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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국화차 한 잔으로 아침을 엽니다. 자칭 '우울증'을 된통 겪었던 작년부터 시작한 아침을 여는 '루틴'입니다. 몇 번씩 자다 깨고를 반복하며 긴 밤을 보내고 난 아침, 눈을 뜨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하루를 시작하는 상쾌함 대신, 오늘 하루를 또 어찌 보낼꼬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벌써 몸이 무겁습니다.

두근 반 세근 반 하며 뛰기 시작하려는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합니다.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게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 국화차 한 잔을 마십니다. 따뜻한 국화차 한 잔이 온 몸을 덥힐 때 쯤이면 마음도 한결 차분해 집니다. 

그렇게 벌써 1년여 수시로 내 마음을 침범해 오는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처지이기게 조미자 작가의 그림책 <불안>은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커다란 새가 되어 버린 '불안' 
 
불안
 불안
ⓒ 핑거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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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속의 주인공 '나'는 때때로 어지럽게 하고, 때때로 무섭게 하는 그것, '불안'을 만나보기 위해 용기를 냅니다. 저 밑바닥에 있는 그것의 끈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지요. 그랬더니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한 '불안'이 나타납니다. 조류 공포증이 있는터라 저는 거대한 새 한 마리로 표현한 '불안'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아주아주 무서운 너, 불안은 나를 쫓아다닙니다. 숨어도 찾아냅니다. 끈을 왜 잡아당겼을까 후회도 해보지요. 머릿속이 온통 불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지요. 그러다 지쳐떨어진 내가 잠이 듭니다. 깨어나서 다시 끈을 잡아 당겼는데, 거기엔 작아진 '너', 불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작아졌을 뿐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여전합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불안'의 딜레마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요. 

결국 주인공 '나'는 불안을 '벗'삼기로 합니다. 두려울 때도 있지만, 고민도 나누고, 무서움도 나누면서. 불안을 내 마음의 한 모습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조미자 작가는 '벗삼는' 것으로 '승화'시킵니다. 

'불안'을 받아들인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심리치료사 힐러리 제이콥스 헨델의 <오늘 아침은 우울하지 않습니다>에서는 불안을 '신호'라고 정의내립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움, 분노, 슬픔, 혐오감, 기쁨, 흥분과 같은 핵심적인 감정이 있는데, 이들 감정 중 부정적인 감정이 나타나면 동시에 그를 억제하고자 하는 감정이 나타나게 되고 이들 여러 감정들이 충돌할 때 '불안'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은 사랑하며 미워하는 것처럼 동시에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섞이기도 하는데 이때도 '불안'은 예외없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불안'은 <불안> 그림책의 주된 색채인 붉은 색처럼 우리 맘의 '빨간 신호등'과도 같습니다. 감정이 과잉된 상태라는 것을 알려주는 빨간 신호등인 것지요.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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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제이콥스는 불안의 이면에 자리잡은 나의 감정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안은 가볍게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리는 정도지만 과해지면 숨이 가빠오고 열이 나고 온몸이 마비되는 등 견디기 힘든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압도하는 불안을 직시하고 그 안에 숨겨진 진짜 내 감정을 직시하는 것, 그것이 불안과 '벗' 삼는 첫 발자국입니다. 

모든 심리적 해결 방법의 '첫 발자국'은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불안과 같은 드러난 감정의 이면에 있는 진짜 감정을 '시인'하는 과정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이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래서 슬프다는 걸 인정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하지만 막상 죽을 것처럼 옭죄어오는 불안 이면의 진짜 감정을 '직시'하면 한결 편해진다고 힐러리 제이콥스는 권합니다. 마치 우리가 주사를 맞을 때 힘을 빼면 한결 덜 아픈 것처럼 말이죠. 

불안, 우리의 숙명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읽다가 무릎을 탁 친 적이 있습니다.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火水未濟)에 대한 설명 때문이었습니다.

복잡한 주역 괘의 설명은 차치하고 여우가 강을 다 건널 즈음 꼬리를 적신다. 이로울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로 보면 좋을 게 없는 말입니다. 이제 강만 건너면 된다는데 꼬리가 물에 빠져버렸다니, 우리 속담으로 다 된 밥에 코빠뜨리는 격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게 바로 세상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사의 '완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지요. 꼬리를 적시는 실수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라고요. 실수를 하고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이런 끝없는 미완성을 불교에서는 '윤회(輪廻)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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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적으로 '불안'은 바로 꼬리를 적실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숙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되는 것보다는 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세상, 을 나의 존재라는 작은 배로 헤쳐나가야 하는 처지에서 어떻게 삶이 불안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마음대로 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며 '희로애락'을 겪게 되고, 그 감정에 휩쓸리려 하지 않다보니 '방어기제'로서 불안이 자라 커다란 괴물 새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결국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의지가지없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불안정성에서 오는 여러 가지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그대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의 해석이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64괘의 마지막 괘, 화수미제를 '낭패'가 아니라 삶의 당연한 모습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다시 시작하는 가능성으로 풀어내셨으니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말보다 더한 '희망'이 있을까요. 

신영복 선생님은 다시 시작하는 방법으로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인간 관계를 디딤돌로 다시 새로운 첫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겪는 불안의 많은 부분은 나만이 겪는다는 고립무원의 절박함입니다. 하지만 한 발자국만 떨어져 보면 저마다 새 한 마리씩을 키우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지만 그래도 또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존재론적인 숙명의 또 한 측면입니다. 고립된 나를 넘어 너와 내가 관계의 점을 이을 때 우리가 키우는 불안은 한뼘 더 작아지지 않을까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불안 - 2020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조미자 (지은이), 핑거(2019)


태그:#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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