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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에 정착, 농경 공동체를 이루고 이후 고대국가를 형성하기까지의 역사의 공백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된 지난 1년여 기간 동안의 현장 방문과 탐구활동의 결과물이다.

1. 현실: 관심 너머에 묻혀 있는 소중한 유산들

2019년 겨울, 궁금함을 견딜 수 없어 집을 나섰다. 김포를 소개하는 책자에서 운양동 몇 기의 고인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책에 정확한 위치나 주소가 나와 있지는 않고 심응사당 주변이라고만 나와 있어서, 휴대폰 앱에 심응사당을 입력하고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도착해 주변을 돌아보니, 근처에 용도를 짐작하기 어려운 건축물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안내판을 확인했다. '김포 양촌·운양동 분구묘 유적'이었다. 주로 원삼국시대 마한의 지배층의 것으로 보이는 수십 여 기의 무덤들 가운데 2기를 발굴한 모습을 재현, 전시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정작 고인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안내 표지판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전시장 바깥을 내다보니, 잔디밭 위에 소형 승용차만 한 검붉은 바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얼른 바위덩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너댓 개의 반구(半球)들이 패여 있었다. 다름 아닌 '성혈(性穴 또는 알구멍)'이었다.    
 
김포시 운양동 심응사당 인근의 고인돌
▲ 사진1.  김포시 운양동 심응사당 인근의 고인돌
ⓒ 김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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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쉽게도 최초 발견된 위치라든지, 전문가의 감식 의견 등 그 고인돌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응사당 돌담 아래에 있는 다소 크기가 작아 보이는 -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땅 밑에 얼마 만한 크기로 묻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기의 고인돌들도 마찬가지였다. 족히 3천 년 전에 만들어졌을 고인돌,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는 감동보다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2019년 말 찾아가 본 경기도 기념물 제91호로 지정된 3기의 고정리 지석묘는 그나마 발굴과 보존이 잘 되어 있었지만, 지방도로 변에 서있는 표지판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 표지판을 따라 150미터가량 떨어진 현장까지 올라가는 내내 '이 길이 정말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길인가?' 싶을 정도로 외지고 을씨년스러웠다.
 
김포시 통진읍 고정리 지석묘 안내표지판
▲ 사진2. 김포시 통진읍 고정리 지석묘 안내표지판
ⓒ 김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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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이 2007년에 발간한 '경기도 고인돌'은 위에서 소개한 운양동과 고정리를 포함하여 시암리, 석탄리, 가현리 등 김포 전역에 분포하고 있는 37여 기의 고인돌과 함께 경기도에서 발굴한 총 621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후 2000년 3월 통진읍장실에서 만난 신중균님에게서 들은 실상과 그분과 함께 방문한 고인돌 야적 현장은 가히 충격이었다. 그분은 1983년 김포 가현리 니탄층에서 탄화 볍씨를 발견하였고, 이후 서울대 임효재 교수를 비롯한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김포가 기원전 3천년경 한반도에서 최초로 쌀을 재배한 곳임을 입증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韓國 古代 稻作文化의 起源 – 金浦의 古代米를 中心으로', 임효재, 학연문화사, 2001). 신선생님은 젊었을 때 자신이 살던 가현리 등 김포 일대에 고인돌이 지천에 널려 있었는데, 그동안 대부분이 건축용 자재 등으로 쓰이는 등 대부분이 훼손되고 말았다며, 안타까운 마음에 사비를 들여 임시로 모아 놓은 고인돌들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김포시 양촌읍 흥신로 고인돌 무더기
▲ 사진3. 김포시 양촌읍 흥신로 고인돌 무더기
ⓒ 김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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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방문한 양촌읍 흥신로 132번길과 농수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폐 건축자재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그 한 편에 고인돌에 쓰였던 스무 개가량의 바위들이 야적되어 있었다. 덮개돌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위들 중에는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할 것으로 짐작될 정도로 큰 탱크만 한 것도 있었다. 그는 이 고인돌들도 그나마 이렇게 보관해 놓지 않았으면 벌써 건축자재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실상을 십여 장의 사진에 담은 뒤 얼마나 많은 고인돌들이 훼손되고 사라졌을까 생각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니탄층에서 나온 한반도 최초의 재배벼를 기념하여 통진읍마송리에 건립한 '토탄-농경유물전시관'은 상시 운영이 아니라 방문객이 예약을 하고 방문할 때만 담당직원 1명이 나와서 안내하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반도 벼농사의 기원과 농경문화를 설명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이렇게 찾는 이도 거의 없고, 최소한의 인력과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는 현실을 보고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토탄농경유물전시관
▲ 사진4.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토탄농경유물전시관
ⓒ 김경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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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김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어쩌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나라 역사, 세계사를 배우고 접하며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소환되었다: 고조선은 언제 건국되었나? 한반도에 언제부터 인간이 살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 두더라도, 삼한(三韓)이 들어선 기원 전 100년경까지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은 어떤 형태로 정착하고 살아왔을까? 어느 날 갑자기 이 땅에 삼한이 성립한 게 아니라면, 삼한이라는 고대국가의 형태를 처음 갖추기까지 정착 공동체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삼한 이전까지 그들은 문자도 없고 그래서 역사적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로 수렵과 채집을 통해 생존하던 야만인이었을까? 중국에서는 이미 수천년 전부터 상형문자를 쓰고 한자가 만들어져 사용되었는데, 그것들이 한반도에 살던 우리 민족에게는 왜 그렇게 늦게 전해진 것일까?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기 이전까지의 한반도는 문명이 도래하거나 싹트지 않은, 그저 깬석기를 거쳐 기껏해야 간석기 정도를 사용하던 야만인들이 살던 원시사회였다고 하는게 맞는가?

문명에 대한 정의와 기준은 왜 이렇게 일정하지가 않지? 메소포타미아문명 등 세계의 대표적 고대문명들이 생겨나던 때에 한반도는 어떠한 문명적 차원의 움직임도 없었고, 중국 황하문명의 곁불도 쬐지 못한 채 문명의 진공상태에 있었던 것인가? 한반도도 세계의 대표적 문명들이 태동한 지역들과 같은 위도 상에 존재하는데도 말이지?

언젠가 TV에서 어느 외국인 관광객이 서울의 고궁들을 돌아보고 인터뷰를 하면서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은 음식도 정말 맛있고 놀거리와 볼거리도 많아서 다 좋은데, 한국의 역사를 잘 느낄 수가 없어서 아쉬워요. 한국은 어떤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모르겠어요." 나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문명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졌던 많은 질문들이 이 외국인 관광객이 남긴 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지난 1년여의 시간동안 나를 확실하게 붙잡아 두었다. 그렇게 김포 토탄·농경유물 전시관, 인천 검단선사박물관, 전북 고창 고인돌 유적지, 국립전주박물관 등을 방문하고 국내외 여러 저자들이 쓴 역사, 고고인류학 관련 서적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스스로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다.

2. 한민족 역사와 한반도 문명에 대한 궁금증과 내가 찾은 해답들

우선, 인류가 어느 지역에 정착하여 농경공동체를 이루어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고대국가가 성립하기 시작한 시기까지를 '구문명(舊文明)', 고대국가의 출현으로부터 그 이후의 현재까지의 시기를 '신문명(新文明)'이라 칭하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고대국가로부터 출발한 신문명은 우리가 그동안 학교에서 책에서 배웠던 대로 계급사회로 특징된다. 농경을 통해 사유재산이 생기기 시작했고 청동기를 사용하면서 무기가 만들어지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고대국가가 생겨났다. 국가는 국가에 속한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신에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군역의 의무를 요구했고 노예가 생겨났다. 이러한 일들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기록을 위한 수단으로써 문자가 등장하고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고 해자를 팠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러한 신문명 사회가 기원전 4~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고, 그 강물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 하류지역에서 수메르인들이 세운 에리두Eridu, 우르크Uruk 등 고대 도시국가들이 출현했다. 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아카드인 등에 의해 지배계급이 바뀌고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제국 등으로 지배체제가 분화되면서 5천 년 내외의 기간동안 존속하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군사, 세금, 문자가 있었다.

그런데 James C. Scott은 그의 저서 '농경의 배신-원제: Against the grain(2017)'에서 기원전 9500 년경 지구 상에서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비옥한 초승달지대'에 속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충적토 지역에 '길들인 곡물과 동물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 즉 정착 농경공동체가 등장한 시기와, 최초의 도시국가가 출현한 '초기 문명과 결부된 농경-목축 사회들의 합체가 이루어진 시기' 사이에 4000년이라는 놀라울 만큼 큰 시간의 격차가 있었다는 데 주목했다. 그 4000년이라는 기간은 메소포타미아문명, 즉 '신문명' 이전의 시기이다.

Scott은 그 4000년 동안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은 사회진화론적 측면에서 농경과 목축, 수렵과 채집을 넘나들며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풍족함은 굳이 국가의 등장을 필요로 하지 않게 하였고, 따라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왕도 군사도 문자도 필요하지 않은 농경공동체가 유지되었다. Scott은 이러한 단계를 '작은 원형국가' 또는 '원생국가 proto-state라고 정의했다. 또한 그는 인류학자 멜린다 제더의 말을 인용하여 '자유생활을 하고 관리되는 자원과 완전하게 길들인 자원이 혼합된 토대 위에서 안정적이고 상당히 지속가능한 생계 경제(생존 경제, 자급 경제) subsistence economy가 4000년 이상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또한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하는 근동지역이 이러한 측면에서 절대 유일한 지역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P. D. Smith도 그의 저서 '도시의 탄생' (원제: City: A guide book for the urban age) 에서 기원전 5500년부터 2000 년 이상 도시들을 발전시켰으나, 실제로 도시문명의 뿌리가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사실을 고고학계가 밝혀내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한 문명비평가 Lewis Mumford가 쓴 '역사 속의 도시'의 내용을 인용하여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뒷받침하고 있다: '초창기 도시의 구조는 이미 마을 속에서 존재했다. 가옥, 사원, 물탱크, 공용 길, 광장 등은 모두 마을에서 처음 생겨났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식량 생산을 마음대로 조절해 전문적인 장인들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잉여생산물을 비축하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점차 새로운 유형의 사회로 발전해 갔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였던 삼한 이전의 시기, 즉 기원전 100년 이전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는 과연 어떤 형태의 구문명이 존재했을지에 대해 따져보자.

우선 기원전 3000 년경부터 김포를 비롯한 한강 하류지역에서 한반도 최초의 쌀 재배가 이루어졌다. 한반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한강 하류지역에서 농경공동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오로지 현재까지 발굴되고 조사된 결과에 근거하는 것이고, 농경공동체의 시작이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직접적 근거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바로 청주 소로리 지역 토탄층에서 출토된 볍씨이다. 이 볍씨들이 기원전 1만 3000 년 전의 것이라는 사실이 방사성동위원소 연대측정방법을 통해 밝혀졌고, Colin Renfrew와 Paul Bahn의 저서 '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 (한국어 번역판 '현대 고고학의 이해', 2006)에 기록됨으로써 국제 고고인류학계로부터 인류역사상 최초의 볍씨인 동시에 최초의 곡식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해당 저서를 보면 농경과 문명이 흥기한 위치와 함께, 벼, 호밀, 옥수수 등의 곡식과 양, 돼지, 소, 개 등의 동물들이 최초 순화를 포함한 전 세계의 문화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와 편년표가 있고, 여기에 벼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곡식으로써 한반도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해당 편년표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벼 다음으로 전 대륙을 통틀어 인류에 의해 순화되었을 두 번째 곡식으로 기원전 1만1000 년경에 시리아에서 호밀이 출토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청주 소로리 볍씨가 인류에 의해 순화된, 즉 재배된 볍씨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 학계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재배벼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더라도, 소로리 볍씨는 이미 기원전 1만3천 년경 한반도 중부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쌀을 식량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다. 그리고 쌀을 먹기 시작한 때로부터 벼를 재배하기까지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을 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 어딘가의 산중 깊은 곳에서 샘물이 발원하여 시냇물을 이루고 계곡을 굽이쳐 흐르고 흘러 다른 물줄기들과 만나고, 수량이 불어난 하천은 멈추지 않고 흘러 넓고 큰 강을 이뤄 마침내 한강의 하구를 거쳐 서해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이렇게 엄청난 강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면서 한강 하류지역의 드넓은 평야는 기름진 충적토가 계속해서 쌓였고, 물이 풍부하며 넓고 기름진 이 지역에서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천혜의 환경을 제공했던 한강 하류 지역에서 쌀의 생산은 계속 늘어갔고, 이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상류지역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의 강 하류지역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바탕으로 그곳에서 멀지 않은 상류지역에 규모가 큰 도시국가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던 것처럼, 한강 하류지역에 위치한 김포는 서울의 식량을 책임지는 식량 공급원이었다. 아울러 각종 해산물을 포함하여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다양한 물자들이 서울로 공급되는 관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한강 하류지역의 곡창지대이자 물류의 관문이었던 김포가 없었다면, 서울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계 4대 문명이 모두 배후 식량 공급원으로 바다와 인접한 강 하류지역의 풍부한 곡창지대와 함께 발전했던 것처럼.

기원전 3천 년경 김포 일대에서 쌀농사가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그럼 김포를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지역에서 언제부터 쌀의 재배가 이루어 졌을까. 다시 한 번 Scott이 쓴 '농경의 배신(pp.72-73)'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기원전 9600년경 빙하기가 끝난 이후,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 사이에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원조작물founder crops인 렌즈콩, 완두콩, 병아리콩 등이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 즉 빙하기가 끝난 뒤 대략 1500년에서 3000년이 지난 시점부터 곡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주 소로리 볍씨는 기원전 1만3000 년경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최초로 곡물의 재배가 시작된 때보다 무려 5000 년이나 빠른 시기인 것이다. 설사 이 볍씨가 재배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마지막 빙하기가 시작되기 전인 기원전 1만800 년경까지 2000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이미 쌀을 식량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 사실만으로도 빠르면 빙하기 이전부터 또는 빙하기가 끝난 직후 어느 시점부터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리라 추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거의 같은 위도 상에 위치한 한반도에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곡물 재배를 했던 기원전 8000년에서 기원전 6000년보다 늦게 벼의 재배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출토된 볍씨들에 대해 과학적 분석기법을 통해 밝혀진 것으로는 한반도에서 벼의 '재배'가 시작된 시점은 기원전 3000년경이라 하더라도, 그 시기가 훨씬 더 이전, 즉 메소포타미아에서 곡물 재배가 시작되었던 때와 비슷한 시기였거나 오히려 그 시기보다 더 빨랐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농경이 시작된 시점은 한반도에서 문명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기준이다. 문명에 대한 정의가 여럿이고 문명의 시작점을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정착 농경공동체의 시작이 신문명시대로 접어 들기 전 구문명의 시원(始原)을 알리는 결정적 이정표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또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었고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또는 즐문토기)의 제작시기를 분석한 결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진아가 쓴 '지구 위에서 본 우리 역사 (2017, PP172-177)'를 보면 유라시아대륙 북부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빗살무늬토기 가운데 제주도를 비롯한 한반도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가장 오래된 것임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고, 그 시기가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들에 비해 1000년 이상 빠른 기원전 5000 년경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세계 최초의 벼 재배가 시작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빗살무늬토기가 제작되었으며, 전세계 전체 고인돌 가운데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약 3만 기의 고인돌이 한반도 전역에서 발굴되었다는 3가지 사실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나는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의 문명이 삼한이 설립된 기원전 100년경부터가 아니라, 빗살무늬토기가 사용되었던 시기인 기원전 5000 년을 넘어, 정착공동체를 이루고 최초의 벼 재배가 이루어졌을 기원전 8000 년에서 늦어도 기원전 6천 년경부터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온 구문명은 적어도 5000 년에서 8000 년에 이르는 장구한 기간 동안 발전하고 신문명으로 이어졌는데, 이 기간은 Scott이 주장한 대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 농경공동체가 원생국가의 형태로 존재했던 4000년의 기간보다 최소 1000년에서 4000년만큼 더 오랜 기간동안 존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삼한의 성립은 한반도 최초의 고대국가가 출범한 신문명의 시작점임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늦게까지 우리 민족이 평등사회를 유지했었는지를 상징하는, 한반도 문명사에 있어서 가장 상징적인 이정표인 것이다.

그래서, 문명을 어느 지역의 문명이 '먼저' 시작되었느냐가 아니라,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며 얼마나 오랜 기간동안 존속할 수 있었느냐' 라는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우주, 아니 인류가 진화한 역사와 비춰보아도 1만 년 남짓한 인류 문명의 역사는 너무나 짧고, 그런 큰 그림으로 보면 어느 문명이 먼저 시작되었고, 어느 민족은 늦게 문명화되었다는 식으로 문명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근시안적 접근으로 느껴진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열차에 누가 맨 앞 칸에 올라탔고, 누가 이어진 뒤 칸에 탔느냐'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플랫폼에는 열차의 앞 칸과 뒤에 연결된 칸들이 모두 같은 시간에 도착하고 있지 않은가.

3. 한반도 구문명이 인류가 추구할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장장 5000년에서 8000년 동안 이어진 한반도 구문명은 앞으로 머지않아 닥칠 미래를 불안과 당혹감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인류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구문명시대에 계층과 계급이 없는 정착 농경공동체가 추구했던 평등사회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2015, PP120-129)'에서 지구상 마지막 빙하기 이후 인류가 정착하며 농경과 목축을 통해 시작한 농업혁명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고 말했지만, 그가 단지 인류의 문명을 사기로부터 시작된 악순환의 연속이라 결론 내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인류가 종말이 아닌 미래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음을 그의 저서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세계 4대문명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그런 문명이 없다는 열등의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메소포타미아 등 다른 문명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문자도 그렇다. 최초의 문자였던 수메르어도 계급이 생겨나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겨나면서 전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군사를 징발하기 위한 기록의 수단으로 생겨났다. 모든 문자의 탄생이 그러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구문명 시기에 식량의 공동생산과 분배로 사유재산이 없었고, 그래서 계급이 생겨날 이유도 없었다. 어느 누가 타인을 지배하지 않는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 사회에서 문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러한 사회가 기원전 100년경까지 이어졌다. 그 뒤 고대국가가 생겨나면서 한자를 빌어 쓰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종에 의해 한글이 만들어졌다. 수메르어의 탄생에 비해 무려 6000여 년이 늦게 만들어졌지만, 한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세계의 다른 모든 문자들이 지배를 위한 도구로써 생겨난데 반해 한글은 그야말로 '백성을 위해' 고심해서 만든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문자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한반도는 인류 역사상 어느 문명, 어느 민족보다도 평화롭고 평등한 정착 농경공동체 사회를 가장 오랜 기간동안 이어왔다. 지구상 다른 지역의 신문명들이 예외 없이 그랬듯이, 한반도에서 겨우 2000년 남짓 이어온 신문명도 한마디로 국가의 백성에 대한 전쟁과 수탈의 연속이었다. 이 신문명이 자초한 현실은 현대 인류에게 당혹감을 넘어 비관적 수준에 다다랐다. 환경 파괴, 에너지 자원의 고갈, 계급 사회, 부의 양극화 등 신문명이 야기한 문제들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마지막 선택을 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나는 그 해답이 구문명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구 위에서 본 역사'의 말미에서 저자 이진아는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라는 말로 구문명이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인류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들의 해답이 구문명에 있다. 그것은 바로 평등, 평화, 공존, 번영 등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인류가 가장 소중하게 인식해야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이다.

따라서 나는 한반도 구문명이 잃어버린 시간, 공동화(空洞化)된 Missing link로 더 이상 방치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반도 구문명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한강 하류는 지금 철책선이 가로 놓인, 전쟁과 민족 분단의 현장이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이곳은 우리 민족을 넘어 멸망의 위기 앞에 놓인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마지막 기회를 살릴 지혜를 전하는 상징이다. 생존을 넘어 평화롭고 평등하며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어 갈 혜안을 얻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가장 오래 존속했던 평등한 공동체의 시원(始原)이다.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이 우리의 고궁들을 돌아보고 "한국의 역사를 느낄 수 없어서 아쉬워요"라는 말을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오히려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외국의 관광객들이 한국에 와서 한반도 문명을 느끼고 그것이 제시하는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깨닫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지그문트 바우만 등 안희경이 쓴 '우리는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 문명, 그 길을 묻다'에 등장하는 세계적 지성들이 제시한 것들이 바로 이 곳 한강 하류지역이 수천 년 동안 간직해 온 '인류가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야 할 길'이다.

나는 이곳 한강 하류지역, 우리 민족 최초의 벼재배가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한반도 구문명을 꽃피우게 만들었던 바로 이곳에 한반도 문명 기념관(또는 한반도 문명 기억 전시관)이 들어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코로나19도 지나간 뒤, 앞에서 이름을 열거한 세계적 미래학자들도 초대하고, 우리 국민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아오는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함께 모여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을 토론하고 열망을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태그:#김포, #지속가능성, #문명, #고인돌, #농경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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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점들, 특히 불신, 양극화, 청년빈곤, 경기침체, 재벌, 정경유착, 집단 이기주의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원인을 찾아내어, 효율적 해결방안을 찾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진 분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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