현이 숭실중학 교장을 맡게 됐다는 <동아일보> 기사다. 사진 왼쪽이 정두현, 오른쪽이 윤산온이다.
▲ 숭실중학교 후임 교장에 대한 기사 숭실중학 교장이었던 윤산온(尹山溫)은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파면되었다. 윤산온이 물러나고 정두현이 숭실중학 교장을 맡게 됐다는 <동아일보> 기사다. 사진 왼쪽이 정두현, 오른쪽이 윤산온이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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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도지사 야스다게(安武)는 모든 학교에 신사 참배를 명령했다. 숭실중학교 맥퀸(George Shannon McCune, 한국명 윤산온) 교장은 이를 거부하다가 결국 파면당하고, 1936년 3월 21일 미국으로 떠났다.

맥퀸 후임으로 숭실중학교 교장이 된 사람이 정두현이다. 1936년 4월 새 학기가 되자, 신사 참배 강요와 맥퀸 교장 파면에 항의하며 숭실 학생들은 집단시위와 동맹 퇴학을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 장준하도 이때 숭실을 떠났다.

3.1 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렀던 개신교 신자 정두현은 신사 참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신사 참배라는 굴욕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학생 교육을 위해 교장을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두현은 어쩔 수 없이 숭실중학교를 맡았다.

결국 정두현이 몸담았던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반발하며 1938년 3월 18일 '자진 폐교'했다. 숭의여학교까지 세 학교가 문 닫은 이 사건은 '삼숭(三崇) 폐교'라 불렸다.

정두현은 1938년 4월, 타이완(臺灣) 다이호쿠제국대학(지금의 국립타이완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나이 무려 51세였다. 배움에는 때가 없다고 하나, 50세를 넘겨 '의학도'가 된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1942년 3월 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다이호쿠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처음이자 마지막 조선인이라고 한다.

해방 후 정두현과 김인정 여사의 행적
 
 
평양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장이었던 정두현은 해방 후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의학부장이 된다.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을 쓴 사람이 정두현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사진은 1946년 가을 무렵 촬영한 사진이다. 김일성대학 출범 전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정두현 추정 사진 평양의학전문학교 최초의 조선인 교장이었던 정두현은 해방 후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의학부장이 된다.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을 쓴 사람이 정두현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이 사진은 1946년 가을 무렵 촬영한 사진이다. 김일성대학 출범 전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 NARA (제공처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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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 졸업 후 귀국한 정두현은 1942년 3월부터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내과학 및 생리학 연구실에서 연구생으로 지냈다. 해방을 맞자 그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초청으로 1945년 10월부터 평양의학전문학교(평의전) 교장으로 일했다. 정두현은 평의전 최초의 조선인 교장으로 알려져 있다. 평의전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4월, 4년제 전문학교로 설립된 의학교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종합대학 창설 준비를 시작했다. 같은 해 3월 25일 북조선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발족했다.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장종식을 비롯하여, 김달현, 김택영, 신건희, 이동화, 이정우, 정두현, 한빈, 한설야, 9명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창립 위원 중 한 사람인 한빈은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을 거쳐, 북한의 국가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의 관장이 된다.

1946년 10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으로 개교한 북조선종합대학 창립 준비위원으로 정두현이 이름을 올린 것이 눈에 띈다. 김일성종합대학 출범 후 정두현은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의학부장'을 맡았다.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는 의학과, 약학과, 치과 의학과를 두었다.

1948년 9월 28일 북한 교육 당국은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를 분리해 '평양의학대학'을 출범시켰다. 평양의학대학이 출범하면서 김일성종합대학 부속병원 역시 '평양의학대학병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분리된 후, 평양의학대학은 수십만 권의 책을 보유한 도서관을 따로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인정도서관을 세운 김인정 여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 이후 북조선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토지개혁으로 수많은 지주가 '월남'할 때도 그녀는 평양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김인정 여사는 대동강을 건너 중화군(中和郡)으로 피난을 갔다. 이곳 중화군에서 그녀는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정도서관을 건립한 김인정 여사는 '도서관인'으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대동서관(大同書觀)과 경성도서관 이후 끊어진 사립 공공도서관의 명맥을 이었을 뿐 아니라 불모지였던 일제강점기 도서관 분야에 횃불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봉순 교수로부터 언급되는 '한국 여성 도서관인의 역사'는 백선행 여사와 김인정 여사로부터 다시 헤아려야 한다. 남녀를 떠나 김인정 여사는 일제강점기 도서관인 중에 가장 눈부신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정두현은 김인정 여사와 함께, 관장으로 인정도서관을 이끌었다. 그가 관장을 맡았던 인정도서관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도서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아니 조선을 대표하는 민간 도서관 초대 관장이었던 정두현은, 김일성종합대학 창설과 북조선 정권 수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 정권 초기 정두현의 활동
 
 
평양의학전문학교(평의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4월, 4년제 전문학교로 평양에서 문을 열었다.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학교는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를 거쳐, 평양의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해방 이후 정두현은 수장이 되어 북한 최고 의대를 이끌었다.
▲ 평양의학전문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평의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4월, 4년제 전문학교로 평양에서 문을 열었다.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학교는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를 거쳐, 평양의학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해방 이후 정두현은 수장이 되어 북한 최고 의대를 이끌었다.
ⓒ NARA(제공처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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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정두현은 31명의 북조선 임시헌법 제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 때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정두현이 '의사'와 '지식인'뿐 아니라 북한 사회를 이끈 '엘리트'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다.

직접 쓴 이력서에 따르면, 정두현은 1946년 6월 17일 자로 북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입당 보증인은 당시 '재정상'이었던 최창익(崔昌益)이다.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당 당시 정두현은 31명의 주석단 중 서열 23위였다. 1946년 8월 30일 북조선노동당은 창당대회를 통해 43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했다. 정두현의 서열은 31위였다. 그의 서열은 오기섭(34위), 한빈(39위)보다 높았다. 1946년 10월 1일 개교한 김일성종합대학 부총장 한빈보다 의학부장인 정두현의 서열이 더 높았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은 2차 당대회를 마치면서, 당 중앙위원 67명을 선출했다. 이중 정두현의 서열은 41위였다. 무정이 35위였으니까, 정두현의 서열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고등교육 기관에 적을 둔 사람 중 유일하게 당 중앙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1949년 12월 평양에서 제1회 전국외과학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정두현은 준비위원이었다. 정두현의 행적은 이 무렵까지 확인이 된다.

1948년 7월 북한은 김두봉(어문학), 최삼열(공학), 계응상(농학), 최명학(의학), 장기려(의학)에게 '1호 박사' 학위를 수여 했다. 북한 최고 의과대학 수장인 정두현은 의학 분야 1호 박사의 영예를 얻진 못했다. 

1952년 12월 1일 북한은 과학 분야 최고 두뇌를 모아 '과학원'을 출범시켰다. 의학 분야 원사로 최명학, 후보원사로 최응석, 리호림, 도봉섭이 뽑혔다. 정두현은 과학원 원사 명단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후로 그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1956년 4월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 당대회와 1961년 9월 열린 제4차 당대회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명단에서도 정두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의 엘리트로 승승장구한 정두현의 1949년 이후 행적은 분명치 않다. 평양의학대학 학장도 최명학이 맡았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확실치 않다. 1888년에 태어난 정두현은 1949년 61세였다.

해방 후 엘리트로 활약한 도서관인

   
해방이 되고 일제가 물러가면서 조선인 중에 신분이 '수직 상승'한 사람이 꽤 있다. 조선인 교사는 교장으로, 도서관 직원은 도서관장으로 지위가 수직 상승했다. 국립도서관 이재욱 관장과 박봉석 부관장, 종로도서관 송몽룡 관장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 도서관에서 일한 사람 중 남과 북을 통틀어 정두현만큼 '출세'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 정두현은 해방 후 도서관인 중 드물게 '중용'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이 극소수였음을 감안하면, '도서관인' 정두현의 출세는 지극히 이례적인 사례라 할 만하다.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은 '한반도의 모스크바'가 되고,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린 대구는 '보수의 아성'이 되었다. 두 도시의 극적인 전환은 남북한에서 전개된 혹독한 역사를 드러낸다. 종교를 아편 취급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개신교 지식인 정두현이 '출세'하는 과정은 우리 현대사가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은 아닐까.

이력서와 자서전에 쓰지 않았지만, 인정도서관 초대 관장이자 3개 제국대학에서 두루 공부한 정두현은 '도서관'에 대해 남다른 식견을 가졌을 법하다. '도서관인' 정두현은 훗날 수십만 권의 장서를 소장한 평양의학대학 도서관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이었던 그는 북한 도서관 정책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을까?

아직도 우리는 정두현에 대해 아는 것보다 알고 싶은 것이 더 많다. 정두현에 대한 글을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마무리하는 이유다.

남북 도서관에서 활약한 두 형제
  
 
정두현의 동생 정광현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제3대 관장으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형 정두현은 북한에서, 동생 정광현은 남한에서 도서관인의 삶을 살았다. 정광현은 1967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했다. 그가 기증한 책은 서울대학교에 ‘설송문고’로 남아있다.
▲ 설송 정광현 정두현의 동생 정광현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제3대 관장으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형 정두현은 북한에서, 동생 정광현은 남한에서 도서관인의 삶을 살았다. 정광현은 1967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했다. 그가 기증한 책은 서울대학교에 ‘설송문고’로 남아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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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뻔했다. 큰형보다 3년 먼저 숭실전문 교수가 되었다가 연희전문으로 옮긴 동생 정광현의 소식을 깜빡했다. 정광현은 1950년 1월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66년 학술원 회원이 된 그는 친족상속법의 권위자로 꼽힌다. 정종현 교수가 형제의 학력과 경력을 '비현실적'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제국대학을 졸업한 형제는 김일성대학과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각각 자리를 잡았다.

형제의 활약은 남북한 최고 대학에 그치지 않았다. 동생 정광현은 김진섭, 이병도에 이어 서울대 중앙도서관 제3대 관장을 역임했고, 한국도서관협회(도협) 제4대 회장을 지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와해된 도협은 1955년 재건되었다. 정광현이 협회장을 지낸 1956년부터 1959년 무렵 도협은 재건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정광현은 1952년 9월 4일부터 1962년 5월 10일까지 10년 가까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으로 일했다. 정광현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시절을 포함해, 서울대 도서관장으로 가장 오래 재임한 사람이다. 정광현이 1962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하지 않았다면, 그의 도서관장 재임 기간은 더 늘어났을지 모른다. 정광현은 자신의 장서를 서울대 도서관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책은 '설송(雪松)문고'로 서울대 도서관에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를 포함해 남북한 도서관계에 정두현, 정광현 형제처럼 굵은 발자취를 남긴 형제가 또 있을까? 그들 형제가 '용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북한 학술.도서관계에서 두 형제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 정두현의 이력서와 자서전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자료를 직접 촬영해오신 전북대학교 김근배 교수님을 통해 제공 받았습니다. 귀중한 자료 제공해주신 김근배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정두현, #정광현, #인정도서관, #서울대학교, #김일성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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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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