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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부산이다. 어릴 적에는 '제2의 수도'라는 수식어가 이 도시에 썩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어디서든 값싸게 먹을 수 있는 활어회부터 화려한 조명을 하늘에 수놓은 광안대교, 지금도 근현대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남포동까지. 이 모든 것들은 청소년기 나에게 애향심을 새겨 주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현재의 나는 자부심과 애향심을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가 애잔하다.

대학생이 되고 진로를 고민한 끝에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꿈을 위해서는 식견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백문불여일견'이라는 생각에 한동안 무작정 부산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는데, 부산에는 '일제의 흔적'이 꽤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강서구 대저1동 일대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을 꼽을 수 있다. 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의 주택을 말한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뒤 일본인은 그 집을 버리고 도망갔고, 한국 정부는 이를 거둬들여 우리 국민에게 매각했다. 대저 지역에는 당시 집을 매입한 이들의 자손들이 아직 그곳을 보존하며 살고 있었다. 이곳 일대를 지난해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찾아가 봤다. 

부산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강서구청역에 내리면 그 적산가옥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현재 대저1동 대부분은 산업용지로 쓰이고 있지만, 지역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1950년대 이곳은 적산가옥으로 빼곡했다고 한다. 지금도 한 블록당 최소한 한 채는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니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했다.
 
옆에서 본 적산가옥. 외벽 중간중간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옆에서 본 적산가옥. 외벽 중간중간에 페인트가 벗겨져 있다.
ⓒ 백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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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이 알록달록하다. 이름을 부르면 창문 틈새로 누가 나올것만 같다.
 외관이 알록달록하다. 이름을 부르면 창문 틈새로 누가 나올것만 같다.
ⓒ 백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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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1동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띈 적산가옥은 '대저중앙로 319번길'에 위치한 집이었다. 알록달록한 외관이 이목을 끌었다. 주택 소유주의 양해를 얻은 뒤 가옥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였던 건 돌담으로 만들어진 지하실이었다. 철문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었다. 지하실 안쪽은 텅 비어 있었기에 스산함이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로, 이곳은 과거에 과일 '배'를 저장하는 창고였다고 한다. 창고의 탄생 배경은 이랬다.

1900년대 초 당시 대저동 일대는 과수 농사하기 적절한 기후 덕에 배가 유명했다. 동시에 이 시기 일제는 조선의 토지 약탈을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막 세운 터였다. 일제는 이 동척을 통해 빼앗은 조선의 땅을 자국 농민에게 싼값에 불하했다. 한반도 이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자작농들은 자연스레 배로 유명한 대저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수확한 배는 전국으로 유통됐고, 유통되기 전 배는 따로 보관했어야 했기에 일본인이 이 같은 창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저 지역에 적산가옥이 특히 많은 이유도 여기 있었다.
  
대저로 22번가길 75-9에 위치한 적산가옥의 옆모습.
 대저로 22번가길 75-9에 위치한 적산가옥의 옆모습.
ⓒ 백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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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찾아간 적산가옥은 '대저로 22번가길 75-9'에 위치했다. 이 가옥은 3대가 잇달아 거주하고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관리를 잘한 듯 외관이 깔끔했다. 일제식 목조 건물에 군데군데 현대 양식도 엿보였다. 셔터 소리가 집 안까지 들렸는지 주인분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자신의 이름을 문영화라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적산가옥 특징도 함께 설명해 주셨다.

"일본식 가옥 주위에는 기필코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습니다. 적산가옥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린다면 이 점을 참고하세요."

다음 적산가옥을 찾으려 동네 골목골목을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던 중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한 가옥을 마주했다. 황량한 산업용지 한복판에 앙상한 뼈대만을 자랑하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먼저 들었다. 가옥은 '대저중앙로394번가길 146'에 위치했다. 문영화씨 말처럼 소나무 한 그루가 옆에 곧게 뻗어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내다본 대저중앙로394번가길 146에 위치한 적산가옥을 모습이다.
 아래에서 위로 내다본 대저중앙로394번가길 146에 위치한 적산가옥을 모습이다.
ⓒ 백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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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지만, 굳이 실내가 보고 싶어 삐걱삐걱 대는 계단을 밟고 2층에 올랐다. 사진 찍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지나가는 동네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뭐하러 찍어. 좀 있으면 철거될 건물을. 이거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이 말을 듣고 사흘 뒤 다시 와보니 실제로 건물은 철거되고 없었다. 아쉬웠다. 식민지였던 부끄러운 흔적을 없애는 것보다 잘 보존해 후세에게 이 치욕스러운 과거를 깨닫게 해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부산시 홍보 슬로건은 '피란수도 부산'인데, 잠시나마 수도였던 50년대의 영광만 기록하자는 뜻이었을까. 대저동 적산가옥이 하나씩 철거됨에 따라 부산의 근대사도 하나씩 지워지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번에는 골목을 나와 큰길가로 걸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이국적인 생김새의 새파란 지붕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기와지붕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적산가옥이었다.

이 집은 '강서구 1309번길 17'에 위치했다. 가옥의 소유주는 실제로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주인분께 촬영 허가를 받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배를 저장하던 창고와 또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강서구 1309번길 17’에 위치한 적산가옥의 마당에 들어섰다. 일본식 목조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강서구 1309번길 17’에 위치한 적산가옥의 마당에 들어섰다. 일본식 목조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 백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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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찾아간 적산가옥은 부산시 근대조형물로 지정된 '공항로1347번길 36'에 위치한 주택이다. 지금까지 봤던 적산가옥 간의 거리는 비교적 가까웠지만, 이번 가옥은 홀로 떨어져 있어 찾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공항로1347번길 36 적산가옥의 정면 모습이다. 출입문의 오른쪽 상단 끝에 근대조형물로 지정됐다는 푯말이 걸려있다.
 공항로1347번길 36 적산가옥의 정면 모습이다. 출입문의 오른쪽 상단 끝에 근대조형물로 지정됐다는 푯말이 걸려있다.
ⓒ 백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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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지금까지 본 적산가옥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본채 1곳과 별채 2곳이 있었는데, 곳곳에 일본식 목조 건물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었다.

대저동 일대 외에도 부산에는 '일제의 흔적'이 많다. 가수 아이유의 노래 '밤편지' 뮤직비디오 촬영지는 부산 동구 초량에 있는 적산가옥이다. 정치권에서 이슈인 부산 '가덕도신공항'의 그 가덕도도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군의 포진지였다. 부산은 일제의 한반도 수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내 고향에 애잔함을 느끼는 이유다.

태그:#부산 적산가옥, #대저1동, #일본식 가옥,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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