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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를 가기 전에 잠깐
 
죽령산신당
 죽령산신당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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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는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다. 5번 국도상에 있어 단양에서 죽령을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중앙고속도로가 생겨 이 길의 통행이 뜸해졌다. 그러므로 요즘은 죽령의 북쪽에 있는 산신당이나 보국사지를 찾는 사람 또는 희방사를 찾는 사람만이 이 고개를 넘는다. 죽령옛길을 탐사하고 싶은 사람도 이 길을 넘어야 한다. 4월 마지막주 날씨가 좋아 5번국도로 들어섰다.

단양나들목에서 죽령옛길로 들어서 죽령산신당을 찾았다. 과거에는 산신당 건물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철책을 쳐 놓아 접근을 차단했다. 무속인들이 출입하면서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들여 화재 위험성이 커 그런다고 적혀 있다. 산신당 가는 길에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평지에서는 사과꽃 복숭아꽃이 다 졌는데, 고도가 높은 이곳은 절정이다. 죽령산신당은 차로 접근할 수 있어 편리하지만,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 조심해야 한다.
 
보국사지 죽절문석주
 보국사지 죽절문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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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산신당은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에 있다. 용부원은 죽령을 넘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촌이다. 이곳에 산신당을 지어 치성을 드림으로 해서 마을의 안녕을 빌고, 산을 넘는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산신을 다자구 할머니로 의인화해 친근감을 더했다. 산신당 안에는 죽령산신지위(竹嶺山神之位)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보국사지(輔國寺址)가 있고, 그곳에 장육존상이 있다. 그리고 죽절문 석주가 하나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보국사가 9세기경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아달라이사금 5년(158) 죽령이 열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면, 9세기 이전 절이 창건된 걸로 볼 수도 있다. 보국사는 통상 국가에 도움을 주는 절이라는 뜻이니, 인근 장림역(長林驛), 용부원(用富院)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죽절문석주는 죽령주막에 또 하나가 있다.

희방사 오르는 길에 만난 폭포
 
희방폭포
 희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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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고개를 넘으면 5번 국도는 풍기방향으로 내려간다. 행정구역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다. 이곳에 희방사가 있고, 천문대로 유명한 연화봉이 있다. 희방사는 희방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과거 연화봉으로 오르는 가장 빠른 등산로가 이곳으로 나 있었다. 옛날에는 5번 국도에서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이제는 희방사까지 차도가 나 있다. 일반인들은 희방사매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사야 희방사로 들어갈 수 있다.

주차장에서 200m 거리에 희방폭포가 있고, 그곳에서 다시 200m를 올라가면 희방사가 나온다. 연화봉 가는 산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소백산 희방사 중창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63년 세워진 것으로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安浩相) 박사가 글을 썼다. 한글로 희방사의 역사와 창건주와 중창주들의 업적을 명쾌하게 기술하고 있다.
 
소백산희방사중창기념비
 소백산희방사중창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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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은 국내의 명산이오 희방사는 신라의 고찰이다. 신라시대 두운조사(杜雲祖師)가 창건하였다. 조선시대 철종 때 강월대사(江月大師)가 4동 20여 칸의 당우를 중창했다. 6․25사변으로 <훈민정음 해례본>과 <월인석보> 판목이 소실되었다. 1957년 주지로 있던 담화화상이 절로 오르는 길을 내고 지장전을 중창해 현재 절의 토대를 마련했다. 담화화상은 제3창주로, 파사현정의 신념으로 자타성불과 불국토건설에 매진했다."

희방폭포는 절로 오르다 보면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높이가 28m로 소백산에서 가장 긴 폭포다. 사시사철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져 내린다. 폭포 아래까지는 길이 잘 나 있으나 폭포를 지나 오르는 길이 마땅치 않다. 이에 철계단으로 길을 내고 그 길을 두운로(杜雲路)라 하고, 폭포 위로 다리를 놓아 백운교(白雲橋)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민과 관 그리고 절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해발 700m 높이에 있는 희방사를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희방사에는 동종과 <훈민정음 해례본> 판목이 있다
 
희방사
 희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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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에는 중간에 시내를 경계로 좌우 두 영역으로 나뉜다. 우측에 지장전을 중심으로 한 원래 희방사가 있었다. 1986년 희방사가 조계종에 편입되고 설송 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절의 면모가 일신한다.

시내 좌측에 대웅보전, 종무소, 요사채, 삼성각을 지어 절의 영역을 크게 확장했기 때문이다. 대웅전 앞으로는 강당과 회의실 등으로 사용되는 2층 건물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다. 누각 입구에 소백산 산야초연구회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현재 희방사의 중심전각은 대웅보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셨다. 대웅보전 안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인 동종이 있다. 명문을 통해 1742년(영조 18) 단양군 대흥사(大興寺) 승장(僧匠)인 해철(海哲)과 초부(楚符) 등이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대흥사가 폐사되면서 희방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동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쌍룡이 양쪽으로 지탱하는 용뉴(龍鈕), 연화문 종유(鐘乳), 두 줄의 띠장식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종의 상단 부분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 진언이 새겨져 있다.
 
희방사 동종
 희방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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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월인석보> 판목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복제본 <훈민정음 해례본> 판목만 종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예의(例義)와 해례(解例)로 이루어져 있다. 예의는 훈민정음 제정 취지를 설명한 서문과 28자 발음에 대한 설명과 병서(並書) 합자해(合字解) 규정 등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해례는 제자해(制字解)와 용자례(用字例)로 이뤄져 있다.

<월인석보>는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1447)과 수양대군이 지은 <석보상절>(1447)을 합쳐 1459년 세조가 발간한 책이다. <월인천강지곡>은 부처님의 진리가 온 세상에 두루 비침을 게송 형식으로 노래했다. 부처님의 진리를 상징하는 달은 하나지만, 지상에 있는 천 개의 강에 똑같이 비친다는 뜻이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경전을 인용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월인석보>에서는 앞부분에 <월인천강지곡>을 싣고 뒷부분에 <석보상절>을 실었다. 그러므로 <월인석보>는 조선시대 최초의 한글 불경 또는 훈민정음 대장경이라 말할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 소백산 남쪽의 절과 서원을 답사했다. 봄철 절과 서원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유산을 정리했다. 희방사, 성혈사, 소수서원을 3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태그:#죽령산신당, #보국사지, #희방사, #희방폭포, #희방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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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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