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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기자말]
조선 어민들의 생계수단이었던 2~3톤급 목선
 조선 어민들의 생계수단이었던 2~3톤급 목선
ⓒ 군산 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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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광무 3년(1899) 개항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한반도 전 어장이 개방된다. 이는 조선의 황금어장은 국권피탈(1910) 전 이미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일제는 어로 영역을 조선의 동·서·남해안 연해로 확대하고, 조선 어민의 어획 분야까지 손을 뻗친다. 일본 어민의 침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자 조선 어민들의 어업활동은 더욱 위축된다.

을사늑약(1905) 이후 일제는 어장뿐 아니라 재산권으로서의 어업권을 확보하기 위해 온갖 술책을 동원하였다. 조선 시대 한반도 연해에서는 어장(漁場)과 어기(漁基)를 소유할 수 있었고 매매도 허용됐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어장도 토지처럼 외국인은 소유하지 못 하도록 법으로 규정하였다. 외국과 장정협의 때도 허락하지 않았다.

1908년 10월, 대한제국 내정을 장악한 일제 통감부는 어업에 관한 법안을 만들어 한국 정부와 강제로 조인, 일본인도 토지와 어업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해 11월에는 '조선 어업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어업권을 면허하고 허락해주는 권한을 완전히 거머쥔다. 이후 일제는 조선 어민의 어업권과 객주들의 영업권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1911년 일제는 조선 어민들의 수산업 발전을 명분으로 '어업법'을 보완한 '조선 어업령'을 개정하고 이듬해 시행한다. 이는 수산자원 수탈 확대를 위해 만들어진 법률로 어업권 제도와 어업허가 제도를 축으로 어업을 통제·정비하는 근대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 주도 수산업 성장 및 국내 수산 자원 수탈의 근거법이기도 했다.

일제는 1912년 어업조합과 수산조합의 설립에 관한 규정을 근거로 '어업조합 규칙'을 제정, 공포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경남 거제에 어업조합을 설립한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어업조합이었다. 이후 전국 도서 지역 어촌과 항구도시에 조합이 만들어진다. 일제는 조선의 수산업 발전을 내세웠으나 내막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꼼수에 불과했다.

군산 어업조합, 조선총독부 지령에 따라 출범
 
초창기 군산어업조합 건물
 초창기 군산어업조합 건물
ⓒ 군산 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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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역 어업조합은 섬에서 시작됐다. 1917년 8월 어청도에 어업조합이 도내에서 처음 설립된 것. 이후 장자도, 개야도, 오식도 등에 조합이 설립된다. 그러나 조합원 수가 적어 1931년 합병하였다. 이후 미면 어업조합으로 개칭했다가 옥구군 연안지구와 군산부, 미면, 연도까지 포함하여 1933년 11월 4일 총대회의 결의로 군산 어업조합이 출범하게 된다.

군산어업조합 임원은 대부분 일본인으로 구성됐고, 직원은 조선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회원도 조선인이 훨씬 많았다. 1934년 5월에는 전북 수산주식회사가 운영하던 어시장을 5만 원에 인수, 동빈(째보선창) 어시장 내에서 공동판매사업을 병행한다. 동빈 어시장은 주로 조선인들이 이용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군산 지역 어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중 어청도 어업조합 설립자는 일본인 무부정웅(武部靜雄)이었고, 군산어업조합 초대 조합장도 광부가팔(光富嘉八)이었으며, 2대 조합장은 좌등(佐藤: 군산 부윤)이었다. 대부분 직원과 조합원은 조선인으로 채워져 있었다지만 한 걸음만 들어가 보면 조선 어민의 뜻을 모아 결성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 지령에 따라 출범했음을 알 수 있다.

객주조합, 일제에 의해 '문옥조합'으로 재조직
 
군산 객주조합 혁신총회 전하는 1928년 7월 3일 치 ‘동아일보’ 기사
 군산 객주조합 혁신총회 전하는 1928년 7월 3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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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群山)에 잇어 물산객주업자(物産客主業者)로 조직(組織)된 객주조합(客主組合)은 개항 초(開港初)에는 만흔 활기(活氣)로써 동조합(同組合)의 재산(財産)도 상당(相當)히 잇섯고, 각방면(各方面)으로 만흔 편의(便宜)를 도아오든바 몃헤 전(前)부터서는 여러 가지 형편상 침체상태(形便上 沈滯狀態)에 함(陷)아얏고...(아래 줄임)" -(1928년 7월 3일 치 '동아일보')

신문은 침체상태에 있던 군산 객주조합이 그해 6월 28일 오후 5시 동(同)조합 회관에서 혁신총회(革新總會)를 개최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원형 전 조합장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 객주들은 상호 간 의견을 개진한 후 임원진을 개선하였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조합장(이춘성) 부조합장(이성서) 회계 겸 서기(편무송) 평의원(김홍두 양석주, 이원형, 손세환 등) 등이었다.

군산 지역 객주들은 구한말 '상회사' 성격의 조합을 구성하고 혁신하는 등 온 힘을 기울였음에도 일제의 방해 공작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활기를 잃어갔다.

군산어업조합 출범 이후 객주조합은 일제에 의해 '문옥조합(도매업자 조합)'으로 재조직 된다. 이어 일제는 객주들의 취급 품목에 따라 '곡물조합'과 '해물조합'으로 갈라놓는다. 따라서 30~40년대 군산에는 곡물문옥조합(穀物問屋組合)과 해물문옥조합(海物問屋組合)이 존재하게 된다. 이 모두가 조선 객주들의 영업권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객주 한 사람이 위탁, 수탁업을 하면서 상대하는 어민은 십 수 명에서 수백 명까지 다양했다. 어민들이 급할 때 무담보 신용으로 영어자금을 대줬던 그들은 단골 거래처와 끈끈한 인연을 맺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 문턱이 산처럼 높았던 일제강점기, 객주들은 단골들의 가족 생활비, 시코미(출어 준비자금), 어선 수리비는 물론 설빔과 경조사비까지 챙겼던 것. 단골 관계를 2~3대째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단다. 그런데도 일제는 조선 객주들을 악덕 고리대금업자로, 사라져야 할 집단으로 여겼다.

조선 객주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조선총독부
 
 군산시 중동 서래포구마을 벽화
  군산시 중동 서래포구마을 벽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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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객주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오던 조선총독부는 1931년 '조선어업보호 취체규칙'을 제정, 공포한다. 군산어업조합 출범 2년 전으로 일제는 취체규칙을 통해 조선 객주들이 해산물을 위탁받아 도매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어획물 경매기관인 어업조합을 주요 지역에 설치하여 생산과 소비를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

기록에 따르면 군산어업조합은 출범 초부터 조선인 객주들을 몰아내기 위해 여러 조처를 하였다. 그들은 군산 객주들을 사채 금융과 수산물 거래 기능을 병행하는 고리대금업자로, 수산업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존재로 규정하였다. 객주들 세력이 계속 확대되면 수산물 위탁판매를 비롯해 보관업, 숙박업, 융자 등을 독식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객주들은 대부분 출매선(상고선, 장삿배)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고선은 어장에서 작업하는 어선 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어획물을 싼값에 매수하였다. 그리고 인천, 강경, 법성포 등의 포구로 귀항해서 판매하였다. 이에 어업조합은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위판고 증진을 위해 객주들을 어시장에서 몰아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2월 이사로 부임한 가타야마(片山)는 군산어업조합 규율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직원과 조합원들 질서 확립을 위해 복무 및 징계 규정을 제정하고, 조합의 본질적 업무인 위판고 증진에 역점을 두는 내용이었다. 모두가 뿌리 깊은 객주 세력을 둔화시키기 위한 조치이자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그해 6월 해산물 객주제(客主制) 폐지 결정이 전라북도 도령(道令)으로 고시된다.

이후 군산어업조합은 모든 관내 어획물은 조합을 통해 판매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강경 등에 집산되는 어획물은 군산에 유치하도록 조치한다. 이 모두가 어업조합에 위탁판매소를 추가 설치하여 조선인 객주들의 기반을 일거에 무너뜨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후 조선 객주들은 대거 몰락했으며 일부는 일본인 자본가와 행보를 함께 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참고문헌 및 책자: <군산수협 70년사>(2004) 군산디지털문화대전, 동아일보, 조선일보,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태그:#군산 어업조합, #객주조합, #문옥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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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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