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0 18:52최종 업데이트 21.02.2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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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겨울, 남편이 주말농장 타령을 하더니 이듬해 봄 기어이 밭을 분양 받았다. 농사와 인연도 없는 사람이라 한식과 벌초 때 어설프게 삽질을 하니 말년에 시골살이는 기대도 안 했다.

아내가 그리는 말년 시골살이 연습을 할 수 있는 것이 주말농장이라고 생각했을까? 성장기를 아파트에서 보낸 아이들이 흙과 담을 쌓은지라 흙의 의미를 알게 하고 싶었을까? 남편은 그새 씨앗까지 사다 놓았다. 열 가지 씨앗이 3만 원어치는 되니 9평 땅의 임대액 3만 원과 같은 값이다.


본인 한 구좌, 동생네 한 구좌. 분양받은 밭에 오니 관리가 된 밭이라 매끈하게 차려진 밥상 같다. 관리인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 "처음 시작은 대단하지만, 끝까지 가는 밭과 곧 중간도 못가 풀밭이 될 밭이 훤히 그려진다". 우리 밭은 후자의 밭이 되지 말아야지.

땅 3만 원, 씨앗 3만 원에 세 가족 일 년 식탁이 풍성
  

대청호 주변 주말 농장 명패가 붙어있는 밭고랑. 1년간 임대인데도 농사지을 땅 9평이 값지다. ⓒ 최수경

 
♧ 4월 초, 밭 갈고 씨앗심기

여동생네와 두 고랑을 함께하니 지척의 친정 부모님에게 소일거리가 될 듯싶다. 씨앗도 뿌리고 돌도 골라주고 네 밭 내 밭 안 가리는 공동 경작인 셈이다. 당근 씨를 넣을 작은 구멍에서 싹이 뾰족하게 올라와 아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7살 조카가 "유치원의 모래밭 흙은 따뜻하고 손에 묻지 않아요. 그런데 이 흙은 차갑고 축축하고 손에 많이 묻어요, 또 냄새도 나요"라고 한다. 산교육이다. 오늘은 토마토, 방울토마토, 고추, 가지 모종 4개씩 그리고 씨감자를 한 골에 길게 심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 얼지는 않으려나. 아직 주인이 안 와본 밭도 주변에 허다한데, 우리 밭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싶다.
   

씨앗 파종 노(勞) 작 활동은 지덕체(智德體) 중심의 교육에 포함해야 할 중요한 덕목(勞)으로, 아이들이 직접 생산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주말농장을 하는 또 다른 뜻이다. ⓒ 최수경

 
♧ 4월 중순, 모종이 다 얼었다

추웠나 보다. 모종이 다 얼어 죽었다고 주말농장 관리인에게 전화가 왔다. 밭이 있는 대청호 주변은 도시보다 평균 기온이 낮아, 좀 더 있다 심으라고 귀띔하셨다. 말 안 듣고 재미 삼아 덤비다 식물을 얼어 죽게 했다. 토마토 모종 하나만 빼고 죄다 얼어 죽었다. 이것도 경험이다.

♧ 5월 초, 모종에 꽃이 핀다

열무 싹이 소복하게 올라왔다. 그간 비도 간간이 왔고, 날씨도 푹해서였을까. 성급하게 모종한 것들은 죄 얼어 죽었는데, 씨앗으로 파종한 것은 약속 지키듯 얼굴을 내밀었다. 고추 모종에 꽃이 피려고 한다. 토마토 모종에도 꽃봉오리가 맺혔다. 씨감자 새순도 막 올라오려고 한다. 밭이 난리가 났다.

땅속을 벗어난 생명의 눈이 햇빛을 보겠다고 움트는 생명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상추 모종은 벌써 잎 공장 가동이 시작되었다. 몇 장 따와 쌈을 싸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5월 고추모종에 꽃이 폈다 언 땅이 녹으면서 찐감자의 분처럼 일어난 흙을 갈아 엎어 4월에 파종을 했다. 5월이 되니 씨앗에서 새싹이 돋았다. ⓒ 최수경

   

상추가 잎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상추 잎 따는 것도 아래부터 기술적으로 따야하는 것을 알았다. 하얀 진액은 생명의 젖줄과 같다. ⓒ 최수경

 
♧ 5월 중순, 풍성한 밭

남편이 추동한 주말농장이라 처음엔 씨 뿌리고 모종 심고 하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장인·장모에게 넘겨버렸다. 어르신들이 워낙 재미나게 가꾸시니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사공이 여럿이면 안 되니까.

부모님은 밭에 다녀오실 때마다 상추, 아욱 등을 딸들 집 현관에 매달아 놓았다. 연한 열무로 담근 심심한 김치를 일주일 건너 한 통씩 담가 주셨다. 한 달 동안 아욱국이 떨어질 날이 없고, 상추가 식탁에 떨어질 날 없다. 지겨울 법도 한데, 아욱은 된장 덕분에 질리지 않고, 상추도 함부로 할 수 없으니 먹어 치운다. 넘치면 같은 층 현관에 한 줌씩 매달아 놓는다.

열 평도 안 되는 밭에서 우리 집, 동생네, 엄마네의 식탁이 이렇게 풍성해질 수 있다니. 부모님은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고 무엇인가를 심으셨다. 시골길 가다 도랑가에 콩대를 빽빽하게 심는 어르신들의 심정을 알겠다.
  

구멍 숭숭 뚫린 열무 열무를 솎아주다 보니, 틈실한 것들이 두단이나 나왔다. 김치를 담기엔 연하고, 밥 비벼먹기에 딱 좋다. ⓒ 최수경

 
♧ 6월 초, 정직한 흙을 알아본 두꺼비

햇볕이 따갑기 시작하니 밭은 완전히 딴 세상이 되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커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무엇인가는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너희들 크는 것만큼 표시가 나지 않았다.

식물이 크는 속도도 무섭지만, 흙과 비와 햇빛을 받아, 이토록 성실하게 임무를 다하는 녀석들이 대견하고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두꺼비가 엉덩이를 흙에 반쯤 파고 앉아 있다. 엄지손톱만 한 청개구리가 주변에서 얼씬거리는데도 눈도 꿈쩍 안 한다. 이 넓은 밭에서 우리 밭을 선택해줘서 고맙다 두꺼비야.
  

텃밭을 방문한 두꺼비 자연 퇴비가 풍성한 우리 흙밭을 찾아 준 두꺼비야 고마워 ⓒ 최수경

 
♧ 6월 중순, 자세히 보니 꽃이 수수하지 않다

밭을 둘러본다. 가지 꽃은 향이 진하고 줄기가 억세다. 거친 가시가 사람을 경계하는 것 같다. 감자꽃은 하얗게 피는 걸 멀리서만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참 예쁘다. 지금쯤 감자꽃을 따주어야 한다지만, 이렇게 예쁜 녀석의 모가지를 어찌 자를 수 있을까? 난 덜 먹으면 먹었지 그렇게는 못 하겠다.

멀리 있어도 향이 진하게 풍기는 토마토는 나무에서 더 향이 넘친다. 토마토 만진 손끝의 알싸한 향이 저녁까지 남았다. 엄마가 일곱 살 손녀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유일하게 줄기를 자르지 않는 아욱이 조카의 키만 하다. 놀랄 만한 성장력의 아욱은 식물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땅속에서 어찌 크고 있을까. 궁금한 땅콩. 언젠가 갓 캐낸 땅콩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비리지 않고 고소함에 놀랐다. 은근히 기다려지는 녀석이다. 모두 먹기도 아깝고 눈을 떼기가 어려울 만큼, 사랑스럽기만 한 녀석들. 농작물의 위대한 모습을 나이 반평생이 넘어서 알다니.
  

가지꽃 관상용 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멋 ⓒ 최수경

   

감자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최수경

 

할머니는 아욱을 7살 손주의 키 만큼 키워 식물의 성장력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 최수경

 
♧ 6월 하순, 밭에 사는 생명끼리 쟁탈전

아주 오랜만에 밭에 갔다. 듣기로는 "열매가 주렁주렁하다. 상추가 배추만 하다. 감자 가지가 무성하다." 듣기만 해도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래서 와 본 밭은 이전에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오이는 주인이 안 본 사이 아예 늙어가고 있고, 피망은 어른 주먹만 한 것이 탐스럽게 숨어 있다. 고추도 싸우듯이 매달렸고, 토마토는 배가 터져서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부추는 베어서 부침개 해 먹고, 토마토와 상추는 이웃과 나누어야지. 열무는 벌레가 마구 구멍을 내 볼품없지만 녀석들과 나눠 먹으니 기쁘다. 아, 마음이 풍성하다. 이것이 농부의 마음이구나.
   

부추 가위로 자르니 수확도 쉽다. ⓒ 최수경

 

욕심을 줄이면 더 건강한 먹거리가 생긴다. 그래 같이 먹자, 많이 먹어, 친구들도 데려와 같이 먹어도 돼. ⓒ 최수경

 
♧ 6월 하지, 감자 캐기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제부로부터 전화 한 통이 왔다. 내일이 하지인데다 내일 비 온다니 오늘 캐야 한다고. 농사를 지으니 농사 월력도 알게 된다. 남편, 부모님, 동생네에게 감자 캐러 가자고 연락을 했다. 한 고랑 심은 감자 농사에 사람이 그리 많이 필요하겠나. 다만 씨앗을 심은 사람들이 직접 수확의 기쁨을 맛보자는 것이다. 흙을 매달고 올라와 만져지는 동글동글한 감자 알갱이들의 감촉. 그것의 느낌을 어디서 느끼랴.
  

하지감자 수확 아이들은 씨앗 심기부터 수확까지의 경험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이해한다. ⓒ 최수경

 
해 질 무렵이라 선선하다. 한 고랑 흙을 호미로 퍼 올리니 줄줄이 달려 나오는 탐스러운 알갱이들. 신기하다, 신기해. 흙냄새가 참 좋다. 아이들도 신났고, 모두 신났다. 이런 수확의 기쁨을, 농부의 기쁨을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
  

감자 수확 주먹보다 큰 감자를 수확한 조카, 성인이 되어서도 잊지못할 감동일 것이다. ⓒ 최수경

 
♧ 7월 중순, 늦여름 밭

관리인이 야생동물의 접근을 막는 울타리를 쳐놓았다. 당근은 나 좀 뽑아달라고 몸통을 반이나 드러냈다. 당근꽃의 키는 해바라기처럼 크고 신부의 부케같이 하얗다. 감자를 심었던 자리에 부모님이 파를 심어놓으셨다. 비가 몇 번 왔던지라 비스듬히 누웠던 녀석들이 팔딱 일어나 있다. 김장 때까지 열심히 파를 솎아 먹으라고 하셨다. 봄부터 식탁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던 아욱은 애써 잎을 만들지만, 진딧물만 앉아 건강하지 않다. 이제 아욱의 시대도 저물고 있다.
  

당근꽃. 신부의 부케와 같다. ⓒ 최수경

    
♧ 9월 중순, 배추 모종

주말농장도 이제 고구마와 땅콩 수확을 끝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다른 밭들은 사람 오는 게 뜸하고, 작물 재배를 안 하다 보니 풀밭이 되어 버렸다. 우리 집만 열심히 드나들었다. 부모님은 잘 크던 토마토와 고추, 가지, 부추 등을 죄다 뽑았고, 다시 밭을 매어 열무와 배추를 심으셨다. 하루라도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무럭무럭 잘 큰다.
   

가을에 파종한 열무 고구마 땅콩 수확이 끝난 밭에 김장을 준비하는 열무와 배추를 심어 무럭무럭 크고 있다. ⓒ 최수경

 
♧ 10월 중순

아파트에선 김장배추 절이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식들은 부모님 힘들까봐 절임 배추를 주문해 함께 뚝딱 김장을 해치웠었다. 그러나 딸들의 만류에도 부모님은 김장배추 60포기를 기어이 심으셨고, 정성껏 잘 가꾸셨다. 남의 밭고랑 배추보다 쑥쑥 컸고, 눌러보면 단단하게 차올라 속도 튼실히 채워졌다.

그나저나 이거 뽑아 다듬고 절구고 씻고... 김장 걱정이 태산이다. 어찌 되었든 한해 농사 잘 지어 겨울 김장김치 먹을 때마다 가족들 손끝 생각이 날 것 같다. 황토 고구마도 캤으니, 겨울 간식 비싸게 사 먹을 일도 없다. 땅 3만 원, 씨앗 3만 원이 세 가족 일 년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구나.

이렇게 2016년 봄에 시작한 주말농장을 지금까지 계속 해오고 있다. 곧 봄이 온다. 슬슬 올해 농사를 계획해야겠다. 
   

고구마 잎 채소와 달리 수확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생장 정도를 알 수 있는 뿌리채소들. 그래서 더 감동이 크다. ⓒ 최수경

 

김장 배추 부모님이 심고 가꾸신 배추. 직접 키운 배추로 김장을 시작한 첫 해다. ⓒ 최수경

 
백 가지도 넘는 혜택

전 세계에 재배하고 생산된 음식의 3분의 1이 생산부터 소비에 이르는 사슬에 끼지 못하고 폐기된다. 이렇게 낭비하는 식량이 만들어낸 온실가스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전체 온실가스의 8%에 이른다. 대량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잘생긴 것만 살아남다보니, 인간의 미적 선택이 더 많은 생산과 유통을 부추긴다. 과도한 소비 탓에 냉장고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음식이 썪어간다.
  

주말농장 수확. 넘치면 나누는 기쁨 ⓒ 최수경

 
내가 먹을 작물을 키우면 식탁이 변한다. 화석 연료와 살충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에 의존하게 되면 더 적은 노력으로 생산이 가능하다. 내 시간과 땀이 들어간 식량인지라 음식 쓰레기가 될 확률이 낮다. 과하다 싶으면 이웃과 나누는 기쁨도 있다. 

노(勞)작 활동은 지덕체(智德體) 중심의 교육에 포함해야 할 중요한 덕목(勞)으로, 아이들이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노동을 통해 자연의 순리를 터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 탄소발자국을 줄이는데 동참할 수 있다.

이루 열거하자면 백 가지도 넘을 혜택이 있다. 올 봄 주말농장이 아니어도 좋다. 베란다 텃밭도 좋고 옥상텃밭도 좋다. 농사 준비는 입춘(2월 4일)이요, 농사의 시작은 춘분(3월 21일)이니, 마음먹은 때를 놓치지 말자. 올 해는 나의 식탁을 좀 바꿔보면 어떨까. 
덧붙이는 글 필자 최수경은 자연해설로 시작해 환경운동을 거쳐 환경교육가가 되었다. 사대강사업이 계기가 되어 금강에 빠져, 금강트레킹, 여울트레킹이라는 영역을 개척했다. 현재 금강생태문화연구소 숨결에서 환경교육, 생태관광, 금강물환경과 관련한 일을 한다. 글을 쓸 때, 자연의 메시지가 실린 미세한 떨림을 감지해 쓰고자 하며, 저서로 <금강길 이야기길>, <더 자연스러운 자연해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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