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5.06 13:39최종 업데이트 21.05.0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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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TV로 세상을 배운 아이였다. TV 속 어린이들은 자기만의 방에 있는 책상에 앉아 공부했다. 어김없이 앞치마 두른 엄마가 온화한 표정으로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유리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 곱게 깎은 과일, 정성스러운 간식.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지었다. 넥타이 맨 아빠는 넓은 거실을 지나 서류 가방을 들고 출근했고 정갈한 상이 차려져 있는 커다란 식탁 위에는 하하호호 웃음이 넘쳤다.

꽤 오랜 시간 TV 속 가족의 모습을 정상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 집은 비정상이었다. 남동생과 2층 침대 한 칸씩 자리를 차지하고 자야 하는 좁은 방도, 내가 공부를 하건 말건 TV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오는 작은 거실도, "네 일은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말하던 일하는 엄마도, 넥타이를 맬 일 없는 아빠도, 정적이 맴도는 소박한 식탁도. 모든 게 잘못된 것 같았다.


어른이 되면서 TV 속 집과 가족의 모습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우리 집이 TV 속 집처럼 크고 넓지 않은 건 부모님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TV 밖에는 훨씬 다양한 가족의 모습이 존재하며 구성원의 역할도 고정돼 있지 않다는 걸. 지금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TV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나는 TV로 세상을 배운 아이였다. ⓒ unsplash

 
TV에 대한 애증을 떠올리게 된 건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면서였다. 어린이책 편집자로 일하다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을 만나고 있는 김소영 작가는 "연말 TV 예능 프로그램 시상식에서 아버지들이 아이를 돌보는 리얼리티 쇼가 대상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프로그램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KBS <슈퍼맨이 돌아온다>(아래 <슈돌>)일 거다. "나는 이 쇼를 보지 않는다"는 김소영 작가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거기 나오는 집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어린이에게는 그 집이 꿈속의 것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그 어린이는 어떤 상황에서 TV를 보고 있을까? 누구와 볼까? 부모와 함께 볼까? 혼자 볼까? 무엇을 하면서 볼까? TV가 놓인 곳은 어디일까? 그 어린이는 화면 속 아이를 부러워할까? 자기 현실과 너무 먼 일이라 아무 상관이 없을까? 만일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그런 생각에 화면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
-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김소영 작가처럼 나도 <슈돌>을 보지 않는다. 너무 넓은데 놀라울 정도로 깨끗한 집은 둘째였다. 아침잠 없는 우리 집 애는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 일어나, 아빠 일어나, 밖에 나가자" 난리인데 저 집 애들은 혼자 일어나 생글생글 웃으며 잘도 노네. 순하고 뭐든 잘 먹고 걸음도 빠르고 말도 잘하고. 어머 쟤는 영재인가. 어쩜 저렇게 똑똑해. 

<슈돌>에는 진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이가 떼쓰고 우는 모습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화면에는 랜선 이모·삼촌 가슴 심쿵할 아이들의 예쁜 모습이 주로 담겼다. 주 양육자가 아닌 아빠들은 이벤트처럼 육아를 했고 신기할 정도로 화가 없었다. 한창 육아 집중기라 그랬을까. 화면 속 무해한 남의 집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나의 육아만 힘들고 우리 아이에게만 뭔가 문제가 있는 것만 같았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언젠가 비연예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나오는 예능을 본 적 있다. 손자를 함께 돌보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슈퍼맨에 나오는 걔. 걔는 말도 잘하던데 쟤는 왜 아직도 말을 못 해." 

어른이 된 나는 TV 속 이미지가 편집된 진실임을 안다. TV 속 환상이 일상을 뒤흔들 때면 채널을 돌리거나 "저건 방송일 뿐"이라며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TV 없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배경처럼 TV를 접하게 되는 어린이들은 어떨까. TV 속 세상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비교하거나 TV 속 '엄친딸', '엄친아' 때문에 부당한 비교를 당하지는 않을까. TV 때문에 더 외로워지지 않을까. 

김소영 작가는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라더니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게 된 사유리와 젠. ⓒ KBS

 
<슈돌>을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방송인 사유리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사유리의 <슈돌> 출연을 반대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지난해 사유리가 정자를 기증받아 아들 '젠'을 출산했다는 사실을 밝힌 후 <사유리 TV> 유튜브 채널에 올라오는 '엄마, 사유리' 시리즈를 꾸준히 봐왔다. 부른 배를 숨기고 임신 기간을 보내던 시절부터,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출산 전후 시기를 보내는 모습, 한국에 함께 왔던 엄마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얼마나 막막할까 안타까움에 눈물이 났다. 마음으로 계속 사유리를 응원했다. 

사유리의 <슈돌> 출연을 두고 '올바른 가족관을 제시해야 할 공영방송이 비정상적 출산을 부추긴다'며 출연을 반대하는 청원이 올라왔다는 소식에 헛웃음이 나왔다. 저출산이 문제라더니. 이른바 '정상가족'에서 이루어지는 출산만 '출산'인 걸까. 어린이는 우리의 미래라더니. 특정한 어린이만 '어린이'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눌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 걸까. 

우리 집 6살 아이와 인터넷에 뜬 사유리의 <슈돌> 인터뷰 장면을 봤다. 갓 100일 지난 젠의 모습을 "아가 예쁘지?" 미소 지으며 보고 있는데 사유리가 "아빠가 없으니까 '부족했다, 외로웠다' 느끼지 않게 정말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왔다. 아이는 놀라서 물었다. 

"왜 아빠가 없어?"
"음… 아빠가 없는 친구도 있어."
"○○이도 아빠 지금 없는데."
"음. ○○이 아빠는 외국에 일하러 간 건데. 원래 아빠가 없는 친구도 있어. 엄마, 아빠가 없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키워주는 친구도 있고."
"그럼 할머니, 할아버지 늙어서 죽으면 어떡해." 


생각해 보니 아이는 아빠 혹은 엄마가 없는 친구를 본 적 없다.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자발적 비혼 출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대신 아이가 혐오와 편견에 갇히지 않도록,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설명해줘야겠다는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사유리가 우리 집에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방송 은퇴까지 각오하며 솔직하게 비혼 출산 사실을 밝힌 사유리의 용기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고 있다. 지난 4월 27일, 여성가족부는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고 보조생식술을 이용한 비혼 단독 출산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작업과 정책 검토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기본계획에는 혼인·혈연·입양에 국한됐던 가족 개념을 넓혀 비혼 동거 커플이나 위탁가족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법령 개정을 추진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사유리 출연 논란에 <슈돌> 제작을 총괄하는 강봉규 CP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 방송의 역할"이라며 "다양한 가족 형태의 하나로 사유리 가족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슈돌>이 그런 역할을 해왔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사유리가 출연한 첫 방송에서는 논란을 의식한 듯 지나치게 모성애가 강조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유리의 등장이 어떤 '시작'임은 분명하다. TV로 세상을 배우게 될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가족의 모습, 육아의 모습이 방송에 점점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는 윤여정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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