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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쯤, 핸드폰이 부르르 떨린다. 핸드폰에 6학년 아들의 담임 선생님 이름이 뜬다. 웬일이시지? 중학교 배정은 오후 3시에 받으러 오라고 했는데? 썩 좋은 예감은 아니다. 조금 있으면 알게 될 사실을 미리 알려주시려고 오전부터 전화를 하실 리는 없으실 텐데...?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배정 결과가 나왔다며, 반 24명 중 3명이 1지망 희망교로 배정이 안 되었다고 하셨다. 그중 1명이 내 아들이라고. 혹시 오후에 배정표 받고 실망하실까 봐 먼저 연락을 드리는 거라고.

실망을 먼저 하는 것과 나중에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감수성이 풍부한 아들 녀석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지 걱정이 앞섰다. 선생님은 오후에 직접 알리겠다시며 아이에게 미리 알리지 말아 달라는 숙제를 주시고는 끊으셨다.

중학교 1지망에 배정이 되지 않은 아들
 
한 중학교 복도 내부
 한 중학교 복도 내부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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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항상 고민이 된다. 아이가 맞닥뜨릴 가까운 미래에 아이가 실망할 만한 일을 내가 먼저 알게 되었을 때, 미리 알려주어 충격을 완화해 줄 것인지, 어차피 겪게 될 일, 스스로 맞서게 할 것인지.

배정원서를 쓸 때 6지망까지 써야 했던 중학교들 중 아이가 절대 가기 싫다고 했던 학교였다. 싫어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니, 그 학교가 공부를 못하는 학교이기 때문이랬다.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가 공부 못하는 학교에 가기 싫다니, 큭,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었다.

6개 중학교 중 1지망으로 쓴 학교를 제외하면 아이가 싫다던 학교가 비교적 집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서 첫 아이 배정 원서 쓸 때는 2지망으로 썼던 학교이다. 그런데 아들은 한사코 싫다고 해서 먼 거리에 있는 학교들까지 밀리고 밀려 겨우 4지망에 썼던 것인데, 덜컥 배정되었으니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결과를 미리 안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좌불안석하며 흘낏흘낏 아들 녀석 눈치를 살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은 천하태평인데. 짐짓 무심하게 1지망 학교가 안 되면 어떨 것 같으냐고 물어보니 슬플 것 같다고 한다.

1지망이 안 될 수도 있다고, 2지망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원하지 않는 학교로 배정받을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딸아이 였다면 대번에 무슨 낌새를 알아차렸을텐데 아들 녀석은 순진한 건지, 우둔한 건지, 아무 눈치를 못챘다. 그게 더 마음에 걸렸다.

내가 20대 때 치렀던 중요한 시험에 두 번 떨어지는 동안, 평소 예지몽을 꾸시던 친정 엄마는 내가 시험을 보러 가기 전날 밤에 이미 결과를 예감하는 꿈을 꾸시곤 하셨다.

첫 번째 시험 일 전날 밤에는 내가 어떤 서류에 도장을 찍기만 하면 성사될 일이었는데, 아무리 도장을 찍어도 도장이 안 찍히더라는 꿈을. 두 번째 시험 전날 밤에는 나와 함께 방앗간에 떡을 받으러 갔는데 방앗간 주인이 시루떡을 내 앞에 턱! 뒤집어엎더니, 이번엔 떡이 잘 안 되었으니 다음엔 제대로 만들어 주겠다라던 꿈을.

물론 엄마는 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에 내게 이 꿈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는 않으셨다. 이 꿈에 대해 안 것은 항상 불합격 결과를 받아 든 후였다. 불만족스러운 시험 결과에도 혹시나, 하고 노심초사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딸을 보며, 이미 느낌적으로 결과를 예감하셨던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엄마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예지몽을 꾸신다는 것을 아는 딸이 무슨 좋은 꿈 꾼 것 없느냐고 물어보았을 땐 또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그렇게 힘들던 합격이 다른 종류의 시험에서는 한 번에 붙었으니, 다음에 제대로 만들어 주겠다던 엄마의 방앗간 시루떡 꿈은 우리 집에서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다.

"엄마 나 깨달은 게 있어"

과연 중학교 배정표를 받으러 간 아들 녀석이 잠시 후 전화를 걸어와 OO중학교로 배정되었다며, 꺼이꺼이 목놓아 운다.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나는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홀로 마주한 아들 녀석의 실망은 내 예상보다도 더 컸나 보다. 감정이 격해질 때는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 분명히 알면 한결 마음을 추스르기가 쉬워진다.

"아들, 원하던 학교 안 되어서 많이 속상했구나."

아들 녀석이 이 말을 들으니 어, 하고서는 더 격하게 운다. 딸이었다면 주저리주저리 말로라도 자기감정을 풀어내련만. 부족한 어휘력과 변변치 않은 말주변으로 감정 처리가 더 버거운 녀석. 괜찮아, 어느 중학교에서건 네가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 하니 또 어, 하고선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지금은 중학교 배정이 일생일대의 일인 아이에게 이것은 앞으로의 네 삶에서 먼지 같은 일에 불과하다는 말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말일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 하나, 둘 경험으로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 또한 지나갈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날이 오겠지. 지금은 그저 괜찮다는 말이 필요한 때일 뿐이다.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많이 진정된 모습이었다. 그렇게 속상했어도 담임 선생님 앞에서는 꾹 참았다니, 감수성 대왕인 아들이 그래도 이젠 많이 컸나 보다.

아이는 체육관 가는 대신 매일 30분 걷기를 하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엄마보다 이제 조금 더 크기 시작한 아들 녀석이 엄마와 나란히 보조를 맞추어 걷다 말한다.

"엄마, 나 오늘 깨달은 게 있어."
"뭔데?"
"어떤 일은 무조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만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인 모양이다. 앞으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생길 텐데, 그래도 중학교 가기 전에 인생의 깨달음을 하나 얻었으니, 녀석, 제법이다. 아들, 넌 중학생이 될 자격을 벌써 갖췄구나!

태그:#중학교배정, #초등6학년, #아들, #엄마,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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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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