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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덕분에 좋은 습관이 하나 생겼다. 걷기를 생활화한 것이다. 처음엔 운동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걸었는데 매일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내가 걷기를 즐길 만큼 빠져들게 되었다. 낮에 많이 걸으니 밤에 푹 잘 수 있고, 걷는 동안만큼은 걱정거리가 사라지니 마음도 편안해졌다. 낮에는 동네 천변을 걸으면서 물오리들이 유유히 떠다니는 장면도 보고 비둘기와 까치가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햇볕을 쬐는 모습도 보았다. 다채로운 낮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활력이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해질 무렵의 산책은 내게 또 다른 감상을 느끼게 했다.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걷노라면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쓸쓸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해질 무렵이 아름다운 건 해가 서쪽으로 지기 전 남아있는 햇빛이 하늘에 붉은 노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고,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는 노을이 존재하는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해질 무렵의 풍경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작품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uro, 1954~ )의 소설 <남아있는 나날>이다.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보았다.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주연을 맡았다.

스티븐스는 영국 귀족의 저택에서 평생을 집사로 일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는 오래전 함께 일했던 미스 켄턴과 재회한다. 초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미스 켄턴은 불행했던 결혼 생활을 털어놓고 그럼에도 남편을 사랑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지금은 곧 태어날 손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스티븐스는 최고의 집사가 되기 위한 일념으로 개인적인 욕망과 사생활을 희생하고 최선을 다해 주인을 모셔왔지만 그게 과연 최선이었는지 싶어 씁쓸한 심정이 된다. 지금도 그에게는 새 주인을 맞아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다. 

담담하게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헤어질 채비를 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역 플랫폼에 불빛이 환하게 켜지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그 와중에 이런 대화가 이어진다. 

미스 켄턴 : 저렇게 불이 켜지면 사람들은 생기에 넘치죠.
스티븐스 : 왜 그러죠?
미스 켄턴 : 그건,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좋은 시간이래요.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래요.
스티븐스 : 그래요?
미스 켄턴 : 당신이 기다리는 건 뭔가요?
스티븐스 : 오, 달링턴 저택으로 빨리 달려가 하인들 문제를 해결하는 거죠.


잘 지내라고, 남편과도 행복하게 살라고, 앞으로 영영 못 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며 둘은 헤어진다. 버스를 타고 멀어져 가는 미스 켄턴의 얼굴에서, 자동차 시동을 걸고 허공을 바라보는 스티븐스의 얼굴에서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지만, 지난 삶이 불행하고 아쉬웠음에도 불구하고, 미스 켄턴이나 스티븐스 같은 이는 주어진 삶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할 것이다. 

둘의 모습, 특히 스티븐스의 모습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탁월성(Arete)'이라는 덕목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좋은(행복한) 삶이란 탁월성을 습관화하고 실천하는 삶이라 했다. 탁월성은 교육으로 습득되고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완전해진다. 오랜 시간을 통해 습관으로 갖추고 실천하는 유덕한 행위에 행복이 있다는 대목에선 한참을 곱씹어 생각할 수밖에.   
젊을 때는 시시하고 재미없어 보이는 일들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보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은 탁월성을 실천하는 지속적인 행위에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아쉽게도 그걸 깨달을 즈음이 되니 이미 내 인생의 해는 서쪽으로 기운 상태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산책할 때면 인생의 황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살면서 겪는 세속적인 성공이나 실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것이어서 그걸 두고 그 사람이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반면, 오랜 시간에 걸쳐 탁월성을 실천하는 태도는 쉽게 이룰 수 없는 만큼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여기에 행복의 비밀이 있다는 걸, 진부한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내 인생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절감하고 있다.
 
수채화
▲ 해질 무렵 수채화
ⓒ 홍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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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이면 오늘 하루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해보곤 한다. 많이 걷지 못한 날은 어두워지기 전에 좀 더 걸으러 나간다. 어떤 날은 기분 좋게 걷지만 어떤 날은 힘들게 걷기도 한다. 목표량을 채우면 만족하지만 채우지 못하더라도 크게 후회하진 않는다. 걷는 과정 그 자체가 하루 목표량을 달성한 것 이상의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효과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으뜸은 아마도 잠을 푹 잘 자는 게 아닐까.  

태그:#해질 무렵, #황혼, #아리스토텔레스, #탁월성, #좋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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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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