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 대한독립선언서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에 가장 먼저 발표된 독립선언서는 1919년 1월 만주와 해삼위를 중심으로 당시 해외에 나가 있던 저명인사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무오독립선언서'로도 불리고, 대종교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 까닭에 '대종교독립선언서'로도 불리는 독립선언서다.

여기에는 김동삼ㆍ김교헌ㆍ박찬익ㆍ김학만ㆍ김좌진ㆍ박은식ㆍ신채호ㆍ윤세복ㆍ정재관ㆍ이범윤ㆍ신규식ㆍ이시영ㆍ이상룡ㆍ이학만ㆍ유동열ㆍ이광ㆍ안정근ㆍ이대위ㆍ최병학ㆍ이동휘ㆍ박용만ㆍ이동녕ㆍ조소앙ㆍ여준ㆍ손일민 등이 서명했는데 상당수가 대종교 계열의 인사들이다.

'대종교선언서'는 먼저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과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좌하는 것이 아님을 선언하였다.

선언서는 일본의 병탄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촉구했다. 또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소앙이 집필한 이 선언서의 특징은 한국병탄의 무효를 선언하고,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게 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점이다. 대종교독립선언서를 필두로 2ㆍ8독립선언서, 3ㆍ1독립선언서 등 독립선언서가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항일투쟁의 절정을 이루었다. 1919년에 발표된 2ㆍ8독립선언, 기미독립선언 어디에도 '육탄혈전'을 촉구하는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대종교도들은 동포교육과 민족혼의 계승운동에만 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하고 항일무장투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대종교 지도자 중 서일ㆍ홍범도ㆍ김좌진ㆍ윤세복ㆍ김혁ㆍ이상용 등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북로군정서ㆍ대진단ㆍ대한독립단ㆍ흥업단 등을 조직하고 다른 무장단체와 연합하여 봉오ㆍ청산리대첩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최대의 전승인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은 대중교도들이 주축을 이루어 해낸 쾌거였다.

대종교가 무장투쟁의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살신성인ㆍ선공후사ㆍ진충보국ㆍ일기당천의 정신 속에는 단군을 국조로 하는 민족정통의 종교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오독립선언서' 석판인쇄본
 "무오독립선언서" 석판인쇄본
ⓒ 독립기념관

관련사진보기

 
안화춘(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교수는 대종교의 항일구국운동을 크게 세 가지로 종합하였다. 

첫째는 조선인의 민족정신,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일제의 문화침략에 대항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을 이룩하여 이상국가인 배달국가를 재건하려는 것.

둘째는 대종교도가 주체가 되어 반일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와 직접 무력항쟁을 전개한 것. 

셋째는 일제식민지통치에서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조선역사의 맥을 이은 것.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대종교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 정신과 혼맥의 원류에 홍암 나철 선생이 존재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태그:#나철, #나철평전 , #홍암, #홍암나철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