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3.11 07:43최종 업데이트 21.06.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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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제출했던 사직서. ⓒ 홍현진


9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떠나던 날, 퇴사의 변을 길게 적은 사직서를 본부장에게 제출했다. 본부장은 사직서를 사내 게시판에 올리면 어떻겠냐고 했다. 전 직원이 볼 수 있도록. 
 
'믿을 수 없는 사람, 불안정한 사람. 저렇게까지 힘들게 회사를 다녀야 할까...' 아이를 낳기 전, 직장맘 선배들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떠올랐다. 아마 여자 후배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지 모른다. 내 모습이 바로 본인들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면서.

…(중략)...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나 혼자만 죽도록 노력하면 되는 걸까. 그보다는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롤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후배들은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과 육아를 함께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중략)… 어떻게 하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까. 퇴사를 하면 답이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그저 버티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겠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 2018년 제출한 사직서 중에서

그저 '애 때문에' 그만둔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구성원들에게 일-가정 양립이 어려운 현실을 알리고 싶었다. 회사 밖에서 새로운 롤모델을 만들겠다는 선언적 의미도 있었다. 개인 브런치에도 사직서를 공개했고 1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3년이 지났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았을까. 

롤모델을 찾아서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가장 답답한 건 롤모델의 부재였다. 아이는 이제 갓 두 돌. 양육자의 손을 한창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질까. 회사에 있는 다른 선배 워킹맘들의 삶은 나만큼이나 고되 보였다. 막막하고 캄캄했다.  

기자 일은 보람도 있었고 성취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힘겹게 버틸 일일까 묻는다면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퇴사를 고민하다가도 회사 밖으로 나가는 순간 커리어가 끝장날 것 같았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죽도록 버티고 싶지도, 이렇게 버티고 버티다 일터에서 사라지고 싶지도 않은데. 일과 육아는 제로섬 게임 같았다. 

퇴사해서도 계속 롤모델을 찾아 헤맸다. 동료들과 엄마들을 위한 온라인 매거진 <마더티브>를 창간하고 사업화를 고민했다. '엄마계의 <디에디트>', '엄마계의 <닷페이스>'가 되겠다며(물론 디에디트와 닷페이스는 우리 존재를 전혀 몰랐겠지만) 아이 말고 엄마를 위한 미디어 스타트업을 꿈꾸던 것도 잠시. 수족구, A형 독감, B형 독감, 뇌수막염, 폐렴, 어린이집 방학… 모두 엄마인 구성원들의 아이들에게는 돌림 노래처럼 변수가 찾아왔다. 

창업하면 모든 시간과 열정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데. 아이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면 서둘러 일을 끝내야 했다. 주말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일의 흐름이 뚝뚝 끊겼다. 그렇다고 아이를 충실히 돌보는 것도 아니었다. 몸은 가족과 있는데 머릿속은 일로 가득차 있었다. 자꾸만 조바심이 났다. 일도 육아도 이도 저도 아닌 상황. 심지어 돈도 언제 벌 수 있을지 막막했다. 패잔병이 된 심정으로 다시 회사 인간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직장인 성수동 소셜벤처 업계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일하는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수년간 경력공백을 겪었다 재취업해 유연근무를 하는 엄마, 나처럼 창업을 시도했다 혹은 실제로 창업까지 했다 그만두고 다시 직장에 다니는 엄마, 직접 회사를 창업해 엄마도 일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엄마... 세상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일을 만들어 가고 있는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잔잔해서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뿌옇기만 하던 세상이 처음으로 조금씩 밝아졌다.  

'다들 애 키우면서 어떻게 일하는 걸까.' 더 많은 엄마의 일 서사가 궁금했다. 에디터 인성과 함께 사이드 프로젝트로 <마더티브> 활동을 이어가며 <포포포 매거진>과 '마티포포'라는 팀을 결성해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아래 <내 일 안내서>) 인터뷰 프로젝트 작업을 시작했다. 

100명의 엄마, 100개의 서사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 확장판 인터뷰집. 현재 텀블벅 펀딩 중이다. ⓒ 마티포포


"100명의  엄마가 있다면 100개의 서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엄마들의 일 서사를 발굴해 일 아니면 육아였던 이분법적 선택지가 아닌 여러  갈래의 길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대기업의 높은 자리에서 일하지 않아도, 연 매출 몇억 원 같은 성공신화를 이루지 않아도 내 일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들의 서사를 모으고 싶었습니다." - <내 일 안내서> 프롤로그 중에서  

회사 안에서 생존법을 고민하는 엄마, 수많은 이직을 거친 엄마, 육아 때문에 경력 공백을 겪은 후 다시 일을 시작한 엄마, 창업한 엄마, 프리랜서 엄마, 싱글맘… 인터뷰이 공개 모집과 섭외를 통해 10명의 엄마가 모였다. 직군도 다양했다. 프로그래머, 재무회계 담당자, 아동상담사, 디자이너, 국회의원 비서관, 책방지기, 사진사, 일러스트레이터… 아이들을 겨우 재운 밤 10시, 인터뷰는 100%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엄마들은 일과 육아를 함께 하는 게 힘들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승진에서 밀리고, 면접 자리에서 엄마라는 이유로 거부 당하고,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눈치 보고 미안해 해야 하고, 일도 못 하고 육아도 못 하는 것 같아서 자괴감 느끼고, 번아웃과 우울감을 겪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10명의 인터뷰이들은 자신만의 방식과 속도로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 올 엄마들'은 자신들처럼 막막하고 캄캄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터뷰이 중에는 현재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6명, 자영업자가 3명, 프리랜서가 1명이었다. 세상은 4대 보험 유무나 수입으로 이들을 구분 짓겠지만, 행복과 불행의 모양이 각기 다른 것처럼 그 어떤 엄마의 일 서사도 똑같지 않았다. 각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인사이트도 노하우도 달랐다. 모두 엄마인 3명의 인터뷰어와 10명의 인터뷰이는 한밤의 모니터 앞에서 참 많이 웃고 울었다. 

"승승장구한 것도 아니고 꾸역꾸역 살아온 삶인데, 제가 인터뷰 할 자격이 있을까요?"

섭외 과정에서 한 인터뷰이가 물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정리하면서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완벽하고 매끈한 성공담이 아니라, 꾸역꾸역 울퉁불퉁 엉망진창 고군분투기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는 걸. 3년 전, 내게 정말로 필요했던 건 깃발 들고 '이것만 따라하면 돼' 말해줄 롤모델이 아니라, 나의 상황에 맞게 참고하고 영감 받을 수 있는 레퍼런스였다는 걸. 

회사 안이냐 밖이냐, 일이냐 육아냐가 아닌 다른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마음 속 깊은 곳 응어리가 풀어졌다.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나도 한 번 용기를 내볼까.' 구체적이고 다양한 서사는 위로와 용기를 줬다. 

인터뷰 작업을 하며 나는 두 번째 퇴사를 택했다. 지속가능한 일과 삶을 만들어가는 여성들의 온라인 멤버십 커뮤니티 '창고살롱'을 공동 창업했다. 창고살롱의 슬로건은 '나의 서사가 레퍼런스가 되는 곳'이다. 창고살롱에서는 모든 멤버가 서로를 레퍼런서(Reference+er)라고 부른다.  

<내 일 안내서>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워킹맘 선배들 생각이 많이 났다. 회사 안에 롤모델이 없다고, 워킹맘 선배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퇴사하는 후배를 보며 선배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참 싸가지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일과 육아를 둘 다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마법 같은 롤모델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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