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구입하고 처음 청소를 한 냉장고 야채실
 구입하고 처음 청소를 한 냉장고 야채실
ⓒ 김준정

관련사진보기


난생처음으로 냉장고 청소라는 걸 했다. 두려워서 열지 못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 '다 하자는 건 아니야, 전에 마른 새우를 찾느라 뒤적거리다가 보게 된 그 까만 물체만 치우자는 거야. 야채실 한 칸만 치우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자꾸만 포기하려는 나에게 이런 무수한 설득을 해야만 했다.

선사시대 유물을 캐내는 심정이랄까? 언제부터 묻혀있었는지 알 수 없는 멸치, 생강, 귤, 파 같은 걸 끄집어냈고 꺼내는 즉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북어대가리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 뒤로(동물 시체라도 되는 줄 알았는지) 또 뭐가 나올지 몰라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혼자 조마조마하며 조금씩 밑으로 파 내려 갔다. 예상대로 가장 아래에는 얼음이 있었는데 두께가 상당해서 손으로는 어림없어서 장비(국자)까지 동원했지만 해체는 불가능했다.     

그러다 서랍이 분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치냉장고를 구입한 지 14년 만이다. 서랍이 개수대에 다 들어가지도 않아서 겨우 걸쳐놓고 뜨거운 물을 뿌렸다. 한참 만에 얼음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14년 동안 얼어있었을지도 모르는 그것을 들어내는데 기분이 묘했다. 남극의 빙하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을 직접 하지 않은 내가 몰랐던 것들

엄마가 넣어둔 게 분명한 콩은 메주가 되어가고 있었다(놀랍게도 콩에서 끈적한 실이 나왔다). 만년 주부 초단인 엄마가 냉장고 청소를 했을 리는 없었다. 학원을 차린 이후로 나는 살림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도우미 여사님, 나중에는 엄마가 살림과 육아를 맡아주셨다. 집안일을 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생산적인 일을 해서 커리어를 쌓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빨래와 청소 때문에 지쳐서 학원 일을 소홀히 하면 손해라고 생각해서 집에서는 내가 먹은 컵도 씻지 않았다.  
   
2년 전 엄마가 본가인 대구로 돌아갔고 예전처럼 돈을 벌지 못하는 나는 도우미 여사님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딸과 둘이 사는데도 집안일이 어찌나 많은지 처음에는 할 때마다 짜증이 나고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조금씩 적응이 되고 요령도 생겼다.

걸레로 거실 바닥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이전에 내가 생각한 일이라는 게 걸레로 바닥을 한 번도 닦아보지 않은 사람이 바라본 것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샤프심, 부스러기들은 보지 못한 채 일을 해왔던 것 같다.    

나는 집안일을 할 때 음악을 들으며 한다. 냉이 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다듬고 무치면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내가 내 생활을 맛있게 조리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먼지를 빨아들이고 걸레로 먼지를 닦으면 내가 일상을 잘 돌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된다.    

전에 나는 전업주부를 무시했다. 딸아이의 유치원 엄마들과 만나서 밥을 먹으면 나는 1시 30분인 출근시간에 맞춰 일어나야 했지만 그들은 어딘가로 차를 마시러 갔다. 나는 오늘 학원에 가서 처리해야 하는 일을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H는 '출근하는 남편에게 쓰레기를 버리라고 했더니 그냥 나가더라, 밥을 일주일째 안 했다', 같은 말을 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일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겨우 일어나서 출근하는 사람의 심정을 그들이 알까? 가끔은 식구들이 쓰는 돈이 무섭게 느껴져도 식구들이 불안해할 까 봐 애써 꾹 참는다는 걸 그들이 알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는 대화가 통할 리도 없었고, 내가 무시하는 걸 그들도 모를 리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을 평가했다 
   
살림을 하지 않는 나는 전업주부의 고충을 몰랐다. 청소하고 쓰레기를 치우면서 내 노력과 시간이 이렇게 하찮게 느껴지는 걸 내가 해보기 전에는 몰랐다. 가족이 마시고 난 컵을 치우고 빨래를 개키면서 나는 온종일 가족들 생각을 하는데 가족들은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외로워진다. 나를 냉장고나 세탁기처럼 집안일을 해내는 기계로만 생각하는 걸까? 그저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쓰레기봉투를 버려 달라고 하고 밖에 나와서 투정 섞인 하소연을 하는 거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건 남의 일일 뿐이다. 남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내가 평가를 할 자격이나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문제라면 남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나한테 있을 뿐. 어쩌면 질투였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은 그들이 부러웠고 나에게는 학원의 고객이기도 한 학부모들에게 묘한 경쟁 심리가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놀이터에 젊은 엄마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거 보는데 내 딸은 왜 저렇게 편하게 못 살고 바쁘게 사나 싶어서 속상하더라."

내 염장을 지를 속셈인 건지 아빠는 수시로 이런 소리를 했다.

"내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어. 처음부터 전업주부였다면 나한테 그런 선택권은 없었겠지."

그때 나는 오기에 차서 말했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누구도 그저 편하기만 한 삶은 없는 것 같아요. 이제부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내 손으로 쓸어 담으면서 살아보려고 해요."

태그:#냉장고청소, #집안일, #전업주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을 봐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학원밥 18년에 폐업한 뒤로 매일 나물을 무치고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