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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비가 내린 5월 1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굵은 빗방울은 이내 그쳤지만, 가랑비가 이따금 내리며 바람도 부는 고르지 않은 날씨였다. 남원시 사매면의 문학마을인 구 서도역에 관광버스가 한 대 도착하며 왁자지껄 생동감이 넘쳤다.

중앙아시아유학생센터의 임실 고택·종갓집 체험단의 인솔 교사와 유학생 등 19명의 일행이 버스에서 내렸다. 17명의 유학생과 2명의 인솔 교사가 서울 서초역에서 아침 일찍 관광버스로 세 시간 반을 달려온 첫 목적지가 소설 <혼불>의 무대인 구서도역이었다.

전북 완주에 있는 (재) 문화재아웃리치연구소(대표 전경미)가 문화재청, 전라북도, 임실군의 지원을 받아 2021년 고택·종갓집 활용사업으로 전라북도 지정 민속문화재인 '이웅재고가'를 활용한 '혼불의 생명, 콩깍지 속의 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고택에 전통 생활 모습과 결합하여 고택에 내재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향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유학생들이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하기 위한 소중한 여행이다. 이날 참여한 유학생들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우리나라로 유학 온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다. 한국어를 전공하기도 하지만, 박사 과정에서 인공지능 또는 경영공학 등 다양한 전문 분야를 공부한다고 한다.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이기고 광막한 초원을 가로지르며, 낙타와 함께 생활했던 실크로드 유목민들의 진취적인 모습이 이 학생들에게서 느껴졌다.

현재는 폐역이 되고 철도 시설을 보존한 구 서도역(아래 서도역)은 <혼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다. 서도역은 <혼불>의 3대 종부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마을로 들어오는 문이었고, 강모가 전주로 학교에 다니며 드나드는 문이었고, 강모가 만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매안마을을 벗어나는 문이었다. 소설 <혼불>의 최명희 작가도 부친의 고향인 노봉마을을 방문하기 위하여, 그리고 <혼불> 작품을 구상하고 이 인근 지역을 답사하기 위하여 서도역을 수없이 찾았을 것이다.

유학생들에게 서도역은 낯설지만 정겨운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목조 건물의 서도역, 녹슨 선로에서 열차의 진행 방향을 바꾸어주는 전철기, 검은 콜타르 기름이 풍화되어 자연스러운 나무색과 동화된 수많은 침목 위에 평행선을 유지하는 녹슨 레일, 수많은 사람이 머물며 열차를 타고 내리던 플랫폼이 옛 추억을 간직하고 침묵한 채 있다. 학생들은 좁은 레일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으며 걸어보기도 하고, 평행선으로 죽 뻗은 두 레일에 서로 서서 손을 맞잡고 추억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서도역은 ‘혼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다.
▲ 서도역 서도역은 ‘혼불’의 중요한 문학적 공간이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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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들은 혼불문학관으로 이동하였다. 청호저수지를 바라보며 노적봉으로 향하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혼불문학관을 지키고 있다는 위풍당당한 호랑이 모양의 바위를 만져보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시실에 입장하여 작가 최명희의 유품과 생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작품 <혼불>의 내용을 디오라마로 전시한 전시물들을 관심 있게 살펴보았다. 무당이 굿하는 마당과 장례 행렬의 디오라마에 표현된 우리나라의 옛 풍습에 관심을 보였다.

한 학생이 혼불문학관 전시실의 무당이 굿하는 장면 앞에 오래 머물렀다. 자기의 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의식이 있다고 했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광막한 초원에서 낙타와 함께 생활했던 실크로드 유목민들도 언어가 다르고 표현이 다를지라도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여러 지역과 민족이 역사와 문화가 다르고 개성이 있지만,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보편성 원리가 있다. 이 학생이 우리나라의 옛날 무당이 굿하는 장면 앞에서 문화와 표현이 다르지만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규방 문화를 체험하고 음식 배우기

이웅재고가로 이동했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맞춤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웅재고가는 효령대군의 증손인 춘성정 이담손이 무오사화 때 정착하여 500년 넘게 20대째 이어온 종가다. 이 춘성정 종가는 왕손의 저택이지만 규모가 크거나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느낌마저 있다. 이 종가는 뒷마당에 있는 굴뚝의 높이가 낮다. 힘들게 생활하는 이웃들이 있는데, 종가에서 음식을 마련하며 불을 피우는 연기가 나오는 것조차 삼가는 배려였다고 한다.

<혼불>의 최명희 작가도 혼불 작품을 집필하기 전부터 이 종가를 여러 번 방문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혼불> 작품 속 종가의 원형을 구상하였을 것이다. 현재의 종손으로 이 종가의 건물과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이종평씨는 선친인 이웅재씨가 이 종가를 방문한 최명희 작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회고를 들었다고 했다. 이종평씨는 중앙아시아유학생센터의 임실 고택·종갓집 체험단인 인솔 교사와 유학생 등 19명의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서울에서 이날 아침에 내려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매화향 가득한 종가 대청에서 규방 문화의 체험이 시작되었다. 강사는 전통자수 계승자인 전경례씨였다. 전통 규방 문화 체험을 혼불 <소설>의 이야기로 도입하였다. 이야기는 <소설> 혼불의 종부 청암 부인과 효원에게 와서 머물렀다.

19살에 청상과부가 된 청암 부인, 남편 강모와 시누이 강실의 비극적 사랑에 독수공방하는 효원. 이 두 여인이 규방에서 외로움 슬픔 기쁨 모든 것을 바늘과 실에 의지하는 장면을 설정하고, 이 장면에서 이 두 여인이 만들었을 작은 손지갑이 규방 문화 체험의 소재가 되었다. 손지갑을 만들려면 천을 준비하고 부직포를 붙이고, 부직포 형태대로 면 자르기를 한다. 지갑 형태로 오리고, 뒤집을 구멍을 내고 박음질을 하며 감침질을 한다.
 
종가 규방 체험으로 손지갑을 감침질하는 유학생 자매가 정겨워 보였다.
▲ 종가 규방 체험 종가 규방 체험으로 손지갑을 감침질하는 유학생 자매가 정겨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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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갑을 감침질하는 두 학생이 유달리 정겨워 보였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유학 온 Nazarova Ogulgul과 Nazarova Ogulgerek 자매였다. 언니는 고국에서 한국어학과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 와서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에 다니고, 동생은 유학 와서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학과 석사 과정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지켜나가야 할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양탄자라고 했다. 이 자매는 어머니가 처녀 때 짠 양탄자를 지금 가지고 와서 쓰고 있다고 했다. 두 자매가 당당해 보였다. 가족의 정과 고향의 그리움을 달래며 힘차게 먼 타국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힘의 원동력이 그녀들의 양탄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임실 고택·종갓집 체험의 종가 음식 배우기는 약과 만들기 체험이었다. 춘성정 가문의 종부 황영순씨가 강사였다. 종가에 시집와서 종가의 제사며 잔치에 쓸 많은 음식을 만든 내용을 이야기했다. 집안 행사에 반드시 만드는 약이 되는 과자 약과였다.

만들기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체험으로 진행하였다. 생강, 밀가루, 식용유, 소주, 물엿, 꿀 등의 재료를 준비했다. 반죽 만들고, 모양내고, 튀기고, 꿀 묻히고, 완성하기 여러 단계가 있다. 반죽할 때 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주를 넣어 반죽하는데 그렇게 하면 재료가 변하지 않고 연해진단다.

강사 황영순씨가 종부로서 여러 가지 힘들었던 일을 열거하며 "소도 키웠겠죠잉" 하니 학생들이 모두 웃는다. 유학생들은 한국어 이해 수준이 높았다. 약과 반죽을 작은 주먹만큼씩 받은 학생들이 작은 조각으로 약과의 모양을 만들었다.
 
임실 고택·종갓집 체험의 종가 음식 배우기는 약과 만들기 체험이었다.
▲ 종가 음식 임실 고택·종갓집 체험의 종가 음식 배우기는 약과 만들기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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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튀기고 꿀 묻히는 단계는 강사와 도우미 몇 분이 임시로 대청 끝에 과방을 만들어 한 곳에서 진행하였다. 바람이 불어 쉽지 않았다. 완성된 약과를 유학생들이 시식하고 남은 분량은 곱게 포장했다. 

어느덧 서울로 출발할 관광버스의 약속 시각이 넘어가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마을 어귀 정자 옆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후예들이 머나먼 이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이날 하루는 한국의 전통문화 체험의 뜻깊은 기회를 가졌다. 중앙아시아유학생센터의 임실 고택·종갓집 체험단 인솔 교사와 유학생 등 19명의 일행의 버스가 서울 서초역을 향하여 출발했다. 
 
민속문화재인 ‘이웅재고가’를 활용한 ‘혼불의 생명, 콩깍지 속의 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종가 고택 체험 민속문화재인 ‘이웅재고가’를 활용한 ‘혼불의 생명, 콩깍지 속의 콩’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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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므로 꽃이 아름답고 열매가 많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간다.

태그:#서도역, #이웅재고가, #혼불문학관, #종가 고택 체험, #규방 종가 음식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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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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