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9 07:27최종 업데이트 21.04.29 07:27
  • 본문듣기
시간이 흘러 나이를 많이 먹고 나면, 나는 어떤 노인이 되어 있을까. 어쩌면 아직 중년의 시기도 지나지 않은 나에게 너무 이른 걱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40대가 내게 멀지 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나이대로 여겨진다면 노년은 그저 막연한 시기로만 느껴진다. 그리고 손에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은 다른 어떤 대상보다도 내게 큰 두려움을 안겨준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 그러기도 쉽지만 일단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면 걱정부터 든다. 노인들 역시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쉽게 타자화가 되는 경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노년층은 살아온 시간이 나보다 상대적으로 긴 집단이고 이는 그들을 이해할 단서가 세상에 더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로 여길 때가 많다.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의미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나또한 조금씩 나이 듦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사고의 유연성이 줄어들고 경직된 가치판단을 하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종종 있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사람의 주관은 보다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단단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긴 세월을 살았음에도 아무런 자기 주관이 없다면 그것도 문제다.

하지만 단단한 인식의 틀은 조금만 엇나가도 독선과 아집이 되기 쉽다. 새로운 유형의 세상과 사람들을 이해할 품을 내어주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이런 말을'이라고 생각하며 분해하지만 결국 돌아봤을 때 그건 단순히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였을 때가 많았다. 낯선 말을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분개한 것이다.

벌써부터 이러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사람은 불안해지면 무언가 붙잡을 것을 찾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는 모범적인 인간상이다. 30대로 접어들 때 그렇게 했듯 노년을 생각하면 막연히 불안하니 이상적인 인물을 찾게 된다. 다행히도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배우 윤여정이다.

반짝였던 순간
 

오스카상 수상 소감 말하는 윤여정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오스카상 시상식이 끝난 뒤 주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관에서 특파원단과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며칠 전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을 집중 받게 되었다. 물론 윤여정이 상을 타고 예능에 출연해 인기를 얻기 전부터 윤여정의 행보와 말은 늘 인상적이었다. 스쳐가는 여러가지 장면이 있지만 가장 최근의 것을 돌이켜본다면 윤여정의 초상화 작업을 했던 문성식 작가의 회고가 담긴 인터뷰였다.

2017년 패션지 <바자>의 의뢰로 문성식 작가는 윤여정을 비롯한 다섯 명 배우의 초상화를 그렸다. 자기만의 작품 세계가 견고한 작가답게 문성식의 초상화는 배우들을 사진처럼 그대로 옮기는 대신 개성 있고 독특한 방식으로 화폭에 담았다. 윤여정의 초상화 역시도 실물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배우가 가진 성격이 톡톡 튀게 녹아든 그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남달랐던 것은 이에 대한 모델의 반응이었는데 그림을 본 윤여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성식 작가가 원래 똑같이 그리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자기방식대로 그리는 화가라고, 좋네요."

나 또한 일 때문에 카메라 앞에 설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결과물이 조금이라도 나답지 않아 보이거나 못나게 나왔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촬영자나 편집자에게 불만을 표시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그 사진에 담긴 게 바로 당신이다'라는 작가와 종종 충돌하곤 한다. 그래서 윤여정의 반응에 조금은 놀랐다. 아마추어인 나조차도 이런데 자기 이미지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 배우가 저렇게 담대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곱씹고 나서야 나는 생각의 전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마추어기 때문에 그렇게 반응했고, 윤여정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전문가였기 때문에 달랐던 것이다.

뛰어난 자기 주관 

실제로 윤여정은 초상화 모델이 된 경험에 대해 자신은 피사체가 되는 거고 작가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가 임무를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기본적인 작가와 모델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까먹기를 반복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즉 윤여정은 모델로서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여정이 마냥 수동적인 모델이었냐면 그렇지도 않다. 윤여정은 작가에게 모델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이고 상대방의 임무는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일할 것을 주문했다. 즉 윤여정의 주관은 자신의 일, 자신의 역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확한 통찰 위에 형성되어 있다.

돌이켜보면 윤여정이 그런 모습을 보였던 순간은 정말 많다. 최근의 것부터 돌이켜보자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이후 한국 언론을 대상으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그런 장면이 등장했다. 지금까지 다양한 연기를 했는데 그중에서 <미나리>가 해외에서 사랑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윤여정은 그건 작가가 대본을 잘 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단순히 상찬과 겸손이 담긴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윤여정은 이어서 이런 답을 덧붙인다.

"배우는 자기 파트를, 자기 역할을 받으면 그걸 어떻게 내가 하는가를 열심히 연구하고 그러죠. 영화가 그 다음에 어떤 반응을 일으킬까 그런 건 몰라요."

말하자면 영화가 사랑받는 것에 있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기여와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담긴 셈이다.

불필요한 자의식 없는 솔직함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하는 윤여정 한국의 배우 윤여정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다. ⓒ 오스카 홈페이지 / 연합뉴스

   
인상적인 장면은 또 있다. 영화 <미나리>의 개봉에 맞춰 출연한 SBS의 웹예능 <문명특급>에서 윤여정은 작품에 출연하기를 결심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당시 윤여정의 건강은 그리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미나리>는 출연료가 많기는커녕 사비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윤여정은 왜 그런 영화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먹었을까.

윤여정은 그 이유에 대해 지금 국내에서 작품을 하면 어떤 감독도 자신을 가지고 연출을 하려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는데 그런 환경에 있으면 자신이 괴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환경을 바꿔서 무명이 되는 경험을 해야지만 연기를 통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입증하려 하게 된다고 이야기 했다. 나는 이 또한 윤여정이 입지가 단단한 노년의 배우로서 자기 위치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배우 윤여정을 사랑한다. 우리는 윤여정의 빼어난 연기 실력 때문에 사랑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여정이 보여준 솔직하고 털털한 입담 때문에 좋아하기도 한다. 윤여정은 숨기는 것 없고 거침 없지만 동시에 아주 세련된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윤여정의 말에 단지 그것만 담겨있을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하는 것은 때로 아주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으며 말하는 이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윤여정의 말에는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함이 담겨 있다.

윤여정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노년의 여성이자 그럼에도 문화계에서 연기자로 입지전적 위치에 오른 스스로의 위치를 피하지 않고 성찰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감 없이 파악한다. '내가 윤여정인데,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데'와 같은 불필요한 자의식이 없다. 그래서 관심과 상찬, 더 큰 인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정확하게 스스로가 누구인지 직면하고 파악하는 용기, 윤여정의 솔직함은 여기에 발을 디디고 있기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던지는 처음의 질문. 그래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윤여정처럼 나이가 들 수 있을까. 나 또한 여기에 거품 없이 답을 해보고 싶다. 노력은 하겠지만 솔직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