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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새삼 진료받으러 온 노인이 정말 많다고 느껴진 모양이었다.
 딸은 새삼 진료받으러 온 노인이 정말 많다고 느껴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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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이렇게 노인이 많아?"

할머니와 병원을 동행하게 된 딸애가 병원을 가득 채운 노인들 수에 놀랐는지 내게 물어 온다. 동네 의원을 가든, 큰 병원을 가든, 환자의 대부분이 노인으로 채워진 지 이미 오래인데, 새삼 진료받으러 온 노인이 정말 많다고 느껴진 모양이었다.

"늙으면 많이 아픈 법이지. 할머니도 그렇잖아. 게다가 대한민국은 이미 고령화 국가로 진입한 지 오래거든요."

그렇기도 하겠다는 듯, 딸애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한국이 가파른 속도로 고령화 국가로 진입했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실감되게 되는 곳은 단연 병원이다. 이런 현실에서 고령화 국가 하면 떠오르는 심상에 대해 묻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답변을 내놓을까? 추론하건대, '독거노인', '고독사' 등으로 표상되는 외로움과 우울 혹은 공포의 이미지가 아닐까?

해서, 늙음이 노쇠로 연결되는 시름 앞에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노인들의 낙망이 전혀 허언은 아니리라 짐작되지만 그럼에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 또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을 것이다.

특히 먹고 입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 식민지와 전쟁을 혹독하게 겪은 내 어머니 세대에게, 놀라운 테크놀로지로 모든 것이 기똥차게 편리해진 이 세상은, 돈만 있다면 더 누리며 살고 싶은 세상일 수 있지 않겠는가.

병원에서 맞닥뜨린 고령화 사회의 민낯

그런데 이 작지 않은 병원을 그득 채우고 있는 노인 환자들의 면면을 보면, 이 기막히게 좋아진 세상이 '굴러도 좋으니 머물고 싶은 개똥밭'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무엇이든 첨단으로 기술화시키고 있는 IT 강국 한국의 현주소에서, 빈곤한 데다 '디지털 맹'인 노인들은 종종 길을 잃기 때문이다.

햄버거를 주문하는 낯선 기계 앞에서 사용법을 몰라 먹고 싶은 햄버거를 사 먹지 못하고 울며 돌아섰다는 한 노인의 일화가 말해주듯, 노인들에게 테크놀로지가 점령한 세상은 때로 돈이 있어도 굶어야 하는 폭력적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른 시간이라 공항 탑승 카운터에 배치된 직원이 없자, 무인 체크인(Check-in) 기계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서성이던 노인들을 본 이는 나만이 아닐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점령한 세상의 병원 또한 '디지털 이민자' 노인들에겐 전혀 환자 친화적인 곳이 아니다. 병원으로 진입하는 절차부터 내 엄마 정도의 고령자(36년생이다)에겐 험난하기 그지없는 과정이다. 코로나 방역으로 병원의 출입이 엄격해졌다. 미리 전달된 온라인 문진표를 작성해 승인받은 후에야 출입이 허락되는데, 이는 내 엄마 같은 노인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서면으로 도움을 주는 인력이 있긴 하지만, 길게 이어 선 방문자 줄을 뒤로 하고 13개 숫자로 된 자신의 주민등록 번호와 11자리 전화번호를 또렷이 기억해내 민첩하게 기록하는 일은 노인에게 전혀 간단하지 않다.

조력할 이가 동행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쇠약한 노인에겐 병원 입구를 통과하는 것부터 일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1차 관문인 병원 입구를 통과하면 다음은 온라인 접수가 노인을 시험에 들게 한다. 기계에 자신의 13자리 주민등록번호와 11자리 전화번호를 어김없이 입력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재 또한 카드로 척척 해내야 한다.

물론 대면 접수가 있긴 하지만 엄마처럼 걸을 수 없는 노인에게 북적이는 대면 접수창구 또한 구만리만큼이나 멀다. 진료 접수 과정 역시 조력할 이가 없다면 노인이 혼자서 해내기엔 역부족이다. 엄마처럼 연로한 노인이 아니더라도 진료 접수 기계 앞에서 낙담한 표정으로 어찌할 줄 모르고 동동거리는 노인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엄마를 태운 휠체어를 밀고 접수 창구를 지나자니, 역정 난 노인의 거친 푸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접수와 수납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노인들의 반복되는 질문에 같은 대답을 ARS 녹음처럼 재생하느라 진땀 나고 짜증 난 창구 직원의 목소리 또한 날카롭고 높다. 

마스크까지 끼고 의사소통을 하자니 상호 간에 애로가 많은 것이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약자인 노인 환자가 더 딱해 보인다. 이 구역엔 난처함에 처한 노인들을 도울 어떤 인력도 눈에 띄지 않는다.

2차 관문인 온라인 접수 통과 후 진료받을 심장 내과에 와 도착을 알린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진료 접수 창구 또한 소란하다. 자신의 차례가 지났느냐고 묻는 노인의 물음엔 태산 같은 초조함이 스며 있고, 기다리라는 간호사의 답변엔 신경질과 피로가 묻어난다.

늙고 아픈 것도 서러운데 슬슬 의료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갑작스럽게 높아진 혈압으로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러 온 내 엄마를 보고 있자니, '혼자면 어찌했을꼬' 하는 탄식이 절로 새나온다. 돌봐줄 이 없는 건강 약자들의 신산한 처지가 훅 끼쳐온다.

병원의 이곳저곳을 들러 검사를 행한다. 채혈실, 동맥경화 검사실, 심장 초음파실까지, 들르면 어김없이 주민번호를 묻는다. 필요한 절차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노인인 데다 치매 초기 증상까지 발현되고 있는 엄마에게 13자리 숫자를 또박또박 일러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에 주사 바늘을 찔러 넣어 혈액을 채취하다 실패, 다른 팔로 옮겨 찌른다. 아플 텐데 역정은커녕 아프다 소리도 내지 않는 엄마는 검사실을 들어서고 나설 때마다 젊은 의료인에게 깍듯이 인사한다.

마스크를 낀 채 힘든 검사를 마치고 의사에게 진료받은 시간은 단 몇 분. 약을 잘 먹고 두 주간 규칙적인 혈압을 측정 해오라는 의사의 명을 받고 병원을 나선다. 수납을 위해 들른 창구에선 또 실갱이가 오가고 있다.

"우리 아들이 문자로 돈을 보냈다는데 왜 안 해줘"라는 고함 소리. "지난번에 냈는데 왜 돈을 또 내느냐"라고 사납게 따지는 소리. 자신들에겐 억지일 노인들의 고함을 받아내며 스멀스멀 톤이 올라가고 있는 젊은 직원들의 까칠한 대응. 휴...

처방전을 받고 병원을 나서며 마치 명절 때 북적이는 시장 바닥을 헤치고 나오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약을 받기 위해 들러야 하는 약국은 길 건너에만 보인다.

휠체어를 밀고 도로를 지나 도달한 약국, 그런데 문턱엔 휠체어가 쉽게 드나들 수 없게 두터운 턱이 있다. 나 혼자 왔더라면, 잠깐이지만 엄마를 길에 혼자 둬야 하나, 갈등했을 것이다. 학교 수업이 없다고 따라나선 딸애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노인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첨단 의료 테크놀로지'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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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비장애인에겐 무람없는 병원 진료가 어떤 사람들에겐 참으로 고달픈 과정이다. 고령화 시대라 큰일이라고 으름장만 놓을 일이 아니라, 건강 약자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 정부가 좀 더 촘촘한 대책을 내놓았으면 좋겠다. 가족에게, 특히 K-장녀에게 돌봄을 통째로 외주화시키고 있는 정부의 돌봄 없는 복지 정책은 언제까지 여성들에게 빚질 셈인가?

의료 IT를 내세우는 민간의료 시스템 역시 단지 효율을 위한 기계화로서만 첨단 의료가 이루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분명 의료 기술은 진보하고 있다는데, 정작 체감 의료는 전혀 진보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기계로 사람을 대체할 뿐인데, 이게 진정 '환자 친화적인' 변화일까?

수많은 기계 앞에서 망연해지는 노인들, 병원 방문조차 어려운 노인들, 수많은 검사 후 자신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의료 용어로 포장된 진단을 듣고 의문 투성이로 진료실을 나서는 노인들을 뒷전에 두고, 병원의 영리와 의료인의 편리로만 귀결되는 첨단 의료 테크놀로지가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의료 테크놀로지 유토피아가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귀속되는 배타적 지형을 전제한다면, 이미 이 자체로 차별적이고 반인권적이다. 차세대는 바이오 산업이 주도한다느니, 바이오 산업의 약진으로 인류의 불로장생이 실현된다느니, 바이오 기업 주식으로 대박났다느니 횡행하는 '썰'이 내게는 모두 유령처럼 떠도는 '지라시'로만 들린다.

며칠 후엔 몇 개 남지도 않은 이마저 다 상해 이제 틀니를 해야 하는 엄마를 모시고 치과를 가야 한다.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더 참담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엄마의 오늘이 나의 미래일 것이라는 예감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엄마가 내게 그렇게 미안해하는 신세를 나도 똑같이 지게 된다면, 그래서 딸아이가 비슷한 일을 겪어야 한다면, 바이오 신약의 수혜를 입어 오래 산들 무엇하겠는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합니다.


태그:#고령화 사회, #노인 들봄, #돌봄, #의료 기술, #바이오 테크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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