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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종섭(둘째줄 가운데)
 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종섭(둘째줄 가운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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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사무소 토벌작전에 참가하오. 그러니 여성 동무들은 월산으로 가 있으시오."

1950년 10월. 이종섭(1933년생)이 대전에서 '여맹(여성동맹) 간부교육'을 받고 온 직후였다. 그녀는 홍성군 인민위원회와 민청(민주청년연맹) 회원 약 200명이 결성면으로 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서울이 수복됐다는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홍성군청에는 아직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결성면 우익세력이 면사무소를 점거했다는 전갈이 홍성군 인민위원회에 접수됐다. 전체적인 전황(戰況)은 불리했지만 마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민청원들은 무장하고 인민위원회는 비무장한 상태로 결성면사무소 탈환 작전을 펼쳤다. 면사무소를 접수한 결성면 우익세력들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결국 인민위원회에 밀리고 말았다. 당시 결성면사무소에는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이 없었고, 우익세력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결성면 면장을 포함한 우익 인사 상당수가 학살되었고, 민청 등 지방 좌익도 약간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1950년 10월 초의 일이었다.(이종섭의 생전 증언)

결성면사무소 습격사건

결성면사무소 탈환에 성공한 이들이 홍성군으로 오는 도중 대한민국 경찰이 홍성군청과 경찰서를 접수했다는 전갈이 왔다. 경찰과의 전면전은 승산이 없음을 잘 아는 홍성군 인민위원장 전명재는 홍성읍 월산으로의 후퇴를 결정했다. 불과 몇 시간 전 결성면사무소를 탈환한 사기는 사라지고 이제는 대한민국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월산에서는 지도부 긴급회의가 열렸다. "천수만으로 해서 월북합시다." 천수만(淺水灣)은 충청남도에 위치한 남북으로 긴 만으로 동쪽은 서산군, 홍성군, 보령군에 접하고, 북쪽과 서쪽은 태안군의 태안반도와 안면도와 닿았다. 다른 이는 "천수만까지 갈 여력이 있습니까? 인민군 따라 월북합시다." 중구난방하던 중에 "타타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가까이 온 것이다.

전명재 위원장은 "각자 흩어져서 가야산에서 집결합시다. 이후 행로는 그곳에서 정합시다"라고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후 가야산에 집결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이곳에서 홍성군 인민위원회는 3일간 방어선을 구축하고 싸웠지만 결국 패퇴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가 육군 대위와 결혼한 이유

많은 이들이 가야산 현장에서 학살되거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홍성군인민위원장 전명재는 자폭했고, 광천읍인민위원장였던 장인갑은 검거 후 처형되었다. 전명재는 홍성읍의 500석지기 집안의 자제였고, 장인갑은 6.25 당시 홍성군에 두 명밖에 없던 의사 중 한 명으로 광천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강세가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후 장녀 이종섭은 홍성군 여맹 간부를 떠맡게 되었다. 여맹 간부교육을 마치고 난 후 '월산에 가라'는 지시를 받은 이종섭은 이후 월산 인근 마을로 내려왔다가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도피했을 뿐인데 이종섭은 군경에 의해 '빨치산'으로 되어 있었다. 

"사형"이라는 판사의 언도에 이종섭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아버지에 이어 자신도 이렇게 세상과 작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차올랐다. 다행히도 이후 재판에서 무기징역 형으로 감형됐고, 최종적으로는 수감 3년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대전형무소에서 출감한 그녀 앞에는 사회의 싸늘한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대전형무소 간수 소개로 서울 동화백화점(신세계백화점의 전신)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빨갱이 딱지'가 떼어진 것은 아니었다. 홍성경찰서의 감시와 신원조회는 수시로 행해졌다.

이종섭은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작정하고 결혼을 결심했다. 상대는 육군 대위였다. '군인과 결혼하면 경찰이 더이상 괴롭히지 않겠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또 다른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섭이 결혼한 사람이 애 둘 딸린 유부남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2020년에 사망했다.

1950년 10월 2일 홍성군 서부면 청년들은 "국군을 환영하는 모임에 참석해달라"는 갈산면 주민의 부탁을 받았다. 서부면 청년 40~50명이 갈산면 소재지에 도착하고 몇 시간 후 국군이 아니라 홍성읍에서 후퇴해온 지방좌익과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인민군과 지방좌익은 면소재지에서 1.5km 떨어진 꾀꼬리봉으로 옮겨갔다.

그날 밤이 되자 지방좌익들은 산에서 내려와 면소재지에 운집해 있던 서부면·갈산면 청년들을 학살했다. 분주소(지서)·갈산국민학교 인근. 민가 등 마을 여기저기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서부면 상황리 이명구, 이규헌이 갈산국민학교에서 죽창에 찔려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면서기, 소방대장을 한 것이 죄가 되어

홍성내무서(경찰서)에 구금된 이들은 서로 눈만 멀뚱멀뚱 보며 한숨만 쉬었다.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분류된 이들은 경찰,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원, 공무원, 교사, 일반 주민 등이었다.

홍성경찰서 경리계장, 생존자,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군 치하 홍성내무서장은 1950년 9월 26일 오후 9시 30분경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문건 소각, 비당원들의 행동 감시, 정치보위부와 합동작전으로 폭동을 방지하기 위한 체포 공작 등에 관한 회의였다.

다음날인 9월 27일 홍성내무서원 60여 명은 본격적으로 후퇴 준비를 했고, 오후 5시경에는 준비를 완료했다. 그날 밤부터 9월 28일 새벽까지 홍성내무서에 수감돼 있던 80여 명의 우익인사들은 뒷결박을 당한 채 트럭에 실렸다.

트럭은 월산리와 소향리를 향해 출발했다. 홍성읍을 지날 때에는 B29가 폭격하기 시작했다. "끽"하는 소리와 함께 트럭이 멈추자 우익인사들은 이때다 싶어 트럭에서 뛰어 내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자 경계를 서던 인민군과 내무서원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타타탕" 날아간 총알에 뒤통수를 맞아 뒹구는 이, 허벅지가 관통돼 주저앉은 이들이 속출했고, 도망가려던 사람들의 발은 땅에 얼어붙었다.

우익인사들은 다시 트럭에 실려 월산리와 소향리로 갔다. "드드드" "타타탕" 하는 소리와 함께 80여 명의 민간인은 목숨을 잃었다. 학살에는 총뿐만 아니라 칼과 도끼도 동원됐다. 다음 날인 9월 28일 상당수 시신이 수습되었고, 수습되지 못한 20여 구는 현장에 매장됐다.

조한철 집안은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의 대표적인 우익 집안이었다. 조한철은 면서기, 당숙 조병호는 소방대장 겸 국민회 간부, 숙부는 구항면장을 역임했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1950년 8~9월경 밤, 조한철은 사택에서 지방 좌익에게 끌려가 구항분주소에 감금당했다. 조한철보다 먼저 홍성내무서에 수감된 당숙 조병호는 풀려난 뒤 가족들에게 조한철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후에도 조한철이 용봉산 등지에서 학살됐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7월 12일부터 그해 10월 7일까지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된 충남 홍성군 우익인사는 250명에 달한다.(공보처 통계국, 『6.25사변 피살자명부』 / 한국자유총연맹 홍성군지부, 『6.25학살자명단』)

좌·우익 피해자 유족이 결혼, 주례는?

"선생님, 제 결혼식 주례 좀 부탁드립니다." "어. 자네 신부 될 사람은 누구인가?" "박창석씨의 딸입니다" "...."

이종민의 부탁에 김영환을 한참 뜸을 들였지만 마침내 "알겠네"라고 답했다. 김영환(1912년생)은 판검사시험에 합격해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일한, 제5대 국회의원 출신이었다. 그는 4.19혁명 후 무소속으로 충남 홍성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인공 시절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반동인사로 분류돼 홍성내무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트럭에 실려 '죽음의 땅'으로 끌려가던 때에 B29의 폭격이 있었고, 그 와중에 죽기 살기로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김영환에게 주례를 부탁한 이종민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은 이강세의 아들이었다. 그렇기에 김영환은 이종민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주례를 맡게 된 것은 신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신부 아버지 박창석은 홍성군 법원서기였는데 인민군 후퇴시절 지방좌익에 의해 학살당했다. 어찌보면 김영환은 박창석과 동병상련의 입장이었다.

김영환은 신랑 이종민이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와 장인이 정반대 편에 선 '역사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신랑신부는 주례 김영환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이종민은 "아버지와 장인의 신념과 활동은 그분들의 몫이고, 나와 아내는 별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념 갈등을 사랑으로 극복한 것이다.

태그:#결성면사무소 습격사건, #홍성군 인민위원회, #적대세력에 의한사건, #사형, #국군환영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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