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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245에서 바라본 5·18 최후의 항전지, 옛 전남 도청의 전경. 우측으로부터 전남도청 별관, 본관, 회의실
 전일빌딩245에서 바라본 5·18 최후의 항전지, 옛 전남 도청의 전경. 우측으로부터 전남도청 별관, 본관, 회의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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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문서로, 영화나 연극으로, 그림으로, 음악이나 문학 작품 등. 하지만 그 무엇보다 명징하게 뇌리에 각인시키는 방법은 그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직시하고 직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장'에 진실이 있다는 것이고, 역사적 사실은 장소와 함께 익혀야 명확한 이미지와 생생한 현장감을 갖게 된다는 말이다. 인간의 기억은 시간보다 공간에 더 민감하고 구체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광주를 '민주·인권·평화'의 도시라고 한다. 사람에게 혼이 있듯이 도시에도 혼이 있다. 한 도시의 정체성은 그 도시를 관통하는 '역사와 장소'를 기반으로 한다. 민주·인권·평화는 광주 사람들이 항쟁의 역사를 통해 직접 체험하고 체득한 '혼의 총합'이다.
  
5·18 당시 도청 앞 광장에 모인 광주 시민들 모습
 5·18 당시 도청 앞 광장에 모인 광주 시민들 모습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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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전 뜨거웠던 역사의 현장, 옛 전남도청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심장, 광주의 중심에 5·18 민주화운동이 있고 그 중심의 중심에 '옛 전남도청'이 있다. 옛 전남도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을 중심으로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대항했던 5·18 민중항쟁의 중심지이자 최후 항전지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군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잠시 외곽으로 물러났던 계엄군들이 항쟁 지도부가 있는 도청 탈환 작전에 나섰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계획을 입수한 항쟁 지도부는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항쟁 본부에서는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21살 여대생 박영순의 떨리는 목소리가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를 통해 숨죽이고 있던 광주 시내 전역에 울려 퍼졌다.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의 모습
 1980년 5·18 당시 전남도청의 모습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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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27일 새벽에 울려 퍼진 박영순의 애절한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광주시민들의 뇌리에 깊숙이 남아 있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청 내부로 들어온 공수 특공대가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대자 도청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어슴프레 동이 터 오르는 새벽 5시경 전남 도청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게 완전히 진압당했고 이로써 1980년 5월, 열흘간의 광주 민중항쟁은 역사의 막을 내렸다.

5·18 때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옛 전남도청은 역사적, 건축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건축물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관공서 건축을 독점하던 시기에 우리 손으로 설계와 시공에 참여해 완성한 건물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지어진 전남도청의 모습. 우리 손으로 설계와 시공에 참여해 완성한 건물이다. 2층으로 지어졌으며 외장은 현재와 달리 붉은 벽돌과 화강석·인조석으로 마감하였다
 1930년대 지어진 전남도청의 모습. 우리 손으로 설계와 시공에 참여해 완성한 건물이다. 2층으로 지어졌으며 외장은 현재와 달리 붉은 벽돌과 화강석·인조석으로 마감하였다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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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등록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옛 전남도청 본관은 1930년 6월 전남도청 영선과에 근무하던 건축가 김순하(金舜河 1901∼1966)의 설계로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완공되었다.

완공 당시 2층 벽돌조 건물로 지어졌으며 바닥과 계단에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외장은 현재와 달리 붉은 벽돌과 화강석·인조석으로 마감하였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절에 하얀색으로 도색되어 준공 당시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이후 1975년에 현재와 같이 3층으로 증축되었고, 2005년에 도청이 무안군 남악 신도시로 이전할 때까지 70년 넘게 전라남도의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전남도청 회의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전남도청 회의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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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감순하가 설계한 전남도청 회의실 설계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건축가 감순하가 설계한 전남도청 회의실 설계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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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전남 도청이 들어서게 된 사연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은 고려 현종 9년, 1018년에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앞글자를 따서 명명되었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전주와 나주는 전라도의 북부와 남부의 중심도시였다. 광주는 나주의 끝자락에 위치한 조그만 군 단위 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이 23개의 부로 개편되면서 나주에 부(府)가 설치됐고 부윤으로 친일파 윤웅렬(윤치호의 부친)이 부임했다. 뒤이어 일어난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전국 각지에서 일제에 반발하는 의병들이 봉기했다.

양반의 도시 나주에서도 거세게 저항하는 의병들에게 나주 군수가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윤웅렬은 나주의 변두리 광주읍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듬해 1896년, 조선을 장악한 친일세력들은 혼란한 정국을 타개할 쇄신책으로 지방제도를 23부에서 13도(道)로 개편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전라도는 남도와 북도로 나뉘었고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로 윤웅렬이 내정됐다.

의병은 진압되었지만 관찰사 윤웅렬은 나주로 복귀하지 못하고 비교적 안전한 광주에 눌러앉게 된다. 광주에 있던 관찰부는 전남도청이 되었고 1909년부터 일본인 관료들이 배치되면서 정착하게 된다. 이후 윤웅렬은 일본인들이 광주로 들어오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광주공원 선정비군에는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였던 친일파 윤웅렬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 있다
 광주공원 선정비군에는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였던 친일파 윤웅렬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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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윤웅렬이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로 내정되지 않았다면 '광주광역시'가 아니라 '나주광역시'가 탄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광주공원에는 친일파 윤웅렬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 있다.

흔적이 지워지면 역사가 왜곡된다
 

1896년부터 110여 년 동안 광주 근현대사의 영욕을 지켜본 전남도청은 2005년에 전라남도 무안군으로 이전하게 된다. 1986년 전라남도에 속했던 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남도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행정기관의 기능을 상실한 옛 전남도청 자리에 아시아 문화의 교류·교육·연구를 통하여 아시아 각국의 상호 이해와 동반성장을 위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들어서게 된다.
  
본관으로 이어진 별관 건물은 일부만 남고 헐리고 말았다. 두 동강 난 건물 사이를 네모난 철근 구조물이 받치고 있다. 문화전당의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본관으로 이어진 별관 건물은 일부만 남고 헐리고 말았다. 두 동강 난 건물 사이를 네모난 철근 구조물이 받치고 있다. 문화전당의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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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단체와 정부 간 찬·반 양론이 극심하게 대립하던 중에 문화전당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와 함께 옛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5·18 역사의 흔적은 서서히 지워지고 새로운 갈등이 잉태 되었다.

원래 옛 전남도청 건물은 본관 건물뿐 아니라 별관, 경찰청, 민원실, 상무관, 회의실 등 6개 동의 건물이 있던 큰 공간이었으나 본관으로 이어진 별관 건물은 일부만 남고 헐리고 말았다. 두 동강 난 건물 사이를 네모난 철근 구조물이 받치고 있다. 문화전당의 출입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시민들에게 5·18 당시 상황을 알렸던 방송실은 철거됐고 5월 27일 새벽 시민군의 퇴로였던 도청 민원실은 원형이 심하게 훼손됐다. 경찰청 민원실도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계엄군이 발포한 다수의 총탄 자국도 사라졌다.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총탄 자국. 리모델링 과정에서 다수의 총탄 자국이 지워졌다.
 계엄군이 발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총탄 자국. 리모델링 과정에서 다수의 총탄 자국이 지워졌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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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광주 시민들이 피와 눈물로 지켜낸 '대한민국 민주화의 심장' 5·18 최후 항전지 옛 전남도청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아시아문화전당'으로 재탄생했지만, 이 과정에서 광주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옛 전남도청의 '원형복원'은 광주 지역사회의 새로운 숙제가 되었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 들어서 실마리가 풀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옛 전남도청 복원 추진단'이 결성되었고 늦어도 2024년까지는 복원이 완료될 거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도청 본관 맞은편에 자리한 상무관. 이곳은 전라남도 경찰청 소속 체육관이었지만, 5.18 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로 안치했던 곳이다
 도청 본관 맞은편에 자리한 상무관. 이곳은 전라남도 경찰청 소속 체육관이었지만, 5.18 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주검을 임시로 안치했던 곳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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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관에 임시로 안치된 주검들. 이 주검들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묘역으로 옮겨졌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 된 곳이다
 상무관에 임시로 안치된 주검들. 이 주검들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묘역으로 옮겨졌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배경이 된 곳이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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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오월정신은 도청과 광장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날 것입니다. 전남도청의 충실한 복원을 통해 광주의 아픔과 정의로운 항쟁의 가치를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도록 정부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작년에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치러진 5·18 제4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했던 기념사의 일부분이다. 대통령의 약속이 충실하게 지켜지길 바란다. 대통령이 말한 '정의로운 항쟁의 가치'는 역사의 현장을 '원형 그대로' 직시하고 직면할 때 더욱 명징해지기 때문에.

태그:#옛 전남도청, #민주화의 성지, #5.18 최후 항전지, #옛 전남도청 원형복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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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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