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전 기사 미국 공사의 부임을 춤 출 듯 기뻐한 고종 임금에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예요. 앞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미조약의 서광에 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초대 특명 전권 공사 푸트의 첫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고 결말도 좋지 않았지요.

당시 서울에는 청나라 이홍장이 파견한 오장경, 마건상, 원세개 등 중국 관리가 체류하면서 푸트 공사와 조선 정부의 동향을 매의 눈으로 살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푸트 공사는 초기에 묄렌도르프의 집에 기숙하고 있었으니 고스란히 정보망 속에 포섭되어 있었던 것이죠.

특히 일본 측에서는 공사의 일거수 일투족을 실시간으로 정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사관 내부에 스파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푸트 공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스파이를 찾아내 봅시다.

당시 공사관에는 미국인이 아닌 두 명이 동거하고 있었지요. 그 하나는 조선인 윤치호, 다른 하나는 일본인 사이토 슈이치로입니다. 두 사람 모두 통역원으로 일본에서 데려 왔지요. 푸트 공사가 방한 전에 요코하마에 한 달간 체류했을 때에 그는 현지의 미국 공사 빙햄에게 통역관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빙행이 이노우에 외무경(외교장관)에게 상의하자 이노우에가 자신의 비서 사이토와 윤치호를 추천한 것입니다. 당시 유학중이던 윤치호는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쯤 되었습니다. 영어 통역을 할 실력은 못 되지만 아무튼 영어를 할 수 있는 조선인은 그 밖에 없었지요. 사이토는 미국 보스턴 대학 출신으로 외교부에 들어가 이노우에의 비서가 되었습니다.  

영어에 능통한 사이토가 푸트 공사의 영어를 일본어로 윤치호에게 전하면 윤치호가 그것을 다시 한국말로 전하는 이중 통역을 했던 것이지요. 조선에 간 지 3개월 만에 사이토가 일본으로 귀환한 뒤로는 윤치호가 통역을 점담하게 된 거지요.

사이토가 정탐꾼이었다는 사실은 먼 훗날 일본 국회 도서관 소장 문서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사이토는 한양에 도착한 지 사흘 후인 5월 16일 첫 편지를 필두로 근 두 달 동안 총 13통의 편지를 이노우에게 보냈습니다.

5월 22일부 사이토의 서한(세 번째)은 앞서 말한 5월 20일 푸트가 고종 임금을 알현한 대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미공사관 서기관 및 통역관 두 명이 공사를 따라 임금 배알소에 들어갔습니다. 공사가 축사를 읽고 난 뒤 공사가 수행원 전원을 국왕께 소개했습니다. 국왕전하께서는 만면에 희색을 띄우시면서 여러 말씀을 하신 후 퇴장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한국 궁정 관리는 독판 민영목, 협판 김홍집, 묄렌도르프, 참의 이조연, 협판 민영익, 협판 홍영식, 기타 한 사람….통역은 모두 윤치호와 제가 했습니다. 그걸 보고 민영익, 김옥균 같은 일본당(개화당)은 무척 만족해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

개화파를 아예 '일본당'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인상적이군요. 일본이 개화파를 자기들과 한통속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군요. 

그건 그렇고, 이거 이상한 광경이 아닌가요? 조선 왕궁에서 거행된 미국 공사의 신임장 제정식에 웬 일본 외교관이 통역을? 왜 그 일본인은 미국 공사관에 상주? 누가 봐도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이에 일부 조선 관리들은 불안과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고 푸트 공사에게 항의하는 쪽지를 보냈다는 정황이 사이토의 6월 7일자 서신(제6차)에 담겨 있군요.
 
"오늘 아침 미국 공사가 제게 '조선 관리들 의심 많은 것도 주책이야. 어떤 사람이 내게 뭣 때문에 사이토를 데리고 왔느냐고 따져 묻지 않겠어? 또 내게 항의편지를 보내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들도 머지않아 의심을 풀고 서양인은 천하정도를 지킨다는 걸 알게 되겠지..'라고 말했습니다.이러다가는 중국 쪽에서도 오래 가만 있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주시길..."
 
중국 측이 가만 있지 않을 것 같다는 사이토의 예감은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6월 15일자 사이토 서신(제 7차)에는 중국의 이홍장이 중국 주재 미국 외교관에게 항의했다는 사실과 중국 언론에도 보도된 경위를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조짐을 보이게 되자, 푸트 공사와 사이토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공사는 사이토를 오래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사이토는 좌불 안석이 되어 얼른 떠나고 싶어 합니다. 곧 이어  6월 29일 편지(제 8차 서한)에 이런 대목이 보입니다.
 
"오늘 미국공사에게 저의 후임자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사가 말하기를 '…..요새 윤치호도 다소간 영어를 이해하게 된 모양이니….이젠 별로 당신의 후임을 찾을 필요도 없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각하(이노우에)께서는 앞으로도 얼마 동안 믿을 만한 사람을 미 공사에게 붙여두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는 싶지만, 미 공사의 의중도 이제는 대충 알았고, 미 공사가 타케조에(주한일본공사)와 친밀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도 되었으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또 만일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미 공사의 언동을 우리 외무성 관리가 항상 감시할 수도 없는 것이고 해서 저는 8월 중순쯤 귀국하고자 하오니 승낙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로 보아 애초에 이노우에 외교장관이 자신의 비서 사이토를 통역으로 천거한 것은 푸트 공사 정탐이 그 목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한편 사이토는 미션을 수행하면서도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어했음을 또한 편지는 말해 줍니다. 

사이토는 미 공사가 자신의 정탐질을 눈치 챈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한 시간을 보내면서 촉각을 더욱 곤두세웠던 것 같습니다. 푸트 공사에게 스커더(Charles L. Scudder, 조선이름 司各德)라는 개인 비서가 있었습니다. 사비로  고용한 사람입니다.

사이토는 스커더와 가깝게 지내면서 정보를 은밀히 수집했습니다. 스파이들의 고전적인 수법대로 사이토는 스커더와 술잔을 주고 받으며 허심탄회를 가장한 대화를 주고 받기도 하고 공사관의 비밀 문서에 접근하기도 했습니다. 6월 30일 사이토는 스커더와 사무실에서 주거니 받거니 한 잔 하면서… 그 정황을 7월 3일자 편지(제 11차)가 말해 줍니다.
 
"지난 6월 30일 밤 서기관 스커더와 사무실에서 한잔 했을 때 우연히 시렁위에 놓인 공문을 들춰보았습니다. 지금 공사관에 거주하는 인원을 보고한 내용 증에 '사토우씨는 일본인인데 8월 1일이 지나면 귀국할 겁니다. Mr. Satow is a native of Japan and goes to his home after 1st of August'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이로 볼 때 공사는 가급적 빨리 저를 내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공사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제가 더 이상 여기에 머무는 것은 오히려 대국적 교제를 그리칠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소생은 8월에 군함이든 상선이든 최초의 교통수단이 생기는대로 귀국코자 하오니 승낙해 주시실 바랍니다."

푸트 공사는 사이토를 내보려고 결심을 하였지만 설마 자신이 스파이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죠. 암튼 일본인들 대단하지 않나요? 소설이 아닙니다. 아마 지금도 서울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죠.

태그:#조지 포크, #푸트 공사, #이노우에 , #이홍장 , #묄렌도르프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