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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진 가락으로 적벽가를 완창했다. 소리와 아리니(말), 발리(몸짓)는 완벽했다. 목소리는 허스키했고 '군사 설움 타령'에서는 부모님과 처자식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의 설움을 애절하게 토해냈다. 그는 소리꾼이었다.

고향 화순에 사시는 어르신이 요양병원에 계시다는 것이다. 고향에 갔다가 들은 소식이다. 뭐 나이가 들면 병이 나고 돌볼 사람이 없으면 요양원에 가는 것은 요즈음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누구보다도 그분의 생애를 잘 아는 까닭이다. 너무 드라마틱 하다.

타고난 재주와 끼가 있었다. 구들장을 놓는 장인(?), 요즘 같으면 설비기사였다. 그는 암석의 종류와 결을 알았다. 마음에 드는 석재를 찾으면 틈새(결)에 쐐기를 박아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구들장을 쪼개내곤 했다. 100여 호가 넘는 마을의 온돌방은 모두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설이 지나고 명절 분위기가 다소 진정될 즈음, 튀밥 기계를 짊어지고 마을 어귀에 자리를 잡았다. 장작불에 기계를 돌리고, "펑" 소리와 하얀 수증기 그리고 쇠망 속에 터지는 튀밥, 아이들은 귀를 막고 도망갔다가 우르르 몰려들곤 했다.

한 마디로 농부이면서 석공이고 예술가다. 그냥 농사만 짓는 것이 아니다. 수익성 있는 작물을 재배했다. 60-70년대에 먹거리가 아닌 다른 종목을 재배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모험이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기다.

가을이면 미나리를 심고 봄이면 왕골을 심었다. 왕골 줄기를 쪼개어 자리, 방석, 모자를 만들어 화순, 능주 등 5일장에 내다 팔았다. 그가 만든 자리는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값이 비싸 마을 사람들은 감히 넘겨다볼 수 없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무진 농악 단에서는 대보름 굿인 지신밟기 굿을 했다. 지신밟기는 액을 물리치기 위한 우리 새시 풍속 중 하나다. 옛날 고향에서 벌이던 마당굿이 생각나 뒤따라 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이 전통 마저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든다.
▲ 지신밟기 몇 년 전만 해도 전통문화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무진 농악 단에서는 대보름 굿인 지신밟기 굿을 했다. 지신밟기는 액을 물리치기 위한 우리 새시 풍속 중 하나다. 옛날 고향에서 벌이던 마당굿이 생각나 뒤따라 다녔다. 그러나 이제는 이 전통 마저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든다.
ⓒ 문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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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농악단을 구성하여 대보름이면 각 집을 돌아다니며 액을 물리치기 위한 지신밟기, 시암 굿, 조앙 굿을 하였다. 어린 시절 졸졸 따라다니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였다. 뿐만이 아니다.

장례식에도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매장을 했다. 마을에서는 상포계를 조직해서 상여도 매고 봉분도 만드는 등 상부상조했다. 1997년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다. 그분이 상여 소리를 얼마나 구슬프게 메기던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든이 다 된 나이에도 기염을 토했다. 2007년 농촌진흥청에서 개최한 전국 짚, 풀 공예품 공예전에서 화순군 대표로 출전해 행운상을 받았다. 화순 향토 사료에 기록된 이름난 상쇠꾼이기도 하다.

백암 마을 주민 450여 명 가운데 원주민은 70여 명, 대부분 혼자 살거나 요양병원에 가 계신다. 노인들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내일모레가 명절... 소리꾼이고 석공이면서 농부인 그는 내 가슴속 깊이 자리한 고향이다.

태그:#지신밟기, #문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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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삶의 의욕을 찾습니다. 산과 환경에 대하여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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