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체르노빌 핵사고 35주년 추모 기자회견이 2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탈핵시민행동 주최로 열렸다.
 체르노빌 핵사고 35주년 추모 기자회견이 26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탈핵시민행동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출과 관련해 일본 내각은 국제적 신뢰를 얻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성가신 일을 처리해버리려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국제사회와 과학계의 우려가 보통이 아닌데도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힘을 빌려 빠르게 처리해버리려 하고 있다.

이 사안과 똑같지는 않지만 일정 정도 비슷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소련 해체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일본 정부의 태도가 상당히 안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경우에 따라 국가 운명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198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냉전질서의 와해, 동유럽 공산권의 상호연대 약화, 소련 정부의 국내외적 영향력 감소에 크게 기인했지만, 1986년 4월 26일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참사에도 어느 정도 기인했다.

이 사고는 인명·환경·재산뿐 아니라 신뢰성 측면에서도 커다란 손실을 남겼다. 진상을 은폐하려는 듯한 태도는 사고 초기부터 소련의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국내외적 영향력까지 감소시켰다.

사고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이틀 뒤인 4월 28일이다. 사고 현장으로부터 약 1600km 떨어진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의 포르스마르크 원자력발전소에서 최초로 감지됐다. 원전 직원들에 대한 일상적인 방사능 검사 도중에 기준치 5배가 넘는 방사능이 작업복에서 검출됐다.

그해 5월 25일 세계평화교수협의회가 발행하는 <광장> 제154호에 실린 강일중 <연합통신> 외신부 기자의 기고문 '체르노빌 사건으로 곤경에 빠진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사실을 보고받은 스웨덴 에너지부는 최근 며칠 동안 남동풍이 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소련 쪽에 시선을 돌리게 됐다.

뒤이어 스웨덴 에너지부는 스톡홀름 주재 소련대사관에 원인 규명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대사관 측은 소련 내에서의 방사능 누출 사고에 대해 전혀 들은 것이 없으나 알아보겠다고 응답한 후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고 위 기고문은 말한다.

스웨덴 정부는 이웃한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소련 내 어느 핵시설에서 사고가 있었음을 확신"하게 됐다. 이에 따라 스웨덴 관리들이 방사능 누출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이 나타난 뒤에야 소련 관영 매체에서 보도가 나왔다. 4월 29일자 <조선일보> 기사 '소(蘇) 원전 방사능 누출 참사'는 "소련의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수도 키예프 지역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 원자로 1기가 손상되고 일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소련의 관영 <타스통신>이 28일 보도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타스통신> 보도 이전에 의혹은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 있었다. 사망자가 3천 명까지 나올 수 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의 7만 명 사망을 초과할 수 있다, 등의 보도도 있었다. 소련이 진상을 신속히 공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추측성 보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결과였다. 서방세계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과장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소련이 신뢰를 얻기 위해 신속히 대처했다면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한껏 악화된 뒤인 29일에야 소련 정부는 사고 사실을 공식 확인하고 사망자가 2명뿐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구체적 자료가 함께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소련의 발표를 얼른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망자 숫자가 새롭게 발표됐지만 그 역시 신뢰성을 얻지 못했다. 사고 8개월 뒤 발행된 12월 27일자 <조선일보> '소 체르노빌 원전 화재'는 "소련은 이 사고로 3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서방 측은 3천 명까지 추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외부 세계는 그나마 3일 뒤부터 참사를 알게 됐지만, 정작 소련 국민들은 여러 날이 더 흐른 뒤에야 진상을 접했다. 위의 강일중 기고문에 따르면, 소련 국민들이 국내 보도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사 열흘 뒤였다. 소련 정부 스스로가 자신의 신뢰성을 한껏 떨어트렸던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해체의 요인 중 하나

체르노빌 참사는 환경 측면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소련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켜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촉진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1989년 1월 31일자 <매일경제> '경제난국 대형재해로 민심 최악'은 "소련의 재정적자는 물론 급격한 개혁 추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예기치 못했던 사건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고 한 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에 따른 복구비"라며 "88년 한 해 동안만도 여기에 1백 26억 달러가 투입됐으며, 89년에도 약 1백억 달러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이 같은 물질적 손실과 더불어 신뢰성 부족 역시 소련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을 철저히 하지 않고 적당히 얼버무리려 한 것이, 소련에 대한 국제적 신뢰도를 떨어트리고 '공산주의는 폐쇄적'라는 관념을 한층 더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소련이 갖고 있던 세계적 영향력은 물론이고 동유럽에 대한 지도력마저 떨어트리는 원인이 됐다.

동시에, 소련 정부가 보다 강한 내부적 저항에 직면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미국과 경쟁하기에도 벅찼던 1980년대 중반의 소련이 자국민들의 한층 강해진 도전에까지 부딪히게 됐던 것이다.

참사 10주년에 즈음해 발행된 1996년 4월 25일자 <조선일보> '체르노빌은 소 민주화 기폭제'는 "침묵을 지키던 민주 재야인사들의 반공 민주화 투쟁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촉발되기 시작했다"며 두 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첫째는 소련 무기화학자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다. "소련 권력의 강요에 밀려 체르노빌 사태가 별 것 아니라고 86년 8월 빈에서 열린 국제원자력기구 회의에서 증언했던 발레리 레가소프 박사는 체르노빌 사태 2주기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자신의 거짓 증언을 속죄했다"고 보도했다.

후쿠시마원전 오염수에 대한 국제적 비판에 맞서고자 IAEA를 이용하는 일본처럼 당시의 소련도 IAEA를 무대로 국제적 비판을 누그러트리고자 했다. 이 때문에 IAEA 회의에 참석했던 레가소프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하게 됐던 것이다.

둘째 사례는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물리학자였지만 핵전쟁 및 소련 체제 반대운동을 벌여 1975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90) 박사다.

위 기사는 "사하로프 박사 배우자의 증언에 따르면 사하로프 박사는 체르노빌 사태의 진실을 알리지 못한 채 정권이 써준 대로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며 "그 이후 진상을 알게 된 사하로프 박사는 양심적 고뇌에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역시 반체제 운동에 나서게 됐다고 위 기사는 보도한다.

소련이 해체되고 탈냉전이 상당 정도 진행된 뒤인 1993년 2월 26일, 미국 프린스턴대학 우드로윌슨 외교정책연구소가 미국과 소련의 전직 관리들을 모아놓고 국제 토론회를 개회했다. 미국에서는 조지 슐츠 전 국무장관과 프랭크 갈루치 전 국방장관, 소련에서는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외무장관과 아나톨리 체르나예프 전 고르바초프 보좌관 등이 토론회에 참여했다.

이 토론회를 보도한 그해 2월 28일자 <한겨레> '미 SDI 추진, 체르노빌 사고가 냉전 종식 이끌어냈다'는 레이건 행정부의 전략방위구상(SDI) 등과 더불어 체르노빌 참사 역시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기여한 여러 원인 중 하나였다는 점이 회의석상에서 논의됐다고 보도했다. 레가노프나 사하로프 사례뿐 아니라 미·소 전직 관리들의 발언을 통해서도 체르노빌 사태와 소련 해체의 연관성이 어느 정도 드러났던 것이다.

원전사고로 인한 피해는 숨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피해가 공중에 영향을 끼치건, 육지에 영향을 끼치건, 해양에 영향을 끼치건 다르지 않다. 숨길 수 없는 그것을 적당히 얼버무리려다 소련은 커다란 손실을 입고 말았다.

보다 큰 다른 원인들이 함께 작용하기는 했지만, 그 같은 태도는 안 그래도 공산권이 약해지던 1980년대 후반에 소련의 해체를 더욱 부채질하는 기능을 했다.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방출과 관련해 국제적 신뢰성을 주지 못하는 일본이 꼭 참고해야 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태그:#후쿠시마원전 오염수,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출, #체르노비 원전, #체르노빌 참사, #구소련 해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