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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국회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에 연루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4일 찬성 179표, 반대 102표로 가결했다. 국회가 현직 법관에 대한 탄핵 소추를 의결한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사진은 이날 오후 부산고등법원에 펄럭이는 법원 깃발에 그림자가 드리운 모습.
 국회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에 연루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탄핵 소추안을 4일 찬성 179표, 반대 102표로 가결했다. 국회가 현직 법관에 대한 탄핵 소추를 의결한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다. 사진은 이날 오후 부산고등법원에 펄럭이는 법원 깃발에 그림자가 드리운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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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독립.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는 말이다. 요샛말로 치트키(cheat key)다. 너무도 신성해 함부로 대들 수 없다. 그 자체가 절대 목적이라 모든 과정과 수단을 뒤덮어 버린다.

지난 4일 헌정 사상 최초로 법관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수십 명 법관이 연루된 '사법농단'이 세상에 알려진 지 4년 만에, 법관 단 한 명(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이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기다리게 됐다. 헌정 질서를 뒤흔든 '역대급' 사태에 대한민국의 시스템은 겨우 이 정도로 작동했다.

그나마도 거센 반발이 난무하고 있다. 제1야당이 나서 비난을 쏟아냈다. 입법·사법·행정의 영역에서 빛나는 자리를 거쳐온 변호사 등 155명이 임성근의 대리인단을 자처했다. 심지어 그의 사법연수원 동기 140여 명이 공동성명을 내면서 우린 전근대 사회를 경험해야 했다.

이들 모두 전가의 보도를 들고 나왔다. 치트키를 썼다. 하나 같이 "사법부 독립"을 이야기하며 신성함을 점유했다. 사법농단을 향한 비판과 더뎠지만 조금씩 진보하던 법원개혁의 과정이 사법부 독립이란 말 앞에 모두 신성모독으로 치부됐다.

당신은 임성근같은 판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은가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사법농단' 연루 임성근 판사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순간 "김명수 대법원장을 탄핵하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사법농단" 연루 임성근 판사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순간 "김명수 대법원장을 탄핵하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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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하게 말할 수 있다. 사법부 독립이란 말은 틀렸다. 거짓이자 속임수다. 그 말이 되레 사법농단을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 독립의 대상은 사법부가 아니며, 독립의 방향도 그동안 잘못 설정돼왔다.

헌법을 지탱하는 힘은 3권분립에서 나온다. 우린 3권분립을 이야기하지 3부분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헌법에도 사법부는 없다(행정부를 제외한 입법부·사법부는 법적 개념이 아닌, 편의상 사용하는 단어이다). 사법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린 '사법권 독립'을 부르짖어야 한다. 사법권을 담는 그릇인 사법부는 목적이 아닌 도구일 뿐이다. 사법부 역시 사법권 독립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사법권은 무엇일까. 답을 내리는 데 깊은 숙고가 필요하지 않다. 저명한 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사법권은 곧 '재판'이다. 독립이 보장돼야 하는 건 사법부란 조직이 아니다. 재판이다. 재판을 진행하는 법관 한 명, 한 명이 어떤 힘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비로소 3권분립이 완성된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사법부가 아닌 재판이 신성하길 원한다.

법관은 사법부 외부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지만, 사법부 내부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사법부 독립을 부르짖었던 우리의 헌정사는 전자에 천착해왔다. 지독한 군부독재 탓에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그렇게 산성을 쌓아온 사법부는 스스로 사법권을 해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물이 사법농단이었다. 대법원장은 인사권 등 사법행정권을 독점한 제왕이었다. 이러한 사법부 내에선 강한 위계질서와 승진 우선주의가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사법부가 철저히 산성을 쌓으며 외부로부터의 독립을 외쳐오는 동안, 법관들은 내부의 제왕과 호위 조직(법원행정처), 그리고 영주(고위법관)에게 휘둘려왔다. 뿐만 아니라 그들처럼 되기 위해 힘을 보태왔다.

내부로부터의 독립이 무너진 조직이 외부의 침해에 안전할 리 없다. 낡은 산성은 겉으로 보기에 굳건했을지 몰라도 권력 앞에 쉽게 성문을 열었다. 임성근은 요직 중의 요직인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 시절 일선 재판에 적극 개입했다. 박근혜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언론인의 재판이었다. 임성근이 제시한 재판 방향과 판결 요지가 그대로 반영됐다.

이건 임성근의 사례일 뿐이다. 우리의 '엘리트' 법관들은 청와대·외교부·국회는 물론 피고(일본 전범기업) 측도 서슴없이 만났고, 각종 문건을 만들어 강제징용 피해자 등의 재판을 지연시켰다. '정운호 게이트'의 수사기록은 거침없이 상부(법원행정처)에 보고됐고, 수뇌부 심기를 불편하게 한 법관들은 '블랙리스트'로 분류됐다.

2년 전 독일 현지를 찾아 그곳의 사법제도를 취재한 바 있다. 독일은 사법행정권을 행정부가 갖고 있고, 의회도 법관 인사 등에 어느 정도 권한을 행사한다. 이를 두고 한국의 어느 헌법재판관(서기석)은 "독일은 2권분립 국가"라고 말했다.

독일은 사법권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달랐다. 독일의 목표는 재판과 법관의 권한이 침해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견제와 균형'이란 수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면 사법부에 초점을 둔 우리는 재판과 법관의 권한보다 조직을 우선순위에 둬왔다. 그렇게 '3권분립' 국가 한국에선 사법농단이 벌어졌는데, '2권분립' 국가 독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길 들어본 적이 없다. 독일인 누구도 자신이 '2권분립' 국가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법농단 법관 탄핵이 사법부 독립 침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본질을 흐리고 있다. 혼란스런 말들이 난무할 땐, 사안을 단순하게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은 임성근처럼 '외부에서 재판을 뒤흔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판사에게 재판을 받고 싶은가? 답은 어렵지 않다.
  
[관련기획] 서초산성 - 우리가 몰랐던 법원, 우리가 바꿔야 할 법원 http://omn.kr/1pum9

태그:#사법농단, #임성근, #법관,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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