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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폐지된 낙태죄가 대체할 법안을 마련하지 못해 표류하고 있다. 여성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재생산권, 건강권을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희생적 어머니'의 이미지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한 오늘날에도 여성을 육아와 가사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위험은 증가했고 혐오는 여성을 넘어, 인종, 종교, 성소수자 등 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다. '여성에게 몸은 너무도 큰 문제'라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1976년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의식이 깨어난다는 것은 국경을 건너가는 것과 같지 않다. 한 발 내디디면 다른 나라에 도달하는 그런 일이 아니"(p.48)라고 말했다.

미국 시인이자 페미니즘 사상가로 모든 차별에 맞섰던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집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를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겉표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겉표지.
ⓒ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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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리치는 유대인 병리학자였던 아버지 아널드 리치와 남부 상류층 기독교인이며 콘서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헬렌 리치의 맏딸로 태어났다. 1951년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하고 첫 시집 <세상 바꾸기>로 '예일젊은시인상'을 받았다. 미래가 촉망받는 작가로 주목받았지만 1953년 결혼과 함께 세 명의 아들을 낳아 키우며 '제도로서의 모성'이 드리운 고통을 경험했다.

에이드리언은 1960년대 여성운동을 통해 가부장제의 실체를 깨닫고 레즈비언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삶의 전화점을 맞게 된다. 이후 여성, 레즈비언, 유대인으로서의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종교와 인종, 동성애 등 모든 차별적 시선에 저항하며 목소리를 냈다. 저서로는 <공통 언어를 향한 꿈> <문턱 너머 저편> 등 20여편의 시집과 6권의 산문집이 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주요 에세이를 엮은 산문집이다. '개인적'이고 '고백적'인 산문은 자기 성찰에 대한 은유를 담은 시와 시인의 실천가적 삶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책에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 <피, 빵 그리고 시>, <가능성의 예술> 등 여러 편의 글이 연도순으로 실려 있다. 일련의 글을 통해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글쓰기와 사회 운동으로 확장시켜 간 과정을 더듬어볼 수 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와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경험과 제도로서의 모성>는 여성이자 모성으로 삶을 살아가는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다시 보기로서의 글쓰기>에서 에이드리언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웠던 상황을 지적한다.

남성의 언어로 쓰여진 극단적인 여성의 이미지(어머니 또는 마녀)를 재정의하고 불균형을 깨는 일에 시인의 역할이 있음을, 가부장제의 파괴적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돌리는데 여성의 일이 존재함을 강조한다. <여성으로 태어남에 대하여 : 경험과 제도로서 모성>에서는 '모성'을 다양한 사회와 정치 체제의 핵심으로 보고 남성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제도로서의 모성'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시인의 정체성 탐구는 여성과 모성을 넘어 이성애주의와 인종, 종교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역사적 학문적으로 지워져 왔던 레즈비언 존재와 미국 사회의 동화 정책으로 억압받은 유대인 전통을 살펴본다. <뿌리에서 갈라지다>에는 모성과 여성, 레즈비언이면서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자기 정체성 이해를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시인은 백인과 기독교라는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감추어야 했던 유대인 혈통을 되짚어보며 편견과 차별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삶 깊숙이 침투한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 이성애중심주의가 자신의 삶에 만든 빈 칸을 직시한다.

에이드리언은 현실에 대한 인식과 이를 언어로 바꾸는 일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는 것은 "젠더, 인종, 계급, 성적 지향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인식하고 분석하고 아는 것부터 시작"(p.473)된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현실을 자신의 언어로 이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장악은 주체적인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거기서 변화의 힘이 발생한다.

해방을 위한 실천은 언어의 장악, 주체의 변화라는 역학 속에서 존재해왔다. 시인의 작업이란 존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없어 생각할 수 없는 것 까지를 언어로 표현해내는 일이다. 시는 "현실 속의 보이지 않는 구멍을 통해 길을 낸다."(p.470) 에이드리언에게 시 쓰기는 해방을 위해 현실에 길을 내는 작업이었다.

정체성(성, 인종, 종교, 계급 등)이야말로 정치의 핵심이라고 인식한 시인에게 '개인적인 것과 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은 하나였다. 자신을 향해 던졌던 질문은 사회 정치 문제로 나아간다. 시인은 "어떤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침묵이 깨지고 있는가?"(p.470)에 주목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정치로 확장하고 시를 근본으로 하는 언어의 힘을 알기에 사회 변혁을 위한 작가의 역할을 고민한다.

<나는 왜 국가예술훈장을 거부하는가>를 통해 자본의 논리로 차별을 일삼고 예술을 탄압하는 정부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가능성의 예술>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특히 미국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점을 비판한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 상상력 있는 질문을 만드는데 작가의 역할이 있다고 말한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삶과 글쓰기에 있어 키워드는 정체성과 언어(시)다. 정체성 탐구는 자신과 사회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변화의 목소리를 발화 시키는 힘이 되었다. 특권을 지닌 토큰 여성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레즈비언이자 유대인이라는 외부자의 신분을 명확히 드러냈다. 시인은 내밀한 고백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언어를 벼르고 깎았을 것이다.

그가 낸 용기는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을 끌어내고, 고통 속에 빚어낸 언어는 날카롭게 빛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이들과 소수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에이드리언 리치의 존재는 '길잡이 실(서로에게서 빛을 찾게 하는 실)'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라는 시인의 질문이 우리 앞에 남겨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지은이), 이주혜 (옮긴이), 바다출판사(2020)


태그:#우리죽은자들이깨어날때, #모든차별에맞서, #언어의중요성, #정체성과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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