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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은 (하야가 아닌) 탄핵을 택했는데, 당시엔 헌재에서 기각될 걸로 기대했던 것 같다. 김기춘 비서실장 등 청와대에 있는 모두가 100% 기각이라고 봤다. 기각되면 광화문광장 등이 폭발할 것 아닌가. 그래서 기무사령관한테까지 계엄령 검토를 지시한 것."
- 김무성 전 대표가 밝힌 '박근혜 탄핵' 비화 (<시사저널> 26일)

난데없는 증언이 툭 튀어나왔다. '박근혜 탄핵' 당시 청와대의 '계엄령 검토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김무성 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대표가 확인한 것이다. 풀이하자면 탄핵에 찬성한 자신과 달리 서청원·최경환·정갑윤·홍문종 등 8명의 친박계 의원이 청와대 정무수석에게 하야를 건의했고, 박 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당시 청와대가 계엄령 검토를 직접 군에 지시했다는 이 회고는 분명 충격적이었다.

'박근혜 청와대'가 촛불집회 당시 시민들을 군홧발로 짓밟으려는 (계획도 아니고) 지시를 실제로 했다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김무성 전 대표와 같은 야당 중진이 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이 사실을 과연 김 전 대표만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걸 알고도 수년 동안 내내 침묵으로 일관한 김 전 대표나 보수야당 인사들은 국민을 철저하게 무시해왔던 것이 아닌가.
 
8일 서울 마포 포럼에 참석한 국민의힘 김무성 전 의원
 8일 서울 마포 포럼에 참석한 국민의힘 김무성 전 의원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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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안이 "나는 탄핵 절차를 밟자는 입장을 고수했다"라며 면피성 발언을 곁들인 김 전 대표의 회고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난 2016년 11월 야당 당 대표로서 이 계엄령에 대한 경고에 나섰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도 28일 페이스북에 "김 전 의원의 고백은 도피한 기무사령관과 나머지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재개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라며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겠다는 발상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다"라며 수사 재개 필요성을 역설했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우원식 의원 역시 "촛불을 짓밟으려 한 계엄 사태의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라고 천명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이다. 또 보수경제지를 중심으로 김 전 대표의 해당 발언을 한낱 스쳐가는 회고로 치부하거나 받아쓰기 보도에 그치려는 경향 역시 뚜렷하다.

절대 그 정도 사안일 수 없다. '내란 음모' 의혹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해외로 도피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김 전 대표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최근 정계 복귀를 선언한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 등 '박근혜 청와대' 및 지난 정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수사가 다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퇴행의 증거들

이와 더불어 김무성 전 대표가 마음 놓고 이런 '폭탄'급 인터뷰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4.7 보궐선거 승리 이후 국민의힘 내에 불고 있는 오만함의 정체 말이다. 만약 선거 승리가 없었다면, 또 정부·여당이 뭇매를 맞지 않았다면 김 전 대표가 과연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김 전 대표 개인은 최근 당내에서 불거진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론에 선을 그으려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발언을 내놓을 수 있는 자체가 어떤 자신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4.7 보궐선거 승리 이후 '김종인 체제'를 마무리한 국민의힘은 '도로 한국당'이란 비판에도 오만함으로 일관하는 중이다.

먼저 사면론. '친박' 서병수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문재인 대통령과의 오찬 회동에서 오세훈 서울시장과 박형준 부산시장 또한 건의했다는 이 사면론은 국민의힘 지지율 상승의 제동을 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런데도 그칠 줄 모른다. 28일 서병수 의원은 페이스북에 "탄핵과 관련되어서 우리 당에도 엄연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친이‧친박과 관련된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다만 무시하고 외면하고 있을 뿐"이라고 재차 '사면이 국민 통합'이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더 나아가 "친이‧친박의 계파정치에 익숙했던 사람들, 탄핵에 주도적으로 역할 했던 사람들, 이제 물러서야 한다"라고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발언하고 있다.
 서병수 국민의힘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에서 발언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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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영 당 권한대행 등은 애써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선을 긋고 있지만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한 네 명의 후보를 비롯해 사면론에 강한 제동을 건 국민의힘 중진은 찾아보기 어려운 형국이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이 "아사리판", "흙탕물"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던 모습 그대로 국민의힘이 빠르게 자유한국당의 면모로 회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에 걸맞게 '올드보이'들의 귀환 역시 당 안팎에서 분위기가 무르익는 중이다. 최근 황교안 전 대표가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국회를 찾았고, 지난 총선과 서울시장 선거에서 연전연패한 나경원 전 의원 역시 당 대표 선거 출마설이 본격화되고 있다.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이 한사코 당 복귀를 막아섰던 홍준표 무소속 의원 역시 여전히 '페이스북 정치'로 존재감을 유지 중이다.

여기에 보수야당 차기 대선 주자 자리를 굳히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까지 제기됐다. 28일 김용판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적폐수사를 지휘했던 윤 전 총장은 '친검무죄, 반검유죄'인 측면은 없었는지, 자신할 수 있는가"라며 공식적으로 윤 전 총장의 사과와 검증론을 들고나왔다.

김 의원은 이명박 정부 서울지방경찰청장 출신으로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김 의원이 당내에서 최초로 윤 전 총장에 대한 견제에 나선 것은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검증을 요구한 쪽이나 윤 전 총장 모두 이전 정부 '적폐'의 흑역사를 스스로 소환하는 인물들인 셈이다. 마치 김무성 전 대표가 촛불집회 당시 계엄령 지시를 고백한 것처럼.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당시 외압을 넣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28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검찰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2012년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당시 외압을 넣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국민의힘 김용판 의원이 28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검찰 특별수사팀장이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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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만 모르는 냉정한 민심

당장 당 대표 및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한 의원들이 표를 읍소해야 하는 당원들의 성향이 그대로다. 단순히 보궐선거에서 성난 민심이 여당을 심판했을 뿐 '도로 한국당'의 DNA는 여전할 수밖에 없단 얘기다. 
 
"야당이 잘해서 여당이 패한 것이란 응답은 3%도 안 됐습니다. 구체적으론 국민의힘이 야당 역할을 잘해서 이겼단 답이 1.5%, 후보들이 잘해서란 응답이 1.3%를 기록한 겁니다. 특히나 보수성향 응답자들 중에서조차 국민의힘 측 잘했다고 평가한 건 4%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념성향을 떠나 이번 국민의힘의 압승이 반사이익에 따른 것이란 데 생각이 모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합니다."

지난 19일 JTBC <뉴스룸>의 <냉정한 4·7 민심…"야당이 잘해서" 응답 3%도 안 돼> 보도 중 일부다.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야당이 잘해서 이겼다'는 응답은 단 1.5%, 후보들이 잘해서라는 응답은 1.3%였다고 한다. 숫자를 다시 보시기를. 15%나 13%가 아닌 1.5%, 1.3%다. 말 그대로 '냉정한 민심'이 반영된 수치라 할 수 있다.  

4.7 보궐선거 승리가 국민의힘이 잘해서가 아니라는 걸 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은 '도로 한국당'이란 비판에도 자성 없는 국민의힘뿐이다. 선거 직후 갖가지 분석이 쏟아지면서 뭇매를 맞은 민주당과 달리 일부 언론의 비판에도 국민의힘이 오만함을 싹 틔울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힘의 상승세는 멈춰섰다. 반면 대통령 지지율은 최저점을 찍은 이후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리얼미터 정례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은 3주 연속 하락했다(39.4%→37.1%→36.6%). 30%대 중반을 유지 중인 국정수행 능력 평가와 달리 문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지지 의사를 묻는 27일 윈지코리아컨설팅 조사에선 '지지한다'는 응답이 46.6%, '지지하지 않는다'가 49.4%였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럼에도 국민의힘의 퇴행은 멈출 줄 모른다. 정부·여당의 '야당 복'을 비아냥 거리는 목소리가 계속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런 야당 덕분에 여당의 개혁 시계도 더디게 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늘도 국민의힘의 퇴행이 한국 정치 전체의 퇴행을 견인하는 중이다. 

태그:#계엄령, #국민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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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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