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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 피 묻은 태극기  봉오동 전투(1920. 6. 7.)당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이 썼던 태극기
ⓒ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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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독립이라는 애국심만으로 모여든 독립군이 훈련이나 병참 어느 것 하나 변변할 리 없었다. 일제의 정예 부대를 상대하기에는 여러 면에서 불리했다. 또한 독립군의 출신 지역이나 계층도 천차만별이었다. 

독립의군(獨立義軍)의 연령은 34, 5세 이하 20세 정도였고 주의(周衣) 등을 개조한 양복 및 권각반(券脚絆)을 했으며 모포를 등에 지고 한 켤레의 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경우 군정서군(軍政署軍)과 같이 정규 복장이 갖추어진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농부나 사냥꾼의 행색을 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일본군은 독립군 식별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주석 10)

만주 각지에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산재하다보니 세 확장을 둘러싸고 충돌과 불상사가 잇따랐다. 강폭한 적을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우군끼리 통합과 연대가 필요했다. 1920년 3월 25일 최운산 형제가 주도하는 군무도독부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과 편제를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5월 3일 군무도독부의 본거지인 봉오동에서 군무도독부와 북로군정서ㆍ대한국민회ㆍ신민당ㆍ광복단ㆍ의군단 등 주요 6개 독립운동 단체의 간부가 모여 불상사를 미연에 예방하기 위하여 협의회를 구성하고 18개 조목의 약정을 맺었다.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 각 기관내 군적의 등록은 상호 강제로서 편입시키지 못함.
△ 차후로 지방기관 설립과 인원 모집은 민의에 좇을 것.
△ 각 기관은 모금의 필요가 있을 때는 협의회의 의결에 의할 것.
△ 혹 기관과 혹 기관의 쌍방 원의로서 연합할 시는 협의회에서 찬성할 것. 
△ 각 기관의 지방기관에 대한 상호침해는 할 수 없음.
△ 각 기관의 하기관을 불문하고 경실 있을 시는 합력 구원할 것. 
△ 금일 명령에 내참치 않은 단체에 대하여는 상호 성의껏 권고하여 본회에 참가시킬 것.
△ 매년 1월 15일을 협의회 정기회기로 정할 것.
△ 특별 사항이 있을 때는 2개기관 이상이 동의하면 특별회를 개최할 것.  
△ 협의회 의원은 각 기관에서 2인씩 매차 파송할 것.
△ 이상 조약에 위반하는 기관이 있을 시는 2차 권고로 반성치 않으면 최후 수단을 사용할 것.
△ 상 서약 기간은 래 11일로 함. 차회 조직은 음 3월 15일. (주석 11)

 
최운산 장군(본명 최명길)은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통합부대였던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존재이지만 아직도 교과서에 그의 이름은 실리질 않았다.
▲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군 양성에 바친 항일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본명 최명길)은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통합부대였던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존재이지만 아직도 교과서에 그의 이름은 실리질 않았다.
ⓒ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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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 무장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들이 최운산 형제들의 본거지인 봉오동에서 18개 조항의 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5월 28일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창설했다. 

군무도독부와 홍범도가 영도하는 대한독립군ㆍ안무가 지휘하는 대한국민회 국민군(약칭 국민회군)이 봉오동에서 회동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고 다음과 같은 지도체제를 편성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   부장(府長) 최진동
                  부관      안  무

북로제일군사령부 부장(部長) 홍범도
                  부관      주  건
                  참모      이병채
                  향관      안위동
                  군무국장  이  원
                  군무과장  구자익
                  회계과장  최종하
                  검사과장  박시원
                  통신과장  박 영
                  차중과장  이상수
                  향무과장  최서일
                  피복과장  임병극
                  제1중대장 이천오
                  제2중대장 강상모
                  제3중대장 강시범
                  제4중대장 조권식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 (주석 12)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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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연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의 최고책임자인 부장(府長)에 최진동이 선임될만큼 최운산 형제들의 역할이 많았다. 또한 그동안 진지를 마련한 봉오동 기지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독립군이 연합부대를 편성하는 과정에서도 갑산ㆍ해산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와 관련 미국의 관전(官電) 통신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고 상하이 『독립신문』이 소개했다. 

북간도의 독립군 2천은 길림(吉林)으로 도(道)를 가(假)하여 두만강을 도강 북한지방에 진입하여 일본 군경을 야습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전투에서는 일군을 자그만치 3백이나 사살하고 나머지 4백을 궤주시키고 회령을 점령한 듯하다. (주석 13)
  
두만강 건너 북한 함북 종성, 일본군 나남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는 이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으로 쳐들어왔다(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두만강 건너 북한 함북 종성, 일본군 나남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는 이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으로 쳐들어왔다(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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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은 이 시기 무장독립군의 총사령부와 같은 본부기지가 되었다. 교육자 김정규(1881~1953)는 자신의 일기(1907~1921)에 이즈음(1919.3.16~11.14)의 봉오동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10월 25일 신축……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향하여 석현강(石峴江) 입구에 도착했다. 바로 합수의 동쪽 길이다. 강의 북쪽에 하나의 신령한 산이 있는데, 이름이 초모정자(草帽頂子)이다. 산록 아래 토성 하나를 쌓아 놓았는데, 현재 수비하는 청나라 경찰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서쪽으로 연길(延吉)과 통하고 남쪽으로 육진(六鎭)으로 나가며 동쪽으로 훈춘(琿春)과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 왕성(王城)을 지나게 되어 있어, 사면이 험난한 산임에도 사방으로 통로가 있으니, 까닭에 청나라 군대 4, 50명이 밤낮으로 방어하며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5리 쯤 가자 봉옥동(鳳玉洞)이 있었는데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70여 인가가 있었다. 최명록(崔明祿) 씨 댁을 찾아갔다가 마침 이희일(李羲一) 씨를 만나 함께 묵었다. (주석 14)


주석
10> 오세창, 앞의 책, 146쪽.
11> 조선총독부 고경(高警) 제16044호 「간도지방항일6단체 대표협의회사항 정보의 건」, 대정 9년 6월 2일.
12> 신용하,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 203~204족, 지식산업사, 2003.
13> 『독립신문』, 대한민국 21년 5월 8일.
14> 신주백, 앞의 글,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태그:#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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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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