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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전주시에 위치한 국민연금공단 본사 모습.
 전북 전주시에 위치한 국민연금공단 본사 모습.
ⓒ 김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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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뇌물 사건의 핵심은 바로 국민연금공단의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찬성이었습니다. 두 회사의 주요주주였던 국민연금이 사실상 합병 여부의 키를 쥔 상황에서 삼성 쪽이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최진실의 개명)씨에 86억원의 뇌물을 건넸고, 합병은 성사됐죠. 두 회사의 합병 비율은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정해졌는데, 이는 제일모직 대주주였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승계받기 위한 '조작'이었다는 의혹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이처럼 정부 혹은 일부 기업의 입맛대로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국민연금 내부에 일종의 견제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공단 내 기금운용본부(아래 기금본부)가 주주권 행사에 있어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도록 이를 감시할 수 있는 기금운용전문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을 국민연금법 시행령에 담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취지와 다르게 올해 삼성전자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전문위원회가 낸 의견을 기금본부가 '패싱'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금운용전문위원회는 분야별로 투자정책전문위, 수탁자책임전문위(아래 수책위), 위험관리·성과보상전문위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금본부의 책임투자 및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는 주요 업무는 수책위의 몫으로 정해져 있죠. 

이번 삼성전자의 정기 주총 안건에는 사외이사 박병국·김종훈, 사내이사 김기남·김현석·고동진의 재선임 건과 사외이사 김선욱의 감사위원 선임 건이 올라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주총일을 7일 앞둔 지난 10일 기금본부는 독단적으로 '찬성' 의결을 결정합니다. 

수책위 노력, 아무 소용 없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상훈 변호사, 홍순탁 회계사 등 수책위원 3인은 15일 이를 수책위에서 논의해 결정하도록 정식 안건을 발의한 뒤 기금본부에 그 사실을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기금본부는 수책위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같은 날 '찬성' 결의를 공시했습니다. 

기금본부의 이같은 행보는 기금운용지침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지침 제17조3 5항에는 의결권 행사의 찬성 또는 반대 등에 대해 판단하기 곤란한 사안 등은 기금본부 분석 등을 거쳐 수책위에서 결정한다고 돼 있습니다. 또 장기적인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판단해 수책위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하는 사안도 수책위에서 결정하도록 돼 있죠. 그런데 수책위원 9명 중 3명이 정식 안건을 발의했음에도 기금본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상훈 변호사는 "통상적인 것은 기금본부에서, 중요한 것은 수책위에서 판단하라는 게 지침의 전반적인 취지인데, 이렇게 이원화된 구조에선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상존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삼성 안건이) 일상적인 것이냐, 중요한 것이냐가 쟁점이었는데, 수책위의 (재적위원 3분의 1인) 3인이 요구한 순간부터는 수책위에서 이에 대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종헌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사무국장은 "기금본부에선 '판단하기 곤란한 사안이 아니었다'는 입장을 얘기하고 있다"며 "지난 15일 찬성 의결이 공시되면서 이 변호사와 홍 회계사는 항의 차원에서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수책위원직을 사퇴했다"고 말했습니다. 

ISS도 삼성 이사 재선임 반대했지만...
 
지난 17일 경기 수원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삼성전자 제52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김기남 대표이사 부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난 17일 경기 수원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삼성전자 제52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김기남 대표이사 부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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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책위원 3인은 왜 삼성전자 이사 선임건에 반대를 했던 것일까요? 우선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에서 이번 삼성전자 쪽 이사 선임 안건에 대해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훈 변호사는 "ISS에서는 재선임 안건에 오른 인물들이 삼성에 대해 제대로 된 감시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반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회사 합병을 위한 뇌물 공여)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이에 대한 재발 방지에 집중하는 것이 사외이사의 주요 역할"이라며 "특히 삼성의 경우 미래전략실(미전실) 등 비선라인이 (승계작업을 주도하는 등) 문제였는데, 그 후속 조직이 삼성 사업지원TF(태스크포스)라는 점이 보도되기도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실제 해당 TF가 미전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 사외이사가 그 조직에 대해 정확히 분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지난 17일 주총에서 재선임이 결정된 박병국·김종훈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으로 선임된 김선욱 사외이사는 2018년 3월 신규 선임됐던 인물들입니다. ISS와 일부 수책위원들은 박 전 대통령 뇌물 사건 이후 이사에 오른 이들이 뚜렷한 성과 없이 '제2의 미전실' 탄생을 방임한 의혹이 있는데도 재선임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봤다는 것입니다.

중요 정보도 공유되지 않았다

또 그동안 기금본부와 수책위 사이에 중요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은 점도 문제라고 이 변호사는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번 ISS의 반대 입장과 관련해서도 요약본만 확인했을 뿐 본 보고서는 공유받지 못했다"며 "다른 의결권 자문기관의 의견서도 거의 대부분 받지 못했다, (수책위원직 사퇴 결정은) 전반적인 문제가 쌓인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시민사회단체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와 관련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현행 기금운용지침을 개정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성명을 내고 "국민연금 기금이 자본의 이해에 충실해 선량한 국민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발생해선 안 된다"며 "그렇기 때문에 기금본부 판단에 대해 국민들이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과정 또한 기금위의 감시와 통제 아래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국민연금 기금 관리를 관장하는)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번 삼성전자의 '사외이사 및 감사 선임' 관련 의결권 행사 과정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며 "또 기금운용지침을 개정해 기금본부가 주요 정보를 수책위에 사전 공유하도록 하고, 수책위에서 경미한 사안으로 분류한 것만 기금본부가 결정하도록 의사결정 구조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변호사도 "국민연금의 경우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수책위가 내부 조직인 기금본부와 별도로 떨어져 있다"며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위원회에서는 외부위원들이 포함된 위원회가 가장 상위에 배치돼 있다, (기금본부-수책위 충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조직 구조를 대폭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조직 변경에는 상당 시간 소요될 것으로 보이므로 우선 기금본부가 정보를 외부와 실시간 공유하는 방향으로 내부 지침을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태그:#국민연금, #삼성, #국정농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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