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21 19:59최종 업데이트 21.03.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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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으로도 불리는 세조는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세종은 장남인 문종을 돕게 하고자 수양대군을 국정에 참여시켰지만, 수양대군은 이를 활용해 세력을 구축한 뒤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형인 문종도 배신하고 아버지 세종도 저버린 셈이다.

그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무능한 왕은 아니었다. 왕조를 튼튼히 했던 그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중앙집권을 강화해 왕조의 통합에 기여했다. 그때까지 덜 통합된 상태였던 함길도를 왕조 안으로 더 가까이 견인했다. 함주와 경성의 비중이 높을 때는 함경도로 불리고, 함주와 길주의 비중이 높을 때는 함길도로 불렸다. 세조가 중앙집권을 추구한 시점은 경성보다는 길주가 더 중요했을 때였다.


이 시기에 여진족이 덜 통합된 상태였다는 점은 수양대군의 쿠데타 이듬해인 1454년 함길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징옥이 대금(大金) 황제를 자처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여진족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킨 그가 여진족 국가인 금나라의 국호를 사용한 것은 그곳이 한민족의 기운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여진족의 기운이 강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독립국' 함길도

이는 중앙정부가 함길도를 다루기가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곳의 독자적 힘이 막강했음을 보여준다. 형식상으로는 조선에 속했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독립적이었던 것이다. 일정 정도는 '함길도 공화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세조는 개혁의 칼을 뽑았다. 중앙집권화를 위해 지방 권력의 축소에 착수했다. 이 개혁이 특히 함길도에 타격이 됐다. 그 때문에 함길도 여론이 들썩이게 됐고, 이런 속에서 세조에게 반기를 드는 인물이 머리를 드러냈다. '이시애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길주 출신인 이시애는 함길도의 독자성을 수호하고자 했다. 그 독자성은 그곳에 여진족이 많다는 점에도 기인했지만, 조선왕조가 제도적 특혜를 많이 줬다는 점에도 기인했다. 1978년 <전북사학> 제2집에 실린 김상오 전북대 교수의 논문 '이시애의 난에 대하여 (상)'는 그 특혜를 이렇게 정리한다.
 
조선 초의 함경도는 야인과 접경한 국방상 요지로서 태조 이래 특수한 행정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지방관으로 하여금 군사 지휘권을 갖게 하였는데, 지방관은 대개 이 지방의 세력가인 토호들을 등용하여 주민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 토호들은 본래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쥐게 되어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세조의 집권(集權) 정치가 강화되기 전에는 이들 토호들은 비록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통제를 받고는 있었으나 어느 정도의 자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같은 독자성에 종지부를 찍고자 세조는 "직전법의 실시 등으로 토호들이 점유하고 있던 토지와 양민을 몰수하였"으며 "지방 출신의 관리들은 해면(解免)하고 대신 남도(南道) 출신의 인사로 교체시켰다"라고 1979년 <전북사학> 제3집에 실린 위 논문 하편은 설명한다.

이로 인해 권력을 상당부분 잃은 토착세력의 반발을 배경으로 이시애가 거병했다. 

그런데 본래 이시애는 조선 왕실과 돈독했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이원경 때부터 이성계 가문과 밀접했다. 몽골(원나라)이 평양에 설치한 동녕부의 권력가였던 이원경은 공민왕의 왕명으로 동녕부 공격에 나선 이성계에게 투항한 뒤 이성계의 측근이 됐다. 이 인연으로 이원경 집안은 조선 건국 뒤 함길도에서 기반을 갖게 됐다.

그래서 이시애는 크게 보면 왕실의 범여권 세력이었다. 그런 인물이 앞장서서 음력으로 세조 13년 5월 10일(양력 1467년 6월 11일) 반기를 들었다. 그가 함길도 병마절도사 강효문을 살해한 사건이 이 난의 시작이었다.

이시애가 그런 역심을 품게 된 것은 어머니 모친상을 당한 이후였다. 그가 8월 12일(양력 9월 10일) 관군에 체포돼 심문을 받을 때에 이 점이 드러났다.

위 날짜 <세조실록>에 따르면 무슨 생각으로 일을 벌였느냐고 묻자 "나는 생각이 없습니다(我無情)"라고 답해 매를 맞은 이시애는 '강효문의 모반을 진압하고 임금의 은혜를 갚고자 거병했다'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런 뒤 "너의 모반은 어느 날 시작됐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 질문에 대해 그는 "나는 처음에는 반역심이 없었습니다"라며 "(강)효문을 죽였을 때 역모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답했다. 반란을 개시한 그 시점에 역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는 매를 맞았다.

그런 뒤 진짜 답변이 나왔다. "내가 모친상 중일 때 역모가 생기기 시작했으니 금년이면 3년째입니다"라고 그는 답했다. 어머니 상을 당해 회령부사 직을 사퇴한 뒤부터 계획을 품었다는 것이다.

관직을 사임한 상태였지만 그는 여느 은퇴자와 달랐다. 관직이 있든 없든 그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이래로 축적된 세력 기반이 든든한 배경이었다.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함길도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궁궐 경호부대의 수문장 교대 의식. 사진은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열린 의식. ⓒ 김종성

 
어느 정도 독자성을 가진 데다가 세조에 대한 반감이 큰 지역이고, 거기다가 유력 토호가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시애는 함길도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남도의 군대가 함길도를 다 죽이려 한다'라는 이시애 진영의 선전전도 지역 여론에 불을 질렀다. 토착 유지들의 행정 자문기구인 각 고을 유향소도 그에게 호응했다. 위의 김상오 논문 하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시애 난에 호응한 자들은 전부 함경도민이며 각 고을의 유향소 품관들과 이시애의 일가 친족들이 중심이 되어 중앙 정부군에 반항하였으며, 관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가한 수도 수만 명이 되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세등등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반란군의 기세보다 중앙군의 기세가 더 셌다. 이때 중앙군에는 유명한 남이 장군도 있었다. 세조가 강하게 육성한 중앙군의 힘을 반란군은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시애는 양력 6월 11일 일어나 9월 10일 체포됐다. 3개월도 못 채운 것이다. 이시애를 체포해 관군에 넘기는 데 가담한 사람도 그의 처조카였다. 이래저래 이시애의 위신은 깎일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는 자기를 응원하는 세력의 기세만 살폈다. 가문이 함길도에서 3대째 권세를 누렸고, 동향 토착세력이 세조에게 반감을 갖고 있으므로 자기에게 승산이 있다고 봤다. 이 점 역시 심문 도중 그의 입에서 나왔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모친상 때부터 역모가 시작됐다'라고 답한 뒤 이시애는 또 한 번 매를 맞았다. 그런 다음 이런 진술이 나왔다.
 
이 도(道)를 근거지로 수년간 병력을 축적한 뒤 경사(京師, 수도)를 곧바로 치고자 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말하는 '수년'은 흔히 2, 3년이었다. 반란을 일으켜 함길도에서 세력을 구축한 뒤 수년 내에 한양을 공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국운 팽창 간과

이 진술에서 드러나는 것은 이시애가 조선사회의 흐름이나 한양 정권의 기운을 충분히 살피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조 정권은 단종 폐위로 정통성에 하자를 안게 됐지만, 이 정권하에서 조선의 국세는 팽창했다. 중앙정부도 세졌고, 중앙군도 강해졌다.

이 시대에 국운이 상승했다는 점은 이시애가 진압된 이듬해인 1468년에 세조가 13년의 재위를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 세조의 아버지에게 세종(世宗)이란 묘호가 부여됐기 때문에 그의 아들에게 세(世)란 묘호(사당 내의 칭호)가 부여되는 게 곤란한데도 그에게 '세'란 글자가 부여됐을 뿐 아니라 세종보다 높은 세조로 결정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망이 멸망시킨 한나라(전한)를 부활시켜 후한을 세운 황제 광무제가 죽은 뒤 세조로 불린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세조란 묘호는 창업의 기틀을 세웠거나 그에 준하는 공적을 남긴 군주에게 부여됐다.

수양대군에게 이 묘호가 부여될 때 조정 내에 이견이 있었다. 세종에게 이미 '세'가 부여됐는데 어떻게 세조란 묘호를 부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이견을 무시하고 세조 묘호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세조의 객관적 업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대에 왕조가 튼튼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시애는 세조 시대의 그 같은 상승 기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기를 응원하는 '함길도 공화국'의 '후배들'만 믿었을 수도 있다. 아군의 기세만 살피고 적군의 기세는 살피지 못했을 수 있다. 그래서 수년 내에 한양 정권을 무너트릴 목표를 세웠을 수도 있다. 관직을 내던지고 대권을 잡고자 거병했지만 3개월도 채우지 못한 것은 그가 라이벌 진영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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