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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미국 유학중 버마(Burma) 유학생들과도 잘 어울려서 '단단진'이라는 여성 버마 유학생을 한국 유학생과 짝을 이루게 하려고 애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 버마인은 성이 없고, 또 버마와 미얀마(Myanmar)의 이름의 유래도 알게 됐습니다. 원래 버마 이전 이름이 미얀마였는데,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버마족의 이름을 따와 버마라고 바꾼 겁니다. 그러니까 '미얀마'에서 '버마'로, 또 '미얀마'로 돌아온 거지요.

'버마'는 미얀마에서 가장 많은 민족인 '버마족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버마족이 약 68%에 달하지만, 무려 135개나 되는 소수민족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민족을 아우른다는 의미로 1988년 미얀마 연방 공화국으로 개칭하고 국기도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미얀마라는 이름은 군부 독재 정권이 민주화를 열망하는 버마인들의 저항을 덮어버리려는 군부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더구나 군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국제사회 여론 때문에 국가명을 변경했는데도 미국에서는 여전히 버마로 부릅니다. 미국 등 여러 나라가 미얀마는 군정부가 임의로 개칭한 국호라 군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버마를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와 '아웅산 수지'를 지지하는 의미로 이 글에서 저도 '미얀마'라 부르지 않고 '버마'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독소조항을 악용한 군부

버마는 5년 전 민주진영 총선 승리로 53년 만에 군부독재를 벗어나 문민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버마 군부가 2021년 2월 1일 새벽 쿠데타를 일으켜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75) 국가 고문 등 정부 고위 인사들을 구금하고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그에 저항하는 버마국민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만든 문민정부는 군부가 겨눈 총구 앞에 5년여 만에 물거품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시 권력을 잡은 군부는 쿠데타 전문가답게 순식간에 문민정부의 장·차관 24명의 직을 박탈하고, 군사정부에서 일할 국방·외무 11개 부처 장관을 새로 지명했으며 언론도 장악했습니다. 국영 TV·라디오방송은 '기술적 문제'로 방송을 할 수 없다며 쿠데타 소식도 전하지 않은 체 군부의 입이 돼버렸습니다. 인터넷과 전화도 끊겨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습니다.

버마군은 TV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킨 당일인 2월 1일 "선거 부정에 대응해 구금조치를 실행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난해 11월 8일 치러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 국가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은 전체 선출 의석 476석 가운데 396석(83.2%)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트럼프처럼 선거 결과를 부정해왔습니다.

유권자 명부에서 860만 명가량이 실제와 차이가 있다는 주장인데, 이는 전체 유권자 3700만 명의 약 23%에 해당합니다. 선거 결과가 뒤바뀔 수는 없는 숫자이긴 하지만 적은 숫자는 아닙니다. 아무튼 군부는 선거 부정을 명분으로 앞세우지만, 근본 원인은 기득권을 내려놓기 싫은 군부의 사리사욕과 불완전한 버마의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예고된 사태입니다.

지난해 2020년 11월 8일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아웅산 수지 정부는 2015년에 이은 2기 문민 정권입니다. 2015년 총선에서도 대승을 거둬 53년 만에 군부독재를 종식한 데 이어 또 버마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겁니다. 정권을 재창출했지만, 군부정권이 2008년 만든 신헌법안의 독소조항 때문에 문민정부와 군부는 불편한 동거를 이어왔습니다. 그 신헌법안의 독소조항이 바로 불완전한 버마의 민주주의였던 겁니다.

신헌법안의 독소조항은 군부에 상·하원 의석의 25%가 할당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방부·내무부·국경경비대 등 주요 3개 부처 장관 지명권도 군부에 있습니다. 치안 및 안보, 국방 관련 등 실질적인 권력은 군부가 장악하고 있고 비상사태 때는 군부가 정권을 넘겨받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돼 있습니다. 군부가 선거 부정 운운하는 이유를 앞세워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도 이 신헌법안의 독소조항을 악용한 것입니다.

아웅산 수지 문민정부가 멍청해서 그동안 신헌법안의 독소조항을 개정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헌법 개정 시엔 필요한 찬성표가 75%가 돼야 하는데 의회 의석의 25%를 군부가 쥐고 있으니 개헌은 원천봉쇄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사실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 유신헌법 같은 신헌법 개헌이 추진돼왔기 때문입니다.

아웅산 수지 고문은 지난 총선에서 군부에 할당된 의석수를 15년에 걸쳐 줄인다는 계획이 담긴 개헌안을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아웅산 수지 국가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작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문민정부 2기가 탄생하자 기득권을 뺏기게 생긴 군부가 결국 구실을 만들어 총을 들어 기득권 수호에 나선 겁니다.

감금된 아웅산 수지 고문이 성명을 통해 국민에게 쿠데타를 거부하고 항의 시위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이 성명은 이미 군부의 기득권 수호 쿠데타를 예견하고 감금될 경우 국민들에게 발표하도록 사전에 준비했다고 합니다. 2015년 총선에서 NLD가 승리했지만 아웅산 수지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습니다. 군부가 신헌법에 아웅산 수지를 집어넣은 또 다른 독소조항 때문입니다.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조항입니다. 그래서 2016년 NLD의 대통령 후보인 틴초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이후 아웅산 수지는 군부의 속셈대로 비판을 받게 됩니다. 헌법에도 없는 국가 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대통령 위에 군림했다며 헌법 유린의 주범이라고 말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아웅산 수지 고문은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차별과 박해 그리고 버마군에 의한 인종청소를 묵인 또는 동조했다는 비난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여러 도시가 그의 명예시민 자격을 철회했고 한국의 광주시 역시 광주 인권상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아웅산 수지 고문이 만약 군부의 로힝야족 학살에 대해 강경한 반대를 했다면, 그 구실로 군부 쿠데타는 로힝야족 학살과 함께 버마인 학살로 앞당겨졌을 겁니다.

주변국 입장은... 자국 이익 앞에서 겉치장에 불과한 민주주의

이번 버마 군부 쿠데타를 많은 나라가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영국, 호주, 유럽 등 서방의 각국이 아웅산 수지 고문 등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면서 규탄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각국의 입장에 따라 공식 반응이 갈리고 있습니다.

버마 최대 무역 파트너로 버마에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는 중국은 "버마 각 측이 헌법과 법률의 틀에서 갈등을 적절히 처리하면서 안정을 수호해야 한다"라는 짤막한 논평을 냈습니다. 중국의 영향력에 맞서고 있는 인도 역시 비난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철권 통치자들이 이끄는 태국,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도 버마 국내 문제라면서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자국의 이익 앞에서 민주주의는 겉치장에 불과합니다.

버마인의 이름에는 성씨가 따로 없습니다. 이름만 있고 그 이름마저도 본인 마음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웅산 수지' 고문의 이름에서 '아웅산'은 버마의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자신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고, '수지'는 '모으다'는 뜻의 '수'와 '맑다'라는 뜻의 '지'를 합친 말입니다. 영국에 유학할 때 서류에 성씨가 필요해서 아버지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지은 겁니다.

한글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버마어 이름이므로 음절 단위로 끊어서 '아웅 산 수 치'로 표기합니다. 하지만 '수치'라는 말이 한국어에서 '수치스럽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된 아웅산 수지 고문은 수지 혹은 수찌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저도 이글에서 '아웅산 수지'로 표기합니다.

'아웅산'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1983년 10월 9일 버마에서 발생한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입니다. 당시 버마의 군사독재를 배우기 위해 방문 중이던 독재자 전두환을 암살하려던 북한의 폭탄테러로 죽어야 할 전두환은 안 죽고 대신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등 한국 정부 수행원 17명이 사망했습니다.

아웅산 수지의 75년 인생역정도 만만치 않습니다. 1945년 버마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2살 때 부친이 암살당하자 인도와 영국에서 성장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고 뉴욕 유엔본부에서 일하다가 1972년 영국인 마이클 에엉리스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평범한 주부로 살던 아웅산 수지는 1988년 4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에 버마에 왔다가 인생이 뒤바뀌었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 학생, 승려들이 군대 총칼에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해 8월 그녀는 50여만 명이 운집한 양곤에서 유명한 연설 '공포로부터의 자유'로 버마 민주화의 상징이 됐습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명연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부패한 권력은 권력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를 부패시키고, 권력의 채찍에 대한 공포는 거기에 복종하는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귀국한 이듬해인 1989년부터 15년간 아웅산 수지는 군정에 의해 가택 연금돼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1990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정권 이양을 거부했습니다. 1991년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에 선정됐지만 가택 연금상태라 남편과 두 아들이 대신 수상했습니다.

아웅산 수지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직접 평화상 수락 연설을 한 건 21년 뒤인 2012년입니다. 1995년 처음 석방됐지만 여러 차례 석방과 가택 연금을 오간 끝에 15년만인 2010년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그동안 광주시를 비롯한 여러 나라는 수많은 인권상과 명예 시민권을 아웅산 수지에게 주었고, 버마 국민들은 '아메이 수(어머니 수지)'라 부르며 사랑을 선사했습니다.

상황을 왜곡하는 흐름들

양곤 시청 청사와 주요 도시에는 군인들이 배치됐고 시민들은 시장으로 달려가 쌀, 컵라면, 기름 등을 사재기하고 있습니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는 돈을 뽑으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고 은행들은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버마 내 모든 여객기 운항도 중단됐습니다. 양곤 국제공항이 5월까지 폐쇄된다고 합니다.

버마 군부는 일단 1년간 비상사태를 선언했고 1년이 지나면 새로운 총선을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군부가 계엄령 등 강력한 압제로 여론과 민의를 막을 경우 새 총선이 민주적으로 치러지기 어려워 보입니다. 또한 군부는 나라 안정을 핑계로 다시 무력을 사용해 탄압해 군부독재를 이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등 세계 각국으로 이민을 한 버마 국민들은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국제사회가 개입하면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으로 발전할 수가 있어서 더 큰 희생이 발생할 겁니다. 몇 주 전 <뉴욕타임스> 팟캐스트를 시작으로 아웅산 수지가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버마 쿠데타 주동자 민 아웅 흘라잉(Min Aung Hlaing) 장군을 무시한 채 대화조차 없었다는 격하 발언과 함께 은근슬쩍 쿠데타 옹호 발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버마 친구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정반대입니다. 아웅산 수지 고문은 사소한 일까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상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합니다. 심지어 외무장관인 아웅산 수지 고문의 외교업무조차 무시한 채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중국 주석과 인도 대통령과 회담하며 마치 버마의 실권자인 양 행세할 때도 조심스럽게 지켜보기만 했다고 합니다.
 
쿠데타 이전부터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은 실권자인양 중국을 방문하여 국가수반처럼 시진핑 주석과 회담하는 등 권력욕을 보여왔다.
▲ 시진핑 중국주석과 회담하는 민 아웅 흘라잉 장군 쿠데타 이전부터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은 실권자인양 중국을 방문하여 국가수반처럼 시진핑 주석과 회담하는 등 권력욕을 보여왔다.
ⓒ 신화망 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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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이전 실권자 인양 인도를 방문하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수상(사진 오른쪽)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민 아웅 흘라잉 장군.
▲ 나렌드라 모디 인도 수상과 민 아웅 흘라잉 장군 쿠데타 이전 실권자 인양 인도를 방문하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수상(사진 오른쪽)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는 민 아웅 흘라잉 장군.
ⓒ 인도수상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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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인터넷에서 아웅산 수지 국가 고문과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의 관계를 보도한 뉴스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뉴욕타임스> 팟캐스트 내용과는 정반대로 아웅산 수지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한 내용과 사진들이 검색됐습니다. 그 사진 몇 장을 참고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뉴욕타임스의 팟캐스트 보도 내용과는 정반대로 아웅산 수지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 한 내용을 보도한 '미얀마 타임스'.
▲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아웅산 수지 고문  뉴욕타임스의 팟캐스트 보도 내용과는 정반대로 아웅산 수지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시도 한 내용을 보도한 "미얀마 타임스".
ⓒ 미얀마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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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 수지 고문이 사소한 일까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상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군부를 종식시키려고 노력했던 내용을 보도 한 미얀마타임스 보도.
▲ 아웅산 수지 고문과 민 아웅 흘라잉 장군 아웅산 수지 고문이 사소한 일까지 민 아웅 흘라잉 장군과 상의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군부를 종식시키려고 노력했던 내용을 보도 한 미얀마타임스 보도.
ⓒ 미얀마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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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군부는 세계가 온라인 민주세계를 영위하는 2021년 2월 1일 세계 인류를 조롱하듯 쿠데타를 감행하고 항의하는 버마국민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이번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로 발걸음을 띈 버마의 민 아웅 흘라잉도 어쩌면 독재자 전두환이 처벌받지 않은 채 대를 이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안도하며 총질을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2021년에도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사실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예고하고 있습니다.

#SaveMyanmar

태그:#민 아웅 흘라잉, #아웅산 수지, #버마, #버마 쿠데타, #미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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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 근무하다 버지니아텍에서 농공학을, 브라운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했으며 노스이스턴 공대 환경공학석사와 로드아일랜드대학 토목환경공학박사를 취득했다. 플로리다주 리 카운티 공무원을 시작으로 미연방공무원으로 국방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다. 2003년 한국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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