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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위세는 여전하고 이따금 바람이나 먼지가 심한 날도 있지만, 추위는 이제 거의 사라져 걷기 좋은 요즘이다. 여느 때와 같다면 이 계절엔 화사한 봄꽃과 함께하며 눈이 즐거운 걷기를 할 텐데. 제대로 보이는 것 하나 남아 있진 않아도 역사의 흔적이 느껴지는 길을 더듬어 걷는 것 또한 나름 재미가 있다.
 
현재 관철동 5-13번지의 모습
 현재 관철동 5-13번지의 모습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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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인 관철동 5-13번지. 유명 어학원 이름을 단 건물이 높게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이 땅 일부는 60년 전만 해도 관철동 41번지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지번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서류에만 남은 사라진 번지가 되었다. 이 관철동 41번지가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 짧은 여정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곳에서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 오케(Okeh)레코드가 첫 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오케레코드는 1933년 2월에 첫 음반을 발매했으므로,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늦어도 1932년 가을쯤에는 이미 영업을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첫 음반 발매를 알리는 일간지 광고에 오케레코드 주소지로 적혀 있던 곳이 관철동 41번지였다. 일본오케축음기상회 경성 임시영업소가 당시 오케레코드의 정식 명칭이었다.

후발 주자가 '5대 음반회사' 중 하나로
 
1933년 2월에 게재된 오케레코드의 첫 광고
 1933년 2월에 게재된 오케레코드의 첫 광고
ⓒ 매일신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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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전 5대 음반회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케레코드는 경쟁사들이 1928~1932년 사이에 앞서 등장했던 것에 비해 출발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만담가 신불출이 녹음한 코미디 음반 <익살맞은 대머리> 등 첫 발매작들부터 큰 인기를 끌었고 대중가요에서 특히 뛰어난 기획력을 선보였기에, 선발 음반회사들을 빠르게 따라잡기 시작했다.

임시영업소 이름으로 오케레코드의 역사가 시작된 관철동 41번지에서 바로 앞 청계천을 건너 우회전, 서쪽으로 길을 잡아 본다. 얼마 걷지 않아 닿게 되는 광교, 거기서 다시 좌회전을 하면 남대문로로 접어든다. 과거 1930년대 주소로는 남대문통1정목 104번지, 지번 변경·통합을 거쳐 바뀐 주소로는 남대문로1가 100-1번지가 발길을 멈추게 되는 곳이다.
 
남대문통으로 주소 이전을 알리는 오케레코드 광고
 남대문통으로 주소 이전을 알리는 오케레코드 광고
ⓒ 조선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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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매부터 히트를 기록한 오케레코드는 반년쯤 뒤 관철동보다 좀 더 번화한 이곳으로 이사를 했다. 아마 사무실 공간도 훨씬 넓어졌을 것이다. 오케레코드의 이 두 번째 주소는 1933년 7월 광고부터 확인되며, 당시 오케레코드 정식 명칭은 일본오케축음기상회 경성 지점으로 승격(?)되어 있었다. 이후 1941년까지 오케레코드는 이곳에서 도약에 도약을 거듭하며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전설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수 이난영이 오케레코드로 들어왔고, 이듬해에는 고복수도 합류했다. 잡지 <삼천리>가 1935년에 주최한 가수 인기투표에서 고복수와 이난영이 각각 남녀 3위로 선정되었던 것은, 이 무렵 오케레코드가 업계에서 확실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1934년 연말 무렵 오케레코드 남대문통 사옥의 모습
 1934년 연말 무렵 오케레코드 남대문통 사옥의 모습
ⓒ 조선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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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과 고복수의 뒤를 이어 1936년에는 남인수, 김정구, 장세정 등 신진 스타 가수들이 속속 오케레코드에 입사했다. 이렇게 인적 기반이 더욱 충실해짐과 동시에, 1936년 하반기에는 당시 대중음악계의 숙원이었던 상설 녹음실 설치라는 물적 성과도 이루어냈다. 남대문통1정목 104번지는 기존 사무실과 함께 바로 그 녹음실이 들어섰던 곳이기도 하다.

다만, 이러한 진전의 이면에는 일본 자본의 영향 확대라는 문제도 있었다. 녹음실 설치 직후 오케레코드 운영권은 일본 제국축음기주식회사, 즉 데이치쿠레코드로 넘어간 듯하며, 정식 명칭도 1937년 봄 이후 어느 시점부터 제국축음기주식회사 경성 영업소로 바뀌었다. 실질적인 운영에 설립자인 한국인 이철이 여전히 참여하고 있었지만, 대표 격인 영업소장은 일본에서 파견된 데이치쿠레코드 중역이 맡았다.
 
과거 오케레코드 남대문통 사옥 자리로 추정되는 곳의 오늘날 모습. 사진 오른쪽 끝에 보이는 길목 부근으로 추정된다
 과거 오케레코드 남대문통 사옥 자리로 추정되는 곳의 오늘날 모습. 사진 오른쪽 끝에 보이는 길목 부근으로 추정된다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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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대문로에서 과거 오케레코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은행 건물 바로 옆 길목 부근이 지난날 남대문통1정목 104번지로 추정될 뿐이다. 100년 정취를 간직한 채 큰길 맞은편에 서 있는 광통관(1909년 건립, 현재 은행 지점) 건물이 그나마 부근에서 예전 분위기를 전해 주는 유일한 존재일 뿐이다.

1938년에 이화자, 이듬해에 박향림, 그리고 1941년 가을에 백년설까지 스카우트에 성공함에 따라,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오케레코드의 위상은 이제 거의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앞서 본 이난영부터 백년설까지 여덟 명이 바로 1930~1940년대를 대표하는 개인 걸작집 음반 발표 가수들이었다(백년설 걸작집은 이전 소속사였던 태평레코드에서 발매).
 
1942년 무렵 제작된 오케레코드 음반 재킷. 고복수를 제외한 걸작집 가수 일곱 명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고복수는 1940년에 오케레코드를 떠났다
 1942년 무렵 제작된 오케레코드 음반 재킷. 고복수를 제외한 걸작집 가수 일곱 명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고복수는 1940년에 오케레코드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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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지막 걸작집 가수인 백년설이 입사하기 전, 1941년 1월에는 오케레코드 공간에 다시 큰 변화가 생겼다. 남대문통 3층 사옥에 불이 나서 상당한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화재 며칠 뒤 오케레코드는 세 번째 장소로 이전을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몇 걸음 들어간 다옥정 92번지, 광복 이후 바뀐 주소로는 다동 92번지가 새로 옮겨 갈 자리였다. 단, 기존 건물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녹음실까지 완비한 새로운 사옥을 짓기로 결정되었다.

원래 다옥정 92번지에는 데이치쿠레코드 운영 개입 이후 1938년 1월에 이철이 독자적으로 설립한 조선녹음주식회사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때 일종의 자리 맞교환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녹음주식회사는 조선연예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불에 탄 남대문통 건물로 옮기고, 오케레코드는 다옥정 자리에 신사옥 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건축이 진행되는 석 달 남짓 동안은 두 회사가 함께 기존 남대문통 건물을 일단 수리해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다동 92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은 서울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오피스 빌딩이다. 앞서 거쳐 온 관철동이나 남대문로와 마찬가지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이 여기서 오케레코드를 떠올릴 수 있는 그 무엇은 아무것도 없다.

식민지 시기의 그늘이 보이는 오케레코드의 역사 
 
다동 92번지의 현재 모습
 다동 92번지의 현재 모습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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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레코드의 다옥정 신사옥은 1941년 5월 중순쯤 준공되었고, 6월 초에는 성대한 낙성식과 명월관 피로연이 개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반년 뒤에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대중음악계 분위기가 급속히 위축되었고, 3년 뒤 1944년 6월에는 음반 제작이 전면 중단된 가운데 오케레코드를 만들고 이끌어 왔던 이철마저 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남대문통과 다옥정의 두 건물은 광복 이후로도 몇 년간 대중음악 공간으로 사용되었지만, 오케레코드 전설의 역사는 이철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오케레코드나 이철 등 관련 인물들의 활약상에는 어느 정도씩 식민지 시기의 그늘이 끼어 있다. 관철동이나 남대문로, 다동 등 그 흔적이 느껴지는 곳에 그들의 공과를 알리는 간단한 표지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래서 아무래도 부질없을 듯하다.

그저 다음엔 관철동에서 다동까지 걷는 동안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나 하나 만났으면 싶다. 그런 곳이라면 이난영이 부른 노래 <다방의 푸른 꿈>이 쌉쌀한 커피 맛을 돋워 줄 것이다.

태그:#오케레코드, #관철동, #남대문로, #다동, #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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