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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3세로 한국에서 과거사위원회 일을 한 후 미얀마로 가 그곳에서 출가한 위르겐 김(필명)씨가 현지 사정을 담은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이번이 두번째 글입니다.[편집자말]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이 3월 22일 마궤주(Magway Region) 아웅란(Aung Lan)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이 3월 22일 마궤주(Magway Region) 아웅란(Aung Lan)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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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여기는 처참한 미얀마... 한국인들에게 하나만 부탁드립니다(http://omn.kr/1snfg)

1980년 5월의 광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한국은 시민과 학생들의 힘으로 오랜 투쟁 끝에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광주의 기억은 민주화운동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면서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5월(광주)이 있어 6월(한국의 민주화)이 왔다. 

그러나 내가 사는 미얀마에서는 5월 광주의 비극이 현재진행형이다.

게릴라 시위

'피의 일요일'이라 불린 2월 28일부터 미얀마 군벌은 본격적인 유혈 진압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 후 시민들은 평화 시위조차 아예 못 하게 되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미얀마의 작은 지방 도시(필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도시명은 밝히지 않습니다 - 편집자말)인데 시내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이면 군과 경찰이 즉시 진압에 나서기 때문에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것과 같은 정상적인 시위조차 할 수가 없다.

그 후로도 동네 주민들이 20명 정도 모여 길가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위험을 감지하면 골목으로 도망치는 방식의 게릴라 시위를 벌이는 광경을 종종 봤다. 주변을 살피며 감시자 역할을 하는 주민이 군경이 닥칠 위험을 감지하면 "도망쳐"라고 외친다. 그러면 시위대는 골목으로 흩어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시민들은 지금 어디쯤 군경 차량이 와 있는지 알려준다. 서로 이름도 모르는 시민들 사이에는 미얀마 군벌에 대한 저항심으로 대단한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다.

한동안은 이런 게릴라 시위를 볼 수 있었다. 그러다 군경이 게릴라 시위에도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이마저도 자취를 감추게 됐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진행 중인 미얀마인들이 3월 24일 침묵시위를 벌였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의 모습이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진행 중인 미얀마인들이 3월 24일 침묵시위를 벌였다. 미얀마 최대 도시 양곤의 모습이다.
ⓒ 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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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민들은 군경이 발견하기 어려운 장소에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스님들이 시위를 했더라"라든가 "오늘은 산 위에서 시위를 했더라"라든가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위를 했다가 곧바로 해산했다"라는 말이 퍼졌다.

한번은 시 외곽에 있었는데 시위대가 골목에서 나타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제 군벌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어 군사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인정하게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던 차에 시위대를 보니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시위대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2월 28일 이전에 시위하는 시민들은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도록 얼굴에 마스크를 쓰는 정도였는데 이날 만난 시위대는 안전모와 보안경을 쓰고 드럼통을 잘라 만든 철제 방패를 들고 있었다.

철제 방패는 진압에 맞서 싸울 때 맨 앞에서 군경의 공격을 막아 그 뒤에 있는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군경은 진압할 때 시위대를 겨냥해 실탄은 물론 물대포와 최루탄, 고무탄으로 공격을 한다. 안전모는 공사장에서 쓰는 플라스틱제라 실탄을 막기에는 부족하지만 고무탄 정도는 막을 수 있고 군경이 개머리판으로 가격할 때 머리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쓸모가 있다. 산업 현장에서 쓰는 보안경은 최루탄이 터지고 물대포를 맞을 때 눈을 보호한다.
 
미얀마 몽유와(Monywa) 지역 시민들이 4월 1일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시민이 안전모를 쓰고 있다.
 미얀마 몽유와(Monywa) 지역 시민들이 4월 1일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시민이 안전모를 쓰고 있다.
ⓒ 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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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이 덮칠 때 피해야 하므로 나이 든 사람들은 시위대에서 빠진 것 같았다.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 죽을 각오로 시위에 임해서 그런지 이들은 모두 날이 선 전사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시위대 최후방에 있는 시민들이 나무나 돌 등을 쌓는 광경도 봤다. 처음에는 바리케이드를 쌓고 군경에 맞서려나 보다 했는데 군경 차량이 골목에 들어오는 것을 지연시키기 위한 장애물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잠시 후 시위대를 향해 군경 차량이 달려왔지만 시위대는 그 장애물 덕에 골목에서 빠져 잘 도망친 모양이었다.

내가 사는 도시의 시민들이 정면충돌을 피해 잘 도망치는 이유는 1988년 군벌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에 항거했을 당시 시민들이 용감하게 군경에 맞서 싸우다가 수백 명이 희생됐기 때문이라고 한 노인이 알려주었다.  
 
지난 3월 27일 제76회 국군의 날을 맞아 미얀마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 제76회 국군의 날을 맞아 미얀마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다.
ⓒ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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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을 저항의 날로

지난 3월 27일은 미얀마 '국군의 날'이었다. 전날 미얀마 국영방송 MRTV는 방송을 통해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위협했다. 이런 위협이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국군의 날을 하루 앞두고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미얀마 군벌이 자국민들에게 시위하면 죽는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앰네스티나 미얀마 정치범 지원협회와 같은 미얀마 내외의 인권단체는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시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미얀마 군벌이 저격수를 투입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을 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총을 맞아 목숨을 잃은 시민들의 상당수가 머리에 총을 맞고 숨져 조준사격에 의한 사망자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군벌이 머리와 등에 조준사격을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의혹을 인정한 것이다.

3월 11일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몇 주 동안 SNS에 게재된 50개 이상의 동영상을 분석해 미얀마 군벌의 군경이 지휘관의 명령을 받아 실전용 살상 무기로 비무장 시위대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살해하고 전시 상황에서나 볼 법한 무기와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보고된 사례 중 하나를 보면 미얀마 남쪽 도시 다웨이에서 2월 28일에 촬영된 영상 속 한 군인은 옆에 있는 경찰관에게 소총을 빌려준다. 경찰관이 쭈그려 앉아 조준 사격하자 옆에 있던 경찰관들이 환호한다.

조안 마리너(Joanne Marine) 국제앰네스티 위기 대응 디렉터는 "(이들은) 사람이 죽어도 개의치 않는,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재미로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의 상황이) 보안군과 경찰의 의도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또 미얀마 군벌이 진압의 강도를 의도적으로 높이면서 반자동소총, 경기관총 등 실전용 살상 무기의 사용 명령이 날마다 내려지는 상황을 증폭하고 있다고도 밝혔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인한 '시민 불복종 운동'에 '알파(α) 세대'로 불리는 어린 아이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사진은 4월 11일 만달레이주 모곡시의 모습.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인한 "시민 불복종 운동"에 "알파(α) 세대"로 불리는 어린 아이들까지 참여하고 있다. 사진은 4월 11일 만달레이주 모곡시의 모습.
ⓒ 페이스북 "Myanmar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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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이하 아이들의 희생도 많은데 미얀마 군경이 아이들을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가장 약한 존재인 이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부모들과 이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을 슬픔과 공포에 몰아넣어 군벌에 대한 저항심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하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원래 미얀마의 3월 27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웅산 장군(아웅산 수치 여사의 아버지)의 독립군이 일본군에 선전 포고하면서 저항을 시작한 날이라 '저항의 날' 혹은 '창군 기념일'로 기념돼 왔다.

그러나 미얀마 군벌은 국군의 날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군벌의 위엄과 군사력을 찬양하는 날로 추락시켜 버렸다. 시위를 벌이면 쏘아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군벌에 대한 저항 의사를 미얀마 시민들은 원래 취지에 따라 어떤 형태이든 얼마나 짧은 시간이든 표시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군벌의 끄나풀들

3월 27일에 나는 시내 중심가에 있었는데 모여 있는 사람들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게 됐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시위대인지 약간 헷갈렸는데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보여서 확신했다. 오랜만에 시위대를 발견해 반가운 나머지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사진 찍는 나를 휴대폰으로 찍는 남자가 있었다. 살짝 화가 나서 그에게 다가가 뭐라 하려고 했는데 그는 반대로 나를 보고 "어디서 나왔냐"라며 따졌다. 나를 사복경찰로 생각한 것이다. 

따지는 그 남성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갑자기 슬퍼졌다. 이내 시위대가 나를 에워싸 어디서 나왔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웠다. 다행히 나를 아는 한 여성이  "그 사람은 아니야"라고 말려줘서 거기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실제로 사복경찰이 시민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고 한다. 또 미얀마 군벌의 끄나풀이 시위대에 섞여 동향을 보고한다고 한다.

쿠데타 이후 확실히 시민들의 경계심이 강해졌다. 얼굴 모르는 사람이 동네 골목에 들어오면 주민들이 뚫어지게 쳐다보며 경계심을 감추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2월  12일 미얀마 군벌이 수감 중인 극우 인사 등을 포함해 죄수 2만 3천여 명을 사면해  풀어줬기 때문이다. 그 후 방화 등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사건이 잦아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군벌이 죄수를 풀어 사회로 내보낸 이유를 군벌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시민들을 압박하거나 공격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킨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대와 경찰이 그와 정반대로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사회 불안을 방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복 경찰로 의심받은 날 오후 나는 꺼림칙한 기분이 안 풀린 채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어떤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 몰랐으나 커피숍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알게 됐다. 바로 군경이 쏘아대는 총성이었다.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밖에 무슨 연기도 났다. 주변 사람에게 들어 보니 시민들이 쌓아놓은 바리케이드를 군경이 불태우고 있다고 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인들이 3월 31일 양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인들이 3월 31일 양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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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총소리는 이후 1시간 정도 울렸다. 총성이 들리는 방향에서 젊은이들이 도망쳐 오는 광경을 계속해서 보게 됐다. 군경이 진압하는 장면을 촬영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총성이 끝없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 찍다 보니 떨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이날 내가 사는 곳에서도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희생자가 나왔다. 국군의 날에 군벌이 미얀마 곳곳에서 시위 군중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5세 유아를 포함한 어린이 등 무고한 시민 100명 이상이 학살됐다. 군사쿠데타 발발 두 달 새 하루 희생자 수로는 최대였다.

그러나 군벌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은 낮에 군벌의 위엄과 건재를 과시하려고 열병식을 치르고 밤에 이날을 기념해 불꽃놀이와 파티를 열었다. 파티에 참석한 민 아웅 흘라잉은 화려하게 장식된 흰색 제복을 입고 웃음을 머금은 채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각국 대표, 군벌 인사들과 만찬을 즐겼다.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군 총사령권. 이번 군부 쿠데타로 미얀마 내 최고 권력자가 됐다.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 군 총사령권. 이번 군부 쿠데타로 미얀마 내 최고 권력자가 됐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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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은 원하고 시민들은 두려워 하는 것

미얀마에서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살과 비인도적인 만행 속에서 그것을 접하는 이들의 감각이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것만 같다. 매일매일 희생자 수만 늘어나는 가운데 죽음의 일상화가 진행되면서 이젠 국제 사회의 이목을 끄는 뉴스로서의 가치마저 떨어지는 것 같다.

국제사회가 미얀마의 처참한 상황에 관심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될까. 미얀마 군벌은  그것을 원하고 있고, 미얀마 시민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선 "유엔이 행동에 나서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시체가 필요한가"라는 해시태그(#)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유엔보호책임(R2P)을 발동하기 위해 시체가 더 필요하다면 나를 죽여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노인의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R2P(Responsibility to Rrotect)는 자국민을 집단 학살, 반인륜 범죄, 인종 청소, 전쟁 범죄로부터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에 유엔이 강제조치에 나서도록 한 원칙이다. 즉 한 국가가 집단학살 등으로 자국민 보호에 실패한 경우 국제사회가 책임을 지고 개입해야 한다는 국제규범이다. 2011년 리비아 사태 당시 자국민을 학살하는 카다피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사용된 적이 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인들이 3월 31일 양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는 미얀마인들이 3월 31일 양곤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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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비롯한 온 세계의 관심과 지원 없이는 미얀마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경우, 가령 포스코가 미얀마에서 진행하는 가스전 사업을 중단해 한 해 수천억 원의 돈이 군벌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 군벌의 자금줄을 차단하는 것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제재만으로는 부족하다. 미얀마 군벌은 지난 세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경제제재를 해도 오랫동안 잘 버텨 군사정권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나비 효과

미국의 기상학자인 로렌츠는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일어날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브라질에 사는 나비가 날개를 한번 퍼덕이면 그 대기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영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폭되어 나중에 미국을 강타하는 태풍이 된다는 뜻이다. 나비가 일으키는 바람은 작지만 그 작은 바람을 합해 큰 바람으로 만들면 나중에 태풍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총과 탱크와 전투기로 무장하고 천연자원이라는 든든한 자금줄을 쥐고 있는 미얀마 군벌은 미얀마를 50년 동안이나 지배할 만큼 막강하다. 그렇지만 미얀마 시민과 세계 시민이 조금씩 용기와 아이디어를 내어 나아간다면 그 힘이 합쳐져 언젠가 군벌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15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의 중앙은행 근처에 배치된 장갑차 옆에서 시민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 지지 팻말을 들고 지난 2월 1일 발생한 군부 쿠데타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1.2.15
 15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의 중앙은행 근처에 배치된 장갑차 옆에서 시민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 지지 팻말을 들고 지난 2월 1일 발생한 군부 쿠데타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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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미얀마 시민들에게 지원을 보내는 것은 1980년 광주 시민들에게 지원을 보내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우리 모두 날개를 퍼덕여 머지않은 미래에 미얀마에서도 태풍이 일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태그:#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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