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들 푸르른 기록> 책 표지
 <우리들 푸르른 기록> 책 표지
ⓒ 이회림

관련사진보기

      
가해자가 출소한 후, 예상대로 언론은 과도하게 가해자를 조명하느라 카메라를 들이대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유튜버가 가해자의 집 앞으로 가서 고성을 지르고, 그들의 채널로 생중계까지 할 줄은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잊힐 권리'를 말하기 위해 말이든 글로든 그 사건을 소환했던 저나 그 유튜버들이나 결과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문득 들더군요. 아예 그런 칼럼도 쓰지 말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았을까 하면서 자꾸만 되돌아보면서요.

2020년 2월, 나영이의 언니가 저희 집에 놀러 왔을 때 함께 기획했던 책이 있었습니다. 제 예전 일기를 토대로 만든 에세이였습니다. 같은 해 12월, 가해자가 출소하기 전 먼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으면, 더 이상 그 사건과 가해자를 소환하는 현상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날에 임박해 책을 공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날이 오니 미디어에 나오는 가해자의 얼굴과 여러 유튜버 등을 보면서 속이 메슥거릴 지경이었습니다.

2012년까지만 실질적으로 나영이를 치료한 주치의가 지금까지 도움을 준 것처럼 보도되는 것도 혼란스러웠습니다. 2013년 여름, 나영이 아버지께서 주치의가 2012년까지만 나영이를 챙기고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진료를 중단했다며, 저에게 다른 정신과 의사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하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치의라는 분은 치료보다 정치에 더 집중하느라 바빴을지 모릅니다. 정말로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 내릴 만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어찌 되었든 지금이라도 발 벗고 나서 모금 운동을 하고, 나영이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책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이 책은 '나영'이라고 불리던 소녀를 환한 빛 속으로 잘 떠나보내는 방법에 대해 나영이 언니와 함께 고민한 시간의 결과물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잘 맞는 방법인지,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책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책의 첫 부분에서 가져온 '첫 만남'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입니다. 이 책의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이 계시면 전문을 찾아 읽어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당벌레 초콜릿
 
초콜릿은 나영이와 나를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초콜릿은 나영이와 나를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unsplash

관련사진보기

 
<우리들 푸르른 기록>

'첫 만남'

2009년 1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해바라기 아동센터에서 전해 듣고 연락드립니다. OO서 OO 형사님이시죠?"

2009년 1월, 아버님의 전화를 처음 받은 날은 제가 서울 시내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어요.

추운 겨울날, 병원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서 첫 만남을 가졌어요. 진료를 받기 전에 먼저 카페에 모여 인사를 나누기로 했던 거죠.

"인사드려, 너 도와주러 오신 경찰언니야."

나영이의 첫인상은 웃음기가 없고 피곤해 보였어요.

"안녕? 반갑다. 오느라 힘들었지? 언니가 선물 하나 준비해 왔어. 사실 내가 밤샘 근무할 때마다 한 통씩 먹어 치우는 건데, 왠지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네 것도 사 왔어."

절대로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섣불리 위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동네 초등학생 대하듯이 편하게 말을 걸었어요.

"어~?!"

나영이의 작은 눈이 확 커지면서 얼굴이 환해졌어요. 얼굴에 조명이 하나 더 켜진 듯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무거웠던 주변 공기가 명랑해졌어요. 처음 인사를 나눌 때는 내키지 않는 듯 건성으로 하느라 눈도 잘 마주치지 않더니, 무당벌레 초콜릿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금세 변했지요.

'무당벌레! 다 네 덕분이다!'

저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영이가 타고 온 차 안에 돌고래 모양의 쿠션이 놓여 있길래 무당벌레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을 슬며시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마운 무당벌레 초콜릿 덕분에 다소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병원 진료실에 함께 들어갔어요. 그런데 나영이의 얼굴에서 조금 전 그 밝은 표정은 풀썩 날아가 버리고 없더군요.

아무래도 병원이라는 곳이 꼭 필요한 공간이기는 하나 결코 편안한 장소가 될 수는 없었겠지요. 그건 저의 존재도 마찬가지. 나영이 입장에서 오늘의 만남을 미리 상상해보니, 저 또한 그동안 만나 온 수많은 회색빛 공무원 어른 중 하나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이회림님은 경찰관으로 활동 중입니다.


태그:#나영이, #잊혀질권리, #조두순, #신의진, #우리들푸르른기록
댓글

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