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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 현장으로 알려진 '봉오골 저수지'. 그러나 실제 전투는 이곳에서 1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봉오동 전투 현장으로 알려진 "봉오골 저수지". 그러나 실제 전투는 이곳에서 1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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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0월 무창봉기를 계기로 폭발한 중국의 신해혁명은 청조의 몰락을 가져왔으나 반동적인 군벌의 등장으로 국정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틈새를 노리고 각지에서 마적이 나타났다. 마적의 성향은 갖가지였다. 일제의 사주를 받고 노략질하는 무리도 적지 않았다.

만주 지역의 마적들은 조선인을 노리는 경우가 잦았다. 중국 관헌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써 가꿔놓은 농작물과 가축을 훔쳐가고 심지어 인명까지 살상하였다. '간도협약'으로 이 지역이 중국령이 되었으나 조선인들은 법망 밖의 에뜨랑제였다.

최운산은 1912년 봉오동에 자위단(自衛団)을 창설했다. 자위단을 창설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군에서 복무를 마칠 100여 명의 사병을 데리고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군 수뇌부에 그만큼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들 사병은 대부분 조선족이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군 양성에 바친 항일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본명 최명길)은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통합부대였던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존재이지만 아직도 교과서에 그의 이름은 실리질 않았다.
▲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군 양성에 바친 항일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본명 최명길)은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통합부대였던 <대한북로독군부> 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동생이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존재이지만 아직도 교과서에 그의 이름은 실리질 않았다.
ⓒ 최운산장군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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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횡행하던 마적들로부터 조선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장작림군을 사직하고 장작림부대에서 중대 규모 이상, 100여 명의 군인을 모집해서 봉오동 사병부대를 창설했다.

- 최운산 장군이 군벌 간의 전투에서 위기에 빠진 장작림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인연으로 인해 장작림과 최운산 사이에 강한 신뢰가 있었고 최운산이 병사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 당시 동북3성 지방의 주민은 대부분 조선 사람이었고 장작림 부대 병사들도 조선인이 많았다. 그들은 중국인인 장작림 밑에 있는 것보다 인품 좋고 재력이 있는 최운산의 휘하로 오는 것을 선택했다. (최운산「연보」)

최운산 일족이 봉오동에 자위단을 창설하고 군사를 모은다는 소문이 나면서 만주는 물론 국내에서도 애국청년들이 두만강을 건너왔다.

한일병탄 이후 간도로 넘어오는 애국청년들이 꾸준히 늘었고 사병부대 창설 이후 한일병탄 이후 봉오동은 독립군을 양성하는 '봉오동사관학교'가 운영되었다. 두만강만 건너오면 만나게 되는 가까운 봉오동에서 무장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훈련 양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 젊은이들이 독립군이 되기 위해 계속 봉오동으로 모여들었다. (최운산「연보」)

안타깝게도 '봉오동사관학교'의 실체는 아직 연구되지 않고 있다. 이회영 일가 등이 1911년 지린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흥강습소(이듬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던 시기와 비슷하다. 

최운산이 봉오동을 근거지로 삼아 자위단과 봉오동 사관학교를 시작할 즈음 국제정치는 요동치고 있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일제는 중국에 있어 이권 확대를 노리고 영일동맹을 이유로 내세워 8월 23일 독일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고,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 청도와 독일령 남양제도를 점령하는 한편 이듬해에는 중국에 대해 「대중(對中) 21개조 요구」를 강요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제 1호 산동성에서의 독일의 이권은 일본이 인수하며 산동성에 일본이 철도를 건설할 권리를 줄 것.
제 2호 여순ㆍ대련의 조차지를 다시 9년 연장하고 남만주ㆍ동부 내몽고를 일본의 세력범위로 할 것.
제 3호 한야평 한양ㆍ대야ㆍ평향(漢冶萍 漢陽ㆍ大冶ㆍ萍鄕) 석탄ㆍ제철회사에 속하는 철과 석탄은 일본이 독점함.
제 4호 중국의 항만ㆍ도서를 외국에 할양하지 않는다고 중국정부는 선언할 것.
제 5호 중국정부의 정치ㆍ재정ㆍ군사고문으로서 일본인을 초빙한다. 중국의 경찰을 중일 합동으로 한다. 중국의 병기 중 일정한 수량을 일본에서 수입하든가 또는 중ㆍ일 합자의 병기창에서 제조한다. 화남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준다. 북건성에 대한 외국의 투자에 관해서는 일본이 우선권을 가진다. 중국에서의 일본인의 포교권을 인정하며 일본인의 병원ㆍ사원ㆍ학교도 자유롭게 건립할 수 있다. (주석 4)


일제의 '21개조 요구'는 중국인들을 분노케 하였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데다 다시 국가(국민)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처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반일감정의 고조는 조선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반가운 현상이었다. 


주석
4> 희전광의(姬田光義) 외, 『중국현대사』, 177쪽, 일월서각, 198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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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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