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2 11:27최종 업데이트 21.04.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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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접종 현장에서 춤추는 노인들. ⓒ Publimetro 영상 캡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은 나이 80을 훌쩍 넘겨 내내 집 안에서 칩거하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춤추게 했다. 춤뿐이랴, 노래는 기본이고 신에 대한 감사가 쏟아져 나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소싯적 어지간히 흔들었을 몸의 기억을 소환하여 춤을 추는 모습은 2021년 2월 14일 시작된 멕시코 전국 코로나 바이러스 접종 센터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버렸다.

지난해 12월 23일 오전 9시, 벨기에에서 출발한 화물 운송기가 수도 멕시코시티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례적으로 멕시코 외교부장관이 계류장까지 나가 항공기를 맞았고, 그 순간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백신을 확보한 나라가 되었다. 3000회 분의 적은 양이었지만 멕시코 언론들은 활주로에 착륙해 계류장으로 들어오는 화물기의 움직임을 세세히 쫓아가며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희망', '환희', '행복' 그리고 '구세주' 같은 단어를 넣어 속보를 전했다.
 

지난해 12월 23일 멕시코에 첫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3000회 분이 도착하였다. 당일 외교부장관(사진 앞 줄 좌측으로부터 세 번째, 중앙 선글라스에 감색 상하의)이 공항 계류장에 직접 나가 백신을 받는 의전을 진행했다. ⓒ 멕시코 정부방송

 
그렇게 시작된 멕시코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접종을 위한 국가 프로젝트가 100일을 맞이하고 있다. 2월 14일 이전에는 주로 의료 업무 종사자들과 의료 관련 군 병력에 집중되었기에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것은 약 50일 정도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기다림, 초조, 기대, 불안, 간절함, 흥분, 분노, 기쁨, 환희 등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뒤섞인 한 편의 드라마가 쓰이고 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가 2021년을 이렇게 살아갈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어쩌면 공상이 충분히 가미된 한 편의 영화라 해도 될 만하다.

일반 시민들 중 1차 접종 대상자는 60세 이상이다. 각각 거주하는 지역의 접종 일정에 따라 지정된 접종 장소에서 맞는 방식이다. 대도시의 경우 우리나라로 치면 구(區) 정도 규모로 나뉘고, 소도시나 이하 행정구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접종 구역으로 분류된다. 해당 지역 인구수가 많을 경우 성(姓)의 첫자 알파벳 순서로 나뉘어 보통 사나흘 동안 접종이 진행된다.


접종 일정은 대통령 제안에 따라 같은 행정구역 안에서라도 가장 소외된 지역 우선이다. 각 개인이 미리 인터넷을 통해 접종 신청을 한 후 지정된 접종 일자에 접종에 참여한다는 방침이었으나, 1차 접종 대상인 노인들일수록 인터넷 활용과 서비스에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라, 당일 거주지 정보가 적힌 신분증만 들고 가면 접종이 가능한 방향으로 수정되었다.

농촌지역이나 작은 도시들에서는 비교적 큰 문제없이 접종이 이루어지는데,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서는 백신 접종을 둘러싸고 다소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양상이 전개된다. 백신 접종 일정이 발표되면 접종 개시 사나흘 전부터 사람들이 접종 장소로 몰려 줄을 서기 시작했다.

풍찬노숙하며 줄 선 노인들

접종 대상자가 60세 이상 인구로 한정되니 줄을 서는 사람들 태반이 노인이었다. 게다가 지난 2월 중순 멕시코 곳곳이 여전히 추운 날씨였음에도 수백 명 혹은 지역에 따라서는 천 명 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은 채 줄을 섰다. 줄을 선 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생리적인 문제를 해결했다.

연로하신 분들인지라 혹여 주사 맞길 기다리다 더 큰 병을 얻을까 하여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제발 날밤 새워가며 줄 서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지만, 노숙 중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기다려 백신을 맞겠다는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각 지역 접종 기관에서 줄을 선 사람들에게 번호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접종 대상자가 너무 연로하여 줄을 설 수 없을 경우 직계 가족에 한해서 대신 줄 서는 것이 허락되었다. 번호표를 발급하기 시작하자 이번엔 번호표를 받기 위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연로하신 어르신들 수십만 명이 백신 접종을 위해 줄을 섰다.

이 또한 코로나19 시대 멕시코의 속살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를 믿느니, 나를 믿겠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줄을 서지 말라고 했지만, 유사 이래 대통령의 말이라도 공수표로 날아가 버린 경우가 태반이었으니 도무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혹여 그 말 믿었다간 백신 접종에서 밀리고 말 것이란 두려움이 추위 속 풍찬노숙의 고통을 잊게 했다.
 

백신 접종 중인 멕시코 노인. ⓒ Aristegui Noticias 영상 캡처

 
아니나 다를까,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 위에서 날밤을 지새우던 어르신들의 판단이 이곳 멕시코에서 오랜 시간 몸으로 부대끼며 터득한 연륜 혹은 혜안이었음이 곳곳에서 증명되었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등장이야 말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워낙 비정상적인 상황이기에 그간의 일들과 싸잡아 뭉뚱그릴 순 없지만, 결국 줄을 선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줄을 서지 않고 해당 지역의 접종 일자 프로그램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오랜 시간 살아오신 어른들의 '촉'이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대도시일수록 백신 소진이 빨랐다. 곳곳에서 접종 대상자 성의 알파벳 순서와 상관없이 정해진 시간과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백신이 떨어져 버렸다. 일부 지역에선 사나흘씩 예정된 접종 프로그램이 무색하게도 첫 날 모든 백신이 소진되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국 접종 개시 일자보다 사나흘씩 앞당겨 줄을 서고 노숙하였음에도 그 이전에 줄 선 사람들에 밀려 접종을 받지 못한 경우들이 발생했다. 제2도시 과달라하라의 경우 접종 개시 60시간 전에 이미 1500명 이상이 줄을 섰음에도 그들이 전부 접종 받을 수 없었다. 곳곳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어찌되었든 하루가 멀다 하고 세계 각국에서 생산된 백신들이 도착하고 있으니 여전히 접종을 받지 못한 어르신들도 조만간 접종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진 않는다. 다만 2월 14일부터 1차 접종이 시작되었으니, 그새 접종을 받은 시민들의 2차 접종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백신이 부족한 가운데 1차 접종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섞이게 되면 거기에서도 또 한 번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백신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1차 접종을 받은 사람들이 제때 2차 접종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백신은 노인도 춤추게 한다

내가 사는 마을은 인구 약 2만 7000명 정도의 소도시다. 지난 2월 말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대통령의 제안대로 소읍과 배후지 여덟 개 마을 중 소읍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부터 접종이 시작되었다. 소읍에 해당하는 우리 마을에서는 여덟 개 마을의 접종이 끝난 후 3월 8일, 9일, 10일 3일간 접종이 진행되었다.
 

우리 마을 백신 접종을 알리는 방이 붙었다. 60대 이상이 접종 대상이며,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됨을 알리고 있다. 장소는 마을 연회장이다. ⓒ 림수진

 
마을 연회장에서 진행된 접종에 대상자만 입장이 가능하였고 거동이 불편할 경우 직계 가족이 동행할 수 있었다. 연회장 입구 50미터 전방에서부터 국가방위군이 삼엄한 경계를 섰다. 혹여 백신 탈취에 대한 염려 때문에 멕시코의 모든 백신 접종 장소는 국가 방위군의 경호를 받고 백신 보관 장소도 비밀에 부쳐진다. 백신 운반도 국가 방위군이 전담하며 장거리 운송일 경우 공군기가 투입된다.

접종 첫 날인 3월 8일 오전에 잠깐 어르신들이 줄을 선 것을 제외하면 접종 기간 내내 줄을 서지 않았고 3월 10일 공식적인 접종 일정이 끝난 이후 소량의 백신이 남아 3월 11일 하루 더 연장하여 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도 접종을 허락하였다. 접종 기간 내내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자식들이 휠체어에 태우거나 직접 안고 와 접종하였다. 풍문에 십 수 년 침대에 누워 계시는 우리 마을 꼰챠 할머니도 백신을 맞고 아들이 밀고 나오는 휠체어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하니 우연히 연회장에서 진행된 백신 접종이 마을 어르신들의 잔치였는지도 모르겠다.
 

백신 접종 현장에서 춤추는 노인들. 초록색 모자와 옷을 입고 백신 접종 현장 어디든 슈퍼맨처럼 등장하는 이들은 멕시코시티 곳곳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에어로빅 지도를 하던 'Ponte pila'라는 이름의 그룹 소속이다. '당신 삶에 건전지를 끼우세요' 혹은 '당신 삶을 충전하세요'라는 뜻으로, 백신 접종 현장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들 마음이 지치지 않게 흥을 돋워가며 건전지를 끼워드리고 있다. ⓒ Aristegui Noticias 영상 캡처

 
마침 백신 접종 첫 날 주사를 맞고 온 오스칼 할아버지가 내게 접종증을 보여 주시는데 백신 종류 칸에 시노백(Sinovac)이라 적혀 있었다. 입이 방정이라 나도 모르게 그만 "화이자백신이면 더 좋았을 텐데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와중에도 쏟아진 말을 에두르고자 "3월 접종자까지 화이자 백신을 맞고 4월 접종자부터 중국에서 만들어진 백신을 맞는다"는 내용을 정부가 발표했다고 말씀드렸다.

그 말에 오스칼 할아버지가 당신의 두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건축가로 '성공'한 큰아들하고 농사 짓고 근근이 살아가는 작은 아들 이야기다. 큰아들은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최고급을 가져야 해서 늘 만족을 못하고 좋다 하는 것들을 쫓아다녔고, 둘째 아들은 형이 버린 것들이나 그럭저럭 괜찮겠다 싶을 정도의 물건을 구해 가지고 놀았는데, 당신 눈에 늘 둘째가 행복해 보였고, 지금도 역시나 둘째가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우문에 현답일 수도 있겠으나, 기를 쓰고 필요 이상 혹은 좀 더 좋은 것들을 찾아 헤맬 필요 없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어지간하면 가진 것에, 혹은 가질 수 있는 것에 만족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에서 중국 시노백 백신을 접종한 어르신들 중 문제가 생긴 경우는 한 분도 없었으니 늘 기왕에 가진 것이나 가질 수 있는 것에 만족하는 마을 어르신들의 마음도 한 몫 하지 않았는가 싶다. 매우 비과학적이지만 말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백신 접종이 50일을 넘기고 있으니 초기의 혼란은 어느 정도 수그러지고 있는 듯하다. 2021년 3월 말 현재 멕시코의 백신 접종률은 4.5%다. 정부에서는 올 연말까지 75% 수준까지 백신 접종을 마치겠다고 하지만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 정도 속도라면 2년 이상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어느 쪽을 믿든, 분명한 것은 멕시코에서 백신을 접종하는 일이 점점 더 유쾌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백 명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초조하게 접종을 기다리고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녹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슈퍼맨처럼 등장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전 수도 멕시코시티 곳곳에서 에어로빅을 지도하던 선생님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와중에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었지만, 주사 맞기 전 두렵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마음을 안아 드리기 위해 어디든 달려간다.

무장한 국가방위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 '띠리리리리~~' 조금 방정스럽다 할 만한 카리브 지역 특유의 경쾌한 리듬 쿰비아가 울려 퍼지면 오랜 시간 접종을 기다리며 지쳐 있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일어나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지난했던 지난 1년간의 기억 따윈 훌훌 털어버리고, 왕년의 퀸카 혹은 킹카로 돌아간다.

그러니 이곳 멕시코에서라면, 어찌 백신 접종이 즐겁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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