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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되자 법정에서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자들과 변호사가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11일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되자 법정에서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자들과 변호사가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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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이유를 봐야 한다. 전체적으로도, 피해자들에게 분명한 도움이 되는 판례였다."

검찰 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사해 온 박준영 변호사의 말이다. 

앞서 대법원은 부랑자 수용을 명분으로 감금과 강제노역, 암매장 등을 자행한 고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의 무죄 판결을 취소해달라며 검찰이 제기한 비상상고를 지난 11일 기각했다. 박 전 원장의 무죄 판결이 끝내 유지된 셈이다(관련 기사 : 오열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럼에도 박 변호사는 12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기각 판결 이면에 담긴 의의를 강조했다. 박 변호사는 판결의 의의로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조직적 책임이 인정된 점 ▲박 전 원장 혐의의 불법성과 피해 사실을 인정한 점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을 위한 사회공동체의 역할을 명시한 점이다.

[판결] 국가의 책임 명시한 재판부 "노동력 착취 등 묵인·비호했다"

먼저 재판부가 형제복지원 사건이 국가 주도하에 장기간 행해진 불법 행위임을 명시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공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아래는 위 내용이 기재된 판결문의 일부다. 
 
"과거 국가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국가기관의 주도로 건전한 도시 질서를 확립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바 '부랑인'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단속·수용했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의 인권 유린이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재판부는 당시 국가가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전국 30여 개의 이른바 '복지기관'에서 보호 명목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감금하고 이들의 노동력을 불법적으로 착취했음에도 이를 묵인하고 비호했다고 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특정인의 일탈에 의한 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발생된 일이라는 것을 대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국가는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도 아동·장애인을 포함해 의지할 곳 없이 빈곤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부랑인으로 구분해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에서 격리하고, 피고인이 운영하는 형제복지원을 사회복지기관으로 인가해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단속한 부랑인들의 수용을 위탁하고는 피고인이 앞서 본 바와 같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부랑인들을 감금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강제노역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묵인·비호했다."

박 변호사는 이러한 점을 들어 "재판부가 형제복지원 사건의 소멸시효를 사실상 깨부쉈다"고 평가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30년 이상 지난 오래된 사건이라 소멸시효 문제가 생길 수 있었는데, 재판부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조직적인 불법행위로 인정함에 따라 소멸시효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관련 근거로 헌법재판소의 과거 결정례를 들었다. 그는 "앞서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사건의 경우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 남용으로 봐야 한다고 명확히 결정한 바 있다"라며 "이번 형제복지원 사건은 최종심(대법원)에서 국가의 조직적 개입에 대한 규정을 내려줬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개별적 국가배상소송에서는 소멸시효가 쟁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긍정] 재판부의 당부 "구체화된 피해 회복 조치 취해져야"

판결문에는 피해자들이 겪은 참상과 그 심각성도 언급됐다. 재판부는 "이 사건이 갖는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신체의 자유'가 침해됐다는 점보다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됐다는 점"이라며 아래와 같이 적었다.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아무런 힘도 없어서 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더라도 저항하지 못하고, 자기의 불행이 타인의 기분이나 감정에 맡겨진 삶을 살아왔다. 또 '부랑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격리·고립되어 힘이 되어 줄 이웃도 없이 소외된 삶을 살아왔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침해다."

이어 "이러한 인권침해에 관심을 갖고 공적 담론을 거쳐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면서 피해 회복 조치를 위한 몇 가지 당부도 판결문에 적혔다.
 
"국회는 2020.6.9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개정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하고, 정부로 하여금 위 위원회의 활동으로 규명된 진실에 따라 희생자, 피해자 및 유가족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이는 뒤늦게나마 피해 회복의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서 피해 회복의 첫걸음을 내딛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이를 바탕으로 해 더 구체화된 피해 회복 조치가 취해지고, 이를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돼 모두가 바라는 모습으로 사회 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두고 박 변호사는 "판결문에는 재판부의 여러 판단이 언급돼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사회 공동체의 역할과, 향후 진화위 조사가 체계적으로 잘 이뤄져야 한다는 당부도 언급됐다"라며 "(기각에 대한) 아쉬움이 왜 없겠나.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피해자들의 입장과 상황 또한 판결에 상당수 반영됐다"라고 말했다.

[비판] 판결 향한 피할 수 없는 비판... "재판부의 립서비스"
 
 11일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되자 법정에서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11일 서초동 대법원에서 고(故)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되자 법정에서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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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과거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직을 맡았던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 같은 대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재판부가 상세히 설명한 판결 이유도, 이번 판결 결과로 인해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내용의 비판이 언급됐다. 박 변호사와 일부 반대되는 입장이다.

양 변호사는 "대법원이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 특별한 것은 없다"라며 "진화위의 활동에 따라 구체화된 피해 회복 조치가 취해지길 바란다고 언급한 것도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양 변호사는 "(대법원은) 법령적용을 위한 전제 사실과 법령적용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그 논리 뒤에 숨어버렸다"라며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행위가 형법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나 (중략) 이것이 어떻게 법령 적용을 위한 전제 사실을 오인한 경우라 할 수 있나"라고 비판했다.

앞서 재판부는 "원판결에 대한 비상상고 허용 여부는 이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회복 조치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판단돼야 할 문제다"라며 '법적 안정성'을 주요 기각 사유로 제시한 바 있다. 박 전 원장이 받은 무죄 판결이 법 자체를 위반한다고 볼 수 없는 점 등도 기각 사유로 언급됐다. 

양 변호사는 이러한 대법원의 판단을 들어 "(대법원은) 적극적 정의 실현의 주체가 아니라 소극적 방관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다"라며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일갈했다.

태그:#형제복지원, #박준영, #비상상고심,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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