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건 '종수'다. 작가를 꿈꾸지만, 생계를 위해 택배 일을 하던 종수 앞에 어릴 적 친구인 '해미'가 등장한다. 둘은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지며 다시금 가까워지지만, 해미의 아프리카 여행으로 잠시 떨어지게 된다. 얼마 후, 해미는 정체 모를 인물인 '벤'과 함께 귀국하고 영화는 이들을 향한 종수의 시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버닝>은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세 인물의 모습을 그린 영화다. 세 주인공에게는 각자의 '버닝'이 있다. '종수'의 버닝은 열등감과 박탈감이 섞인 분노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해미가 벤에게 그저 장난감처럼 소비된다. 마땅한 직업 하나 없이 사치를 누리는 벤을 질투하는 동시에 그가 해미의 실종과 연관돼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한다. 벤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종수는 벤에게 최후의 버닝을 결심한다. 해미와 함께 만나자고 벤을 불러내 그를 살해하고, 차와 함께 모든 걸 불태우는 것이다. 물론, 이 자체가 종수의 소설 속 내용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고백한다. 얼마간 주기를 가지고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행위에서 벤은 일종의 희열을 느끼고, 권태로운 일상을 극복한다. 문제는 비닐하우스가 비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단 거다. "해미는 사라졌어요. 연기처럼"이라고 말하는 벤의 말이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해미의 버닝은 앞의 둘보다는 평온해 보인다. 두 남자와 술을 마시던 해미는 홀린 듯이 하늘을 배경으로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 삶이 고픈 사람이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춤이다. 상의를 벗고 자유의 존재가 되어 추는 해미의 춤이 붉은색의 노을을 피워낸다. 해미의 버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세 인물은 저마다 다른 상황에 처해있지만, 나름의 버닝을 통해 삶의 의미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하지만, 버닝을 통해 해결되는 건 없다. 영화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혼란스러운 각 인물의 삶을 전시하고, 관객의 감상을 유도할 뿐이다. 

감독이 관객에게 행하는 마지막 '버닝'
 
<버닝>은 작품의 해석을 오롯이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여느 스릴러 영화가 그렇듯, 의문이 겹겹이 쌓일수록 후반부에 등장할 카타르시스에 대한 기대도 커지지만, <버닝>은 그러한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다. 모든 의문을 방치한 채 상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종수의 분노로 서사를 끝맺을 뿐이다. 이러한 카타르시스의 부재는 자연스레 영화의 연출의도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감독의 연출의도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선, 영화에 내재한 여러 메타포를 잘 살펴봐야 한다. 연출의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은 인물들의 대사다. 특히 춤을 추는 해미를 앞에 두고, 벤이 종수에게 건네는 말이 인상적이다.

"나는 판단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그것(비닐하우스)은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죠. 난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에요. 비가 내린다. 강이 넘친다. 뭔가가 쓸려 내려간다. 비가 무엇을 판단하겠습니까?"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처럼, 이창동 감독은 관객을 '버닝'시킬 뿐이다. 감독은 영화 내에서 사건의 사실관계조차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관객은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비닐하우스처럼 영화를 받아들일 뿐이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관적 감상만이 유일한 변수다. 즉, 중요한 건 결말이 아니라,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느끼는 것이다. 

'종수'에게 더욱 눈길이 가는 이유

<버닝>을 본다는 것은 '청춘의 세 가지 삶'이라는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과정이다. 관객은 이창동 감독에 의해 버닝당함으로써, 청춘의 각 단면을 상징하는 세 인물의 버닝을 감상할 뿐이다. 

무엇보다 종수의 비틀거리는 분노에는 더욱 눈길이 간다. 작가를 꿈꾸면서도, 현실에 묶여있는 모습이 한국 청년의 가장 큰 단면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반면, 벤은 호화로운 일상 속에서 권태를 느끼는 인물이다. 큰 노력 없이 사치를 누리면서도 삶에 만족하지 못해 부도덕을 저지르는 인간, 암울한 현실에 조금씩 누적돼 온 종수의 분노가 비로소 그 대상을 찾았다.

벤이 진짜로 해미를 죽였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버닝>의 핵심은 이 시대의 청춘들이 조금씩 분노를 쌓아가고 있으며, 그 분노가 때로 벤을 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만, 감독의 시선은 여기까지다. 청춘에 대한 공감이지만, '지금의 청춘들이 참으로 힘들고, 분노를 쌓아가고 있구나'라는 무미건조한 시선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인간을 규범 이상으로 그리고, 희극은 인간을 규범 이하로 그린다고 정의했다. <버닝>의 결말은 비극에 가깝지만, 종수는 결코 규범 이상의 인간이 아니다. 해미한테 '창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기도 한다.

종수가 규범 이상의 청년이었다면 영화가 조금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종수의 버닝이 해미를 찾아 나서는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청춘의 '고통스러운 현실'보다는 그것을 견뎌내는 주인공의 '의지'가 빛나기를 기대했다. 아쉽게도 <버닝>의 방점은 종수의 '의지'가 아니라, 답답한 현실에 대한 종수의 '분노'에 찍혔다.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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