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1 07:38최종 업데이트 21.04.0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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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버트체'는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여섯 색 무지개를 만들었던 인권활동가 길버트 베이커를 기리며 만들어졌다. 이 알파벳 서체에는 혐오와 배제에 지친 성소수자들이 힘을 얻도록 만들었던 그 무지개가 담겨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20년 길버트체의 정신은 머나먼 거리를 건너 한국에 당도한다. 바로 2020년에 공개된 한글 서체 '길벗체' 이야기다.

이 서체도 성소수자 자긍심의 상징인 여섯 색 무지개를 담고 있다(이후에는 양성애자 자긍심과 트랜스젠더 자긍심을 상징하는 색을 담은 패밀리 서체까지 발표되었다). 그전까지는 없었던 최초의 전면 색상 적용 완성형 한글 서체에 성소수자의 상징이 담긴 셈이다. 
 

길벗체 ⓒ 비온뒤무지개재단

 
또한 길벗체라는 이름에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향한 여정(길)을 함께하는 '벗'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서 길벗체의 의미와 활용범위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이 사회에는 편협한 '정상성'의 기준에서 이탈했다는 이유로 차별 받는 소수자들이 여럿 존재하고 이들 역시도 길벗체가 지향하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실제로 길벗체는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어 왔다. 가령 전국장애인차별철폐 연대는 모든 차별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아 투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판매할 티셔츠에 트랜스젠더 길벗체를 새겼다. 퀴어 유튜브 채널인 큐플래닛의 경우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아시아인 혐오범죄에 반대하며 '#STOP ASIAN HATE'가 담긴 이미지를 길벗체로 만들어 공개하였다.

훼손된 성소수자의 자긍심이 담긴 현수막

이러한 움직임에 정치인들도 함께했다. 신지예 후보가 속한 팀서울은 SNS 계정의 프로필 사진으로 길벗체로 만든 이미지를 활용했다. 미래당의 오태양 후보 역시도 선거 현수막에 길벗체를 사용하고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29일 오태양 후보는 해당 선거 현수막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후보자의 얼굴이나 공약 문구 부위를 찢고 현수막 끈을 자르는 방식으로 훼손되었다고 한다. 또한 오태양 후보에 따르면 선거캠프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가짜뉴스를 전하며 현수막 철거를 요구하는 문자가 전달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단순한 선거방해를 넘어 성소수자 혐오선동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의 상황에 겹쳐지는 사건들이 떠오른다. 2020년 8월 2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맞아 신촌역에 게시되었던 캠페인 광고가 무참히 찢긴 채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광고에는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대학 캠퍼스에 설치된 성소수자 동아리들의 현수막이나 게시물들이 훼손되는 사건들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이 처음이 아닌 것이다.

사실 누군가 시간과 돈을 들여 만든 홍보물을 훼손하는 건 명백한 범죄다. 이런 일은 맹목적인 혐오가 사회규범에 대한 판단력을 뛰어 넘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성소수자를 기피하는 정도로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서울시장 선거, 훼손된 현수막 동성결혼 지원조례 등을 담은 오태양 후보의 현수막이 훼손되어 있다. ⓒ 우인철

       
소수자를 벼랑으로 미는 감정

그리고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위험하다. 나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방치된 깊은 혐오들이 나중에는 어떤 방식으로 분출될까 불안한 마음이 든다. 설마 사람까지 해할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계속해서 현수막만이 목표물로 남을 것인지 완전히 확신하지도 못한다. 성소수자로서 이 사회가 그다지 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구조적·제도적 차별 속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안정감까지 느끼지 못하는 상황은 성소수자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시간 소수자 개인들에게 그런 마음의 짐을 지게 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쓰라린 마음으로 지켜봐왔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깊이와 성격만 다를 뿐 이런 상황이 초래한 '위험'이 반드시 소수자들만의 것일까. 저 정도로 강렬한 혐오를 안고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가령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불의로 촉발된 분노는 혐오와 완전히 성격이 다른 감정이다. 그래서 그 분노는 집회나 시위에서 집단적인 표출이 가능하고 이는 상식적인 행위로 수용되며 변화의 원동력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육성도 아니고 천과 종이에 인쇄된 글자로조차 성소수자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증오는 절대 공공연히 표출될 수 없다. 거기에는 공존을 거부하는 악의와 공격성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건 반사회적이다. 그리고 반사회성이 극단적인 사람은 공동체에서 환영받을 수 없다.

혐오는 위험하다
 

모두를 위해 사회가 나서서 사람들이 혐오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 envatoelements

 
현수막을 찢은 사람들이 직장 동료나 친구, 가족들에게 당당히 자신이 한 일을 말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그러했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들이 그 사람과 같은 부류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을 리 만무하다. 결국 극단적인 혐오는 같은 마음을 공유한 집단 내부에서만 계속 순환하고 다른 곳으로 표출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이런 식의 반사회적인 집단 속에서 생활하는 게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지난 역사를 통해 똑똑히 배워왔다. 한때 악명을 떨쳤던 '일간베스트' 사용자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심신의 차원에서도 혐오는 그리 건강하지 못함을 말하고 싶다. 모든 감정에는 실체가 있다. 이성과 감성, 몸과 정신은 임의적인 구분일 뿐 이 모두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화가 나거나 그래서 몸이 떨리는 경험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강렬한 증오와 악의는 이를 가진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이들이 현수막을 훼손했던 건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방법이 아니고서야 저 정도의 감정을 개인과 집단 외부로 표출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한동안은 속이 시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적인 소통, 인정과 수용이 없는 감정해소는 모두 일시적일 뿐이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이들이 왜 상담사를 찾겠는가. 결국 혐오하는 자들의 삶에 악의와 증오만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해 사회가 나서서 사람들이 혐오를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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