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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사회연대 2층 상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2층 상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정성철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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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에요.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말하는 거 안 좋아하고, 집에 콕 박혀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창궐한 지 1년이 넘었다. 백신을 맞아도 언제 면역력이 생길지 모른다. 아직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지난해 추석에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을 이번 설에도 만나지 못했다. 씁쓸하지만, 당국의 방역지침을 따르는 것밖에 뾰족한 수가 없다. 

입춘이 지났어도 칼바람이 몰아친 2월 17일, 용산구에 위치한 빈곤사회연대를 찾았다. 정성철(33) 활동가를 만나기 위해서다. 집회가 있을 때 종종 얼굴을 본 적은 있지만,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것은 처음이다. 

그가 빈곤사회연대와 함께 하게 된 가장 큰 이유

"빈곤사회연대에는 정말 우연한 계기로 왔어요. 편입해서 사회복지학과를 다녔는데 실습할 곳이 마땅치 않았어요. 진보 성향의 기관을 알아보다가 사회복지기관은 아니지만, 빈곤사회연대를 발견하고 실습을 하게 되었어요. 실습이 끝나고 취업을 하려고 했는데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님이 같이 활동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어요. 2014년부터 활동했으니까 벌써 7년이 되었네요."

빈곤사회연대는 2001년 12월 '민중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한 최옥란 열사의 투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단체다. 2004년에는 노동의 불안정화, 민중의 빈곤화에 맞선 광범위한 도시빈민의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빈곤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준)'를 발족했다. 2008년 4월 16일부터는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연대'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2020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집회에서 정성철(가운데)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2020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집회에서 정성철(가운데)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 정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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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고 사건 사고가 터지는 한국 사회는 노동문제 다음으로 빈곤문제가 심각하다. 이에 대응하는 정부는 놀라울 정도의 임기응변식이다. 오죽하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사고가 가장 자주 발생하는 50인 이하 사업장을 제외한 채 법안을 통과시켰을까. 

"빈곤사회연대의 활동을 알기 위해 홈페이지를 봤더니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2012년 8월부터 광화문에서 시작한 부양의무제도 폐지를 위한 농성이었어요. 빈곤사회연대가 결합하고 있다는 걸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같이하고 있었어요.

장애인, 빈민, 홈리스, 철거민, 노점상 등 우리 사회에서 가려지고 밀려난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것들을 다 내 운동으로 받아들이고 같이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활동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기도 하고요.

저는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회 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어요. 사회복지학과로 편입하기 전에 자동차 정비를 했어요. 마음 한쪽에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게 불편했어요. 날카롭고 까칠한 성격이었는데 여기 와서 많이 좋아졌어요. 빈곤사회연대가 연대하는 현장은 대부분 심각하고 격렬히 싸워야 할 곳이에요.

큰 집회는 역할 분담이 잘 되어 있지만, 철거 현장이나 노점 현장은 일손이 많이 부족해요. 누군가 선동을 하면 누군가는 앰프를 봐야 하고, 피켓이나 현수막을 들 사람이 없으면 바로 달려가야 하고요. 초기에는 상근 활동가가 2명이었는데 재작년에 4명 됐어요. 모두 최저임금 받고 활동하고 있죠."


어느 곳은 안 그렇겠냐만, 빈곤사회연대 활동은 특히 그렇다. 눈코 뜰 새 없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로 정신없다. 2000년대 초, 내가 '민중복지연대'라는 단체에서 활동할 때 빈곤사회연대와 함께 움직였다. 할 일은 많고 사람은 없어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우리 사회의 변화가 그만큼 느리다는 방증이다.
  
"활동한 지 7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어려워요. 구체적인 상황이 계속 바뀌기 때문이죠. 부양의무자 기준이나 장애인등급제 폐지 문제도 안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요구가 있는데, 요구에 맞지 않게 바뀐 것들이 있어요. 사람들의 반응은 계속 변하고 거기에 맞게 따라가려면 힘들어요. 

현장에 가면 대부분 고통받는 사람이고, 사망 이슈를 접하면 마음이 많이 힘들어요. 그렇지만 빈곤사회연대는 연대 단체라서 각 단체와 소통하는 일을 하니까 조금 나아요. 

빈곤문제에는 많은 것이 얽혀 있어요. 그것들을 다 돌아보고 알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활동을 잘하려면 멀리 봐야 하는데, 저는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울 수 있어서 좋아요. 활동가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무플보단 악플이 나아요"
 
 2020년 10월. 사회적 거리두기 방영지침에 동참하여 노점상들이 장사를 중단하자 마포구청은 이들의 마차를 침탈했다. 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마포구청 앞에서 하고 있다.
 2020년 10월. 사회적 거리두기 방영지침에 동참하여 노점상들이 장사를 중단하자 마포구청은 이들의 마차를 침탈했다. 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마포구청 앞에서 하고 있다.
ⓒ 민주노점상전국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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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곳을 위해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곳이 빈곤사회연대가 아닌가 싶다. 어느 곳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음은 바쁘지만, 몸은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활동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정성철은 '내가 과연 쓸모 있는 사람인가'의 고민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었다. 
  
"큰 흐름에서 보면 저의 활동 기간이 긴 것은 아니에요. 어려운 길을 가는 것은 맞는데 빈곤문제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활동해서 좋아지는 것도 있지만, 나빠지는 것도 같이 생겨요.

장애인, 홈리스, 노점상, 철거민 문제 등을 모두 같이 풀어야 총체적인 문제가 나아지는데 그게 아니에요. 저는 어떤 의제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문제를 조직화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어요. 

지난 설날 연휴 첫날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아래 전장연)의 장애인 활동가 100여 명이 당고개역에서 서울역까지 이동권 투쟁을 했어요. 휠체어 탄 장애인 활동가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고 외쳤죠.

서울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 아직 13개나 되거든요. 이 싸움을 하고 SNS에 공유했는데, 댓글이 많이 달렸어요. 전장연 사무실에는 전화가 몇백 통씩 왔고요. 시민들의 항의 댓글과 항의 전화였죠. 그래도 무플(무관심)보다는 악플(비난)이 낫다고, 한편으로는 반가웠어요(웃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어떻게 하면 대중에 더 설득력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무조건 우리가 옳다고 행동하면 공감을 받기 어려워요. 개별적인 움직임보다는 단체 행동으로 설득력을 높여야 할 것 같아요. 빈곤문제에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제일 커요.

빈곤문제가 과거처럼 도시빈민에게 국한되는 게 아니고,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생기고 있잖아요. 이런 것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못 하고 있어서 아쉬워요."


아직은 젊고, 더 희망찬 미래를 꿈꿀 시기에 '활동가'라는 가시밭길을 선택한 정성철이 안쓰러웠다. 물론 본인이 선택한 길이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안타까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기성세대가 좀 더 밝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놓았다면, 정성철은 다른 길을 걷고 있지 않았을까. 활동가의 삶은 생각보다 우울하고 어두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서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 그럼에도
 
 2020년 2월, 송파세모녀 6주기 기자회견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정성철
 2020년 2월, 송파세모녀 6주기 기자회견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정성철
ⓒ 정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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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이 너무나 차별적인 거예요. 홈리스, 장애인, 쪽방주민들은 그렇지 않아도 취약계층인데, 코로나로 재난이 중첩된 거잖아요. 이들에게 적절한 주거 대책을 마련하라고 계속 얘기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어요. 코로나가 닥친 지 1년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도요. 최소한의 방역지침을 지킬 수 있는 공간과 개별 화장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환경을 갖춘 주거를 제공하지 않아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어요. 

거리홈리스는 더 심각해요.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지하철역, 서울역 대합실에서 다 쫓아냈어요. '접근금지' 띠 두르고 '노숙금지' 팻말 붙이고, 의자 다 없애고. 최근에는 대합실 TV 소리도 무음으로 하고 뉴스도 안 틀어줘요. 

코로나가 장기화되고 있고, 대유행이 가라앉지 않아서 라지만 최소한의 생존권은 보장해야 하잖아요. 무료급식소마저 문을 닫으니 밥 먹을 곳이 없어요. 민원이 빗발쳐서 급식소가 다시 문을 열었지만, 코로나 검사증을 받아와야 밥을 먹을 수 있어요.

검사는 한 번만 받는다고 끝이 아니에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매주 받아야 해요. 유효기간이 하루만 지나도 밥을 못 먹어요. 다시 검사받고 음성이 나와야만 밥을 먹을 수 있어요.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굶는 거죠. 빵이나 음료수를 준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차별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짐작만 했던 정부의 취약계층 재난 대처법을 듣고 나니 기가 막혔다. 역병을 원망해야 할지, 당국을 원망해야 할지, 사람을 원망해야 할지, 가난을 원망해야 할지. 무엇을 원망한다고 한들 화가 안 날까. 이러다가는 전염병에 걸리는 것보다 화병이 먼저 날 것만 같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듣는 정성철은 오죽할까. 웬만해선 티 내지 않는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작년하고 올해는 저뿐만 아니라 다들 힘드니까 티 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지니까 저도 제어하기가 힘들더라고요. 

빈곤사회연대에 오지 않았다면 계속 불편한 마음으로 살았을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몰랐을 거예요. 물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권감수성이 좋아진 것은 분명해요. 아직 부끄러운 수준이지만, 모두가 동등한 삶을 꾸리고 조금이라도 덜 불편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거라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서른 살이 되면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서른하고도 세 살을 더 먹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단단함'이 무엇인지, '유연함'이 무엇인지."


정성철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2~3년 전에 성대결절이 와 지금은 노래를 못 하고 있다 한다. 코로나가 종식되면 정성철과 함께 어깨걸고 민중가요 <어머니>를 부르고 싶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아아~ 우리의 승리 죽어간 동지의 뜨거운 눈물/ 아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리/ 어머니 해 맑은 웃음의 그 날을 위해.'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서울 청각장애인 문자통역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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