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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선생 신학철 화백이 그린  백기완 선생
▲ 백기완 선생 신학철 화백이 그린 백기완 선생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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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내가 이기고 네가 지는 싸움이 아니야. 제국주의와 민중을 갈라치는 썩물 독점 자본주의와 싸워 양심이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이야."
 
우리 민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남북으로 갈라져 사랑하는 부모형제 아내와 자식이 서로를 그리며 산, 70년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는 이들의 한이 깊어만 간다.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녘으로 돌아갔지만 박종린, 박희성 선생 등 강제 전향 피해자 33명은 제외됐다. 그들은 고향의 형제자매와 아내와 아들딸을 그리워하다 한 많은 세월을 뒤로 한 채 하나둘 이승을 하직하고 있다.

신혼의 아내와 백일 된 딸을 북애 두고 체포돼 34년간 수감생활을 한 박종린(89) 선생은 고향에 돌아가 아내와 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살다 지난 1월 24일 8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장기수 송환 1인 시위 장기수 2차 송환을 요구하는 1인 시위
▲ 장기수 송환 1인 시위 장기수 2차 송환을 요구하는 1인 시위
ⓒ 아메리카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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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송환 대상에서 제외됐던 33명 중 이제 11명의 장기수만이 남았다. 한미군사훈련 중단, 조건없는 2차 송환으로 가로막힌 남북대화의 물꼬를 다시 터야 한다. 

예순 외아들 생일날 미 대사관 앞 침묵 시위로 환갑잔치해 준 장기수 박희성

지난 2월 18일 미대사관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안타까운 환갑잔치가 열렸다.
 
아들 환갑잔치로 1인 시위 중인 박희성 선생 1년 4개월 된 아들이 환갑을 맞았고  아들 환갑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아들 환갑잔치로 1인 시위 중인 박희성 선생 1년 4개월 된 아들이 환갑을 맞았고 아들 환갑날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아메리카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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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정기수 박희성 선생(87)이 환갑을 맞은 아들을 위해 1시간 동안 미국 대사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한 것이다.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은 아버지를 아들 품으로 돌려보내달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케이크과 과일을 준비해온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함께 케이크를 잘라야 할 주인공은 북녘에, 아버지는 남녘에서 안타까운 환갑날을 보내야 했다.
  
기자회견 중인 시민들 박희성 선생을 아들 품으로 돌려보내달라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기자회견 중인 시민들 박희성 선생을 아들 품으로 돌려보내달라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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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자원입대했다. 1951년 군공 메달, 1952년 전사 영예 훈장 2급을 받았다. 열여덟 살에 로동당 당원으로 입당했다.

대남 연락 사업부에서 일하던 박희성 선생은 1962년 6월 1일 남파 공작원을 귀환연락선의 기관장으로 나왔다가 작전이 노출돼 두 발의 총탄을 맞고 체포돼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무기수로 감형됐다. 무기수로 27년간 복역하다 1988년 출소했다. 남한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선생이 혹독한 세월을 견뎌낸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와 외아들 동철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 덕분이었다. 
 
아들 환갑날  1인 시위를 하는 박희성 선생 아들 환갑날 1인 시위를 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아들 환갑날 1인 시위를 하는 박희성 선생 아들 환갑날 1인 시위를 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 아메리카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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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4개월된 어린 아들에 대한 기억만 간직한 박 선생은 아직도 아들을 이름 동철 대신 '우리 애기'라고 부른다.

로창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박희성 선생은 "2022년 5월 24일이 입당한 지 만 70년이 되는 날이다. 아직도 당증 번호 기억하고 있다. 나오면서 당에 당증을 맡겨놓고 나왔는데 입당 70년 되기 전까지 돌아가서 당증을 찾아서 가슴에 품는 게 소망"이라면서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80대 어머니가 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어머니와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평양시민 김련희씨의 눈물도 박희성 선생의 안타까운 눈물에 보태졌을 것이다.
 
백기완 선생 2021년 2월 15일 백기완 선생은 통일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운명했다.
▲ 백기완 선생 2021년 2월 15일 백기완 선생은 통일 세상을 보지 못하고 운명했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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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축구화를 사준다는 아버지 말에 고향인 황해도 은율을 떠났던, 축구선수가 꿈이던 13살 소년 백기완은 구월산 아래 어머니와의 추억만을 간직한 채 2021년 2월 15일 새벽 영원한 고향인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가열찬 통일 운동가, 우리말 지킴이, 시인, 문필가, 노동자 민중의 정신적 지주이며 말과 행동이 하나였던 실천가였던 백기완 선생. 89세로 운명할 때까지 민중이 주인이 되는 참통일 세상의 염원을 놓지 않았지만 끝내 통일세상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백기완 선생이 일구려던 통일 모든 분단의 벽을 부수는 노나메기 해방통일 세상이었다. 우리의 안팎을 가로막는 모든 분단의 장벽을 넘어서야 진정한 통일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통일을 가로막는 분단의 실체를 바로 알고 부수지 못하면 진정한 통일의 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통일은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양심이 하나되어 통일을 문을 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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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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