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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이맘때였다. 지금은 사라진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기능이 한창 위세를 떨칠 때 연예면의 단골 주인공은 한 아이돌 가수였다. 그녀가 SNS에 뭔갈 올릴 때마다 수십 개의 기사가 따라 올라왔고, 기자들은 '논란'이라는 단어를 곧잘 붙이곤 했다.

아무리 동종업계 종사자라지만 치미는 화를 누를 길이 없어 글 하나를 썼었다. 사실 그걸 빌미 삼아 그를 직접 만나 용기도 북돋아 주고 일련의 상황을 정리해 보고 싶은 욕구 또한 있었음을 고백한다.

2년 뒤 그는 이 세상을 등졌다. 죽음 이후에도 옛 연인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과거에 썼던 내 글을 다시 읽어봤다. '설리가 한국 연예매체를 갖고 노는 법'(http://omn.kr/mjik). 낯이 갑자기 화끈거렸다.

4년 전 그때, 당시 소속사는 "그 글을 그 친구가 좋아했어요"라는 말을 전했다. 그땐 그를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대신 거의 기별을 주고받지 않던 한 여배우가 "기사 잘 봤어요"라는 문자를 보내왔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 1990년생 임지은 작가의 에세이 <연중무휴의 사랑>에 나오는 글을 읽어서다. 
 
꽃 같은 타인들이 자꾸 죽는다. 죽어야 하는 너무 많은 이유보다는 살아야 하는 너무 빈한 이유가 언제나 문제였을 것이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 자신에게 있으니까. 자신으로 살려는 노력을 모조리 흔들어 버리는 부당한 삶에서는 누구라도 살 수 없었다.  (중략)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도 아니었지만 분명한 무엇이었고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지만' 중 p.132, 133

임 작가는 '설명할 길이 없다'라고 했지만, 오히려 난 그의 글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소개하면서도 "'어차피 모두를 못 구하니 너부터 구해. 페미니즘이니 뭐니 가끔은 잊어도 돼'라는 말처럼 페미니즘과 무관해 보이는 말에서 연대할 여분의 힘을 갖게 됐다"고 고백하길 서슴지 않는 글에서 말이다. 

"페미니즘이니 뭐니 가끔은 잊어도 돼" 
 
임지은 <연중무휴의 사랑>
 임지은 <연중무휴의 사랑>
ⓒ SIDE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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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 <연중무휴의 사랑>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페미니즘이다. 제1부 여자 셋만 살았던 집에는, 제2부 머뭇거리는 순간들, 제3부 무해함에 관하여, 제4부 엉성한 사람까지 총 네 부분으로 구성된 책의 상당 분량은 페미니즘을 경유해서 뽑아낸 결과물이다.

그렇다고 빈틈없이 꽉 찬 논리와 결기로 무장했다거나 특정 감정에 호소하는 글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논쟁적일지언정 작가의 글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하고 있으며, 분노할지언정 그것을 타인 혹은 다른 성별에 전가하지 않는다. 모르겠는 건 모르겠다고 하며, 애매한 건 애매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내면을 파고든 결과로 공통의 감각과 연대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됐다고 거의 확신한다. 

성추행 사실이 드러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선 연인과 나눈 대화 일부와 자신의 과거 일화를 전하며 "박원순은 무해하고 싶어서 죽었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파손된 삶에 어떤 책임도 없이 죽었다"고 되뇐다.
 
연인은 몹시 화가 나서는 박원순이 다 알고 그런 일을 해왔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가 이 사안에 그렇게 화내는 사람임에 감사해하며 그 말에 반박했다. 아니야, 정말로 몰랐을 거야. 나는 그 점이 며칠간 내가 느낀 가장 큰 절망이라고 말했다. 안희정이고 박원순이고 그들에게 화환을 보내는 이들이고 전부 제 행동이 여성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사고해본 적조차 없을 거라고도 했다." - '거기 무해하려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중 184p

특히 두 편에 걸쳐 쓴 글 '페미니스트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에서 작가는 현재 연인을 만나기 전과 만난 이후 겪었던 시행착오를 자세히 적어내는 끈기를 발휘한다.
 
황예인 평론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에 따르면 '연애소설이란 사람은 결코 혼자서 성숙할 수 없다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장르'이며 그건 결국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중략) 내게는 통하는 진실이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반하면서 시야를 넓혔고, 그래야만 성숙해질 수 있는 유의 인간이니까. - '페미니스트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하)' 중 69p

어떤 지점에선 '내가 알던 페미니즘이 아닌데' 등의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오히려 작가는 그런 면에선 과감하다. 짧게 머리를 자른 후 어떤 술자리에서 겪은 일을 들며 탈코르셋(화장, 긴 머리, 다이어트 등 사회적 통념에 의해 '여성스러운 것' 정의된 것들을 거부하는 움직임)을 들여다본다.
 
아무튼, 내가 아는 탈코르셋은 자발적이지 않은 꾸밈 노동을 그만두겠다는 선언이었던 반면, 언제부턴가 그와는 좀 다른 게 되어 있는 것도 같아서, 나는 끝없이 궁금해했다.  (중략) 어쩐지 최근 나에겐 '그래야 된다'보다 '그래도 된다'가, '뭐든 할 수 있다'보단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가 중요해진 터였고, 그렇게 내려놓게 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아무렇지 않게 되어버린 것들도 있었다. - '탈코르셋과 페미니스트의 조건' 중 102p
다만 페미니즘이 나의 전부는 아닐 것이고, 내가 누구를 대표하지도 못할 것이므로, 내가 전달하길 바라는 건 단지 이런 것이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도 있다는 것. - 저자 서문 중

"가끔은 이런 게 더 리얼한 게 아닐까요" 

<연중무휴의 사랑>이 와닿았던 가장 큰 이유는 작가가 겪은 실제적 체험에 기반을 둔 글이기 때문이다. 그 체험을 서술하는 방식이 놀랄 만큼 솔직하고 구체적이어서, 내 삶 곳곳에 박힌 부끄럽고 아찔했던, 혹은 너무 아득해 미처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줄소환' 될 정도였다.

작가는 자신이 유년 시절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여성으로서, 그리고 이혼 가정의 딸로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성희롱적 상황, 차별과 장벽을 매우 구체적으로 소개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약자도 약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옳은 답을 내놓을 수 없다면 적어도 임 작가처럼 자신이 온몸으로 밀어 쓴 것과 같은 글을 통해 최선을 다하는 것부터 해봐야 하지 않을지. 

영화 <환상의 빛> <어느 가족>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을 통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아직 그가 영화감독으로 업적을 쌓기 전, TV 다큐멘터리 제작사인 티브이맨 유니온 소속으로 일할 때다.

치매 노인이 운영 중인 가게를 돕기 위해 투입된 한 학생이 인터뷰 중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도와야 하는 가족이 불쌍하다"라고 한 발언을 편집하지 않고 내보냈다가 방송국 프로듀서에게 혼쭐이 난 일화다.
 
'데려간 학생이 열심히 일하고 상대방도 그 학생을 받아들여 서로 감동하는 것 따윈 거짓말이다. 가끔은 이런 학생이 있는 편이 리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상대로 프로듀서는 몹시 화를 냈습니다. (중략) 이야기가 좀 옆길로 새지만 정규 방송이라 해도 1960년,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양상은 좀 다릅니다. 그 예로 떠오르는 작품이 <싸우지 않는 울트라맨>입니다. 사사키 마모루라는 작가가 쓴 울트라맨은 괴수들을 적극적으로 무찌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싸우는 울트라맨을 좋아했고 저도 울트라맨 인형을 가지고 놀 때는 당연히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사사키 마모루가 쓴 에피소드가 방송으로써 제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싸움의 근거가 되는 정의가 없다'는 상황이 어린아이 마음에도 선명하게 느껴졌던 걸까요. -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중 64p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 회고를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임 작가에게 전하고 싶다.

<연중무휴의 사랑>을 빌미로 최진리라는 한 개인의 죽음을 매우 엄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돌아본다. 고인과 아무 친분이 없었을 게 분명한 그 여배우가 내게 보낸 그 메시지 행간엔 이 땅에서 사는 여성으로서 느꼈을 공통의 감각과 어떤 연대의 의지가 담겨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린 참 너무하게도 다양하지만 동시에 시급하지 않은 어떤 이유들로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한 '분별'을 미뤄두고 있는 건 아닌지.

연중무휴의 사랑 - 나와 당신을 감싼 여러 겹의 흔적들

임지은 (지은이), 사이드웨이(2021)


태그:#연중무휴의 사랑, #임지은, #김희철, #최진리,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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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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