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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 시절의 민경욱(좌측)
 헌병 시절의 민경욱(좌측)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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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신랑 민경철군과 신부 정경자양의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내·외빈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1970년 11월 19일 경기도 김포군(현 김포시) 김포공항예식장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주례가 성혼선언문을 낭독했다.

"여보게, 마당에 전이랑 술 더 갖다주게." 그날 김포군 하성면 마조리 민경철 집은 동생 민경욱의 결혼 잔치를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과 음식, 노랫소리가 밤늦게까지 이어지다가 손님들이 물러가고, 신혼방 불이 꺼졌다. 첫날밤을 구경하려던 이웃집 여성들은 신혼방의 문풍지를 손으로 뚫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새신랑이 고주망태가 돼 잠들었기 때문이다.

"여봐요." 새벽 3시경 신부 정경자가 신랑 민경철의 옆구리를 찔렀다. 잠에서 깬 민경철은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왜 그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요. 얼른 나가 봐요." 신부의 닦달에 민경철이 방문을 나가자 어떤 물체가 경철의 가슴을 쿡 찔렀다. 권총이었다. 어둠 속의 불청객은 경철에게 "당신 공무원 아냐?"라고 물었다. "예, 맞습니다." "그러면 협조해 주시오." 중앙정보부 직원이라고 밝힌 그들은 경철을 도로 방에 들어가게 했다.

어둠 속에서 구둣발 소리가 잠잠해진 후에야 민경철이 밖으로 나가 집안을 살폈다. 그런데 형 민경욱이 연행된 게 아닌가. 형수 이옥임(1927년생)에게 "형수님, 어떻게 된 거예요"라고 물었지만 이옥임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날이 밝자 마을에는 난리가 났다. 민경욱뿐만 아니라 민홍기, 민경성이 간첩죄로 잡혀갔다고 소문이 퍼졌다. 그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신혼부부는 김포면 감정리로 발걸음을 향했다. 신부집에 인사를 하러 가는 신행(新行) 길이었다.

밤사이 새신랑 집에 벌어진 난리를 알 리 없는 신부집에서는 신랑신부를 환한 웃음으로 맞았다. 마을 청년들은 새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발바닥을 때리며 술판을 벌였다. 새신랑 경철의 속은 타들어 갔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부부는 민경철의 직장이 있는 옹진군 연평도 연평초등학교 사택으로 갔다. 배를 타고 가는 부부의 마음은 우울하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택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형수 이옥임마저 연행됐다는 소식이 날라들었다.

손전등 불빛에 놀라 유산

"누구세요?" "...." "누구냐니깐요?" 마루를 조용히 걷던 이는 정경자의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겁에 질린 경자가 방문을 연 순간 그 사람은 손전등을 정경자에게 비추었다. 깜짝 놀란 정경자는 "악" 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놀라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름 아닌 연평초등학교 사택에 같이 사는 여교사로 밤에 화장실을 가려 손전등을 들고 마루를 지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경자는 그녀를 정보기관 사람으로 착각했다.

이 일은 불행으로 번졌다. 당시 정경자는 임신 중이었는데 다음날 산부인과에 가니 아이가 유산됐다는 게 아닌가. 1971년 봄에 일어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왜 정경자는 그렇게까지 놀랐을까?

정경자에게 1950년 10월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의 시기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점령했다가 물러가고 대한민국 군·경이 다시 돌아온 수복기에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 큰아버지를 비롯 집안 사람 6명이 월북했다. 남은 가족들에게도 화가 미쳐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 6명이 부역 혐의로 학살당했다. 그 난리통에 살아남은 이는 정경자 본인과 어머니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찰은 공포의 대상이었고,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은 '빨갱이'라는 말이었다.

거기에다 1970년 11월 19일 결혼식 첫날밤에 시아주버니 민경욱이 간첩죄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으니 기가 막힐 일이었다. 물론 정경자는 남편 민경철의 집안도 전쟁의 상처가 있는지는 모른 채로 결혼을 했다. 이렇다 보니 그날 밤에도 정경자는 남편이나 자기를 잡으러 정보기관에서 사람이 온 걸로 오해했다.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네?" "정말?" 한국전쟁 때 북한군은 의용군에 입대하면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는 말을 퍼트렸다. 그래도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으랴? 당시 김포군 하성면 마조리 인민위원장 민만기의 속은 썩어 문드러졌다. 마조리에서 제1차로 의용군에 입대한 사람은 대부분 민만기 집안 사람이었다. 그의 막냇동생 형기(당시 30세), 사촌동생 완기(25세), 조카 경인(20세), 둘째아들 경찬(19세)이었다.

낙동강 전선이 장기화되면서 의용군 모집은 계속됐고 마조리에도 할당량이 내려왔다. 민만기는 이번에도 자신의 가족부터 보냈고, 나머지는 마을 청년들이 채웠다. 큰아들 경욱(23세)과 사촌 동생 성기, 마을 청년 양〇〇, 황〇〇, 이하윤이었다. 이후 마조리 청년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었다. 휴전이 되면서 형기와 완기는 북에 잔류했고, 경욱과 경인은 북한에서 탈출했다가 국군에게 잡혀 포로수용소로 갔다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민만기의 둘째 아들 경찬은 교전 중 사망했고, 사촌 동생 성기는 행방불명됐다.
  
반공포로가 간첩(?)이 되다

"경욱아!" 큰아들을 부르는 남궁아기의 애끓는 목소리가 하성지서에 퍼졌다. 어머니를 따라 갔던 민경철(1940년생)은 수척한 형의 모습에 울음이 터졌다. 의용군으로 갔던 민경욱은 1953년 8월 반공포로로 석방되었고, 이후 한 달 만에 다시 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논산훈련소와 영천의 헌병학교를 나와 만 40개월을 헌병으로 복무했다. 제대 이후에는 농사에만 전념했고, 마을 이장을 5년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의용군으로 갔다 북에 남았던 민만기의 막냇동생 민형기가 1961년 초 남파됐다. 처음에 그는 처와 아들을 데리고 북으로 올라갔다. 그해 3월 25일 다시 남한에 내려온 민형기는 조카 민경욱을 찾아왔다. 둘이 만난 곳은 일가인 민홍기 집이었다. 

"조카. 남과 북이 갈려있어 남북한 인민의 고통이 크네. 통일사업에 협조하게." "무슨 말씀이에요, 작은아버지?" "주변 군 시설과 몇 가지 정보를 협조해 주게!" 안 된다고 손을 내젖는 민경욱에게 민형기는 막무가내로 무전기와 초단파 핸드토킹, 배터리 등을 떠넘기고 자리를 떴다. 이후에도 숙부 민형기와 몇 차례 만났지만 민경욱은 어떤 정보도 내놓지 않았다. 

그 뒤로 민형기는 다시 남파되지 않았고 땅에 묻힌 무전기도 어느덧 잊혀졌다. 그렇게 9년이 흘러 1970년 11월 중앙정보부가 어떻게 알았는지 민경욱과 민홍기 등을 붙잡아갔다. "너 북에 갔다 왔지?" "아닙니다."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 가입했지?" "...." 민경욱은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당황했다. 하지만 구타와 고문은 없는 사실도 있게 만들었다. 

1971년 12월 28일 치러진 2심 재판에서 서울형사지방법원은 민경욱에게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형을, 민경욱의 처 이옥임에게는 '불고지죄'인 간첩방조죄를 적용해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만남 장소를 제공한 민홍기에게는 징역 7년을 선고했고, 민경성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이후 민홍기는 수사 과정에서 당한 고문 때문에 5년 후 교도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민경욱은 수감된 지 18년 만인 1989년 특사로 석방됐다. 이렇게 해서 민경철의 형과 조카, 집안 식구가 간첩질을 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들이 되었고 수십년 동안 '간첩 집안'으로 낙인 찍혔다. 

38년 만의 재심에서 '무죄' 선고
 
증언자 민경철
 증언자 민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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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재심 청구하세요." "글쎄요. 승소할 수 있을까요?" "판결문을 읽어보면 조작된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2017년 1월 10일 진실화해위원회의 한 조사관은 민경철김포유족회 회장에게 재심을 청구하라고 권했다.

민경철은 조사관이 준 1971년 판결문을 변호사에게 보여줬고 변호사도 재심을 청구하자고 했다. 민경철은 일가를 설득해 재판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9년에 열린 재심에서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민경철의 형 민경욱 등은 38년 만에 간첩 낙인을 벗을 수 있었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 수사관이 민경욱 등을 연행하면서 영장을 제시하지 않았고, 압수 물품(무전기, 배터리 등)이 9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어서 증거능력이 없는 점, 피고인의 자백을 제외한 증거가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전쟁의 고통은 70년 동안 민경철·정경자 부부를 짓눌러 왔다. 그나마 재심으로 그 상처의 일부가 아물었다. 그들의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는 날은 언제일까?

태그:#중앙정보부, #간첩죄, #의용군, #재심,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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