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설공단을 한국 여자핸드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강재원 감독의 안목은 역시 탁월했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던 후반전 엎치락뒤치락 상황에서도 감독은 흔들리지 않고 선수들에게 꼭 필요한 포인트를 짚어가며 침착하고 섬세하게 전술 지시를 내렸고 그들이 원하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후반전 중반 작전 타임을 요청한 강재원 감독은 팀의 에이스 라이트백 류은희를 위해 따로 한 마디 보탰다.

"은희야, 너무 고민하지 마."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벤치를 지켜도 실제 게임 흐름을 잡고 스스로 풀어나가야 하는 건 선수들 개개인이기 때문에 너무 깊은 고민에 빠져 밸런스를 잃기 쉬운 스포츠의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준 말이었다. 상대 팀 선수들의 거센 수비에 막혀 팀 플레이까지 흔들리기 쉬운 핸드볼 게임의 특성을 꿰뚫고 있는 감독의 처방은 역시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렇게 류은희를 중심으로 다시 조직력을 회복한 부산시설공단은 2년만에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강재원 감독이 이끌고 있는 부산시설공단 여자핸드볼팀이 26일(금) 오후 7시 삼척시민체육관에서 벌어진 2020-2021 핸드볼 코리아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 2차전에서 끈질기게 따라붙은 삼척시청을 25-22(전반 14-11)로 물리치고 2연승을 거둬 정규리그 우승은 물론 통합 챔피언 자리까지 우뚝 올라섰다.

후반전만 '동점 5번-역전 2번' 엎치락뒤치락

이틀 전 기장체육관에서 먼저 맞붙은 1차전에서 아슬아슬하게 1골 차 승리를 거둔 부산시설공단은 그보다 더 아찔한 살얼음판을 충분히 예상하고 나왔다. 이계청 감독이 이끌고 있는 삼척시청이 에이스 이효진을 앞세워 그냥 물러설 팀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삼척시청의 추격은 무서웠다. 전반전 18분 6초 부산시설공단 골키퍼 주희의 슈퍼 세이브에 이은 미들속공이 제대로 걸려 류은희의 어시스트를 받은 피봇 강은혜의 재치 있는 로빙 슛이 들어가 9-4, 네 골 차로 부산시설공단이 비교적 멀리 달아났지만 삼척시청 선수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바짝 따라붙는 것도 모자라 24분 9초에 센터백 이효진이 얻은 7미터 던지기를 본인이 직접 성공시켜 10-9로 점수판을 뒤집었다. 

삼척시청이 지난 1차전에서 부산시설공단을 바짝 따라붙으며 모두 여섯 번이나 동점을 만들기는 했지만 뒤집기는 한 번도 못했는데 이번 2차전에서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그토록 어려워보이는 뒤집기를 해낸 것이다. 이처럼 낯선 흐름에도 부산시설공단은 휩쓸리지 않고 전반전 끝나기 전에 다시 게임을 뒤집어버렸다. 26분 24초 정가희가 왼쪽 날개 공격을 성공시켜 11-10으로 다시 리드를 잡았고, 부산시설공단 두 번째 골키퍼 오사라의 깜짝 선방 이후 전반전 46초를 남겨놓고 넣은 권한나의 골 덕분에 14-11로 전반전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전반전 끝무렵에 부산시설공단이 만든 흐름대로 간다면 이틀 뒤 청주에서 열기로 한 3차전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2013년 우승의 영광을 재연하고 싶은 삼척시청의 추격은 예상보다 거센 파도였다. 후반전에만 동점 다섯 차례, 역전 상황도 두 번이나 벌어질 정도로 한국 여자 핸드볼 최고의 게임이 이어진 것이다.

후반전 시작 후 5분 35초 만에 삼척시청은 연수진의 왼쪽 날개 공격으로 15-15 동점 상황을 만들더니 또 그로부터 55초만에 한미슬의 어시스트를 받은 강은서가 역전골까지 터뜨리며 16-15로 게임을 뒤집었다. 9분 25초에는 삼척시청 에이스 이효진이 가로채기 후 속공까지 성공시키며 18-16으로 달아났다. 11분 28초에는 정신적 지주 유현지가 2분 퇴장 징계를 받는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부산시설공단 에이스 류은희의 강슛을 박미라 골키퍼가 오른손 끝으로 걷어내는 슈퍼 세이브로 위기를 넘기고, 12분 10초 이효진의 추가골 덕분에 19-17 두 골 차 리드를 지켜냈다.

이 정도라면 국내 여자핸드볼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부산시설공단이라 하더라도 챔피언 결정 3차전 외나무 다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베테랑의 품격이 또 한 번 입증됐다. 심해인의 동점 골(15분, 19-19)도 모자라 챔피언 결정전에서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하고 있는 이미경이 개인 페인팅 동작 후 멋진 골(17분 42초)을 보태 22-20으로 또 한 번 판을 뒤흔들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엎치락뒤치락 핸드볼 드라마가 절정을 향해 끓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어렵게 만든 또 한 번의 역전 흐름에 쐐기를 박으려는 부산시설공단 강재원 감독은 19분 18초에 작전 타임을 요청하여 핸드볼 득점의 백미라고 하는 스카이 골 부분 전술을 지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코트로 들어가는 에이스 류은희를 향해 무심한 듯 "은희야, 너무 고민하지 마"라는 조언을 던졌다. 삼척시청의 끈질긴 추격때문에 심리적으로 쫓기는 팀의 에이스가 강박관념에 더 흔들린다는 것을 감독이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차분하고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감독 덕분에 부산시설공단은 게임 종료 몇 분을 남겨놓고 결정적인 우승 고비를 거뜬히 넘을 수 있었다. 27분 21초 삼척시청 한미슬이 오른쪽 날개 공격을 이끌어내기 위해 옆으로 밀어주는 패스를 김수정이 기막히게 가로채는 공을 세웠고, 강재원 감독은 또 하나의 작전 타임 기회에서 몇 초 안에 반드시 슛을 날려야 하는 심판의 패시브 선언을 예상하고 '강은혜-심해인-류은희-이미경'을 활용하는 구체적 슛 전술을 지시했다. 이처럼 감독의 예상은 또 한 번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끝내 3골 차 승리, 통합 챔피언 세리머니를 만끽할 수 있었다.

게임 끝나고 이어진 시상식에서 지도상(감독상)을 받은 강재원 감독은 한국 여자핸드볼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기에, 코로나-19 때문에 개최가 불투명하지만 도쿄 올림픽에 나가서 꼭 메달을 걸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 팀 득점의 50%가량을 책임지고 있는 투 톱 이미경과 류은희가 각각 일본과 유럽 클럽 팀으로 떠날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도 알렸다. 다음 시즌 코리아리그 여자부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이야기다. 

2020-2021 핸드볼 코리아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 2차전 결과
(2월 26일 오후 7시, 삼척시민체육관)

삼척시청 22-25(전반전 11-14) 부산시설공단
- 챔피언결정전 2연승으로 부산시설공단 우승!

공격 포인트 기록
이효진 7골(슛 성공률 70%) 2도움, 강은서 4골(슛 성공률 50%) 2도움, 연수진 3골(슛 성공률 60%), 유현지 3골(슛 성공률 75%) 1도움, 한미슬 2골(슛 성공률 66.7%) 6도움, 김보은 2골(슛 성공률 50%), 송지은 1골(슛 성공률 25%)  - 이상 삼척시청

이미경 7골(슛 성공률 53.8%) 3도움, 류은희 5골(슛 성공률 55.6%) 2도움, 심해인 4골(슛 성공률 100%) 1도움, 김수정 2골(슛 성공률 66.7%), 정가희 2골(슛 성공률 66.7%), 강은혜 2골(슛 성공률 66.7%) 2도움, 권한나 2골(슛 성공률 100%) 2도움, 함지선 1골(슛 성공률 20%) - 이상 부산시설공단

골키퍼 기록
삼척시청 박미라 : 세이브 14개(선방률 35.9%)
부산시설공단 오사라 : 세이브 10개(선방률 47.6%) / 주희 : 세이브 5개(선방률 31.3%)

핸드볼 코리아리그 여자부 역대 성적
2020-2021 우승 부산시설공단 / 2위 삼척시청 / 3위 광주도시공사
2019-2020 우승 SK 슈가글라이더스 / 2위 부산시설공단 / 3위 삼척시청
2018-2019 우승 부산시설공단 / 2위 SK 슈가글라이더스 / 3위 삼척시청
2017 우승 SK 슈가글라이더스 / 2위 서울시청 / 3위 부산시설공단
2016 우승 서울시청 / 2위 원더풀 삼척 / 3위 인천시청
2015 우승 인천시청 / 2위 서울시청 / 3위 원더풀 삼척
2014 우승 인천시청 / 2위 서울시청 / 3위 원더풀 삼척
2013 우승 원더풀 삼척 / 2위 인천체육회 / 3위 SK 슈가글라이더스
2012 우승 인천체육회 / 2위 원더풀 삼척 / 3위 SK 슈가글라이더스
2011 우승 인천체육회 / 2위 삼척시청 / 3위 용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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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 부산시설공단 삼척시청 류은희 강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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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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